템빨 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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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40권 - 1화
“잊지 않겠다....! 절대로...! 절대로!!”
쏴아아아아....
잿빛으로 산화하며 절규하는 키르의 눈빛에 담긴 분노와 원한, 그리고 증오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피와 살을 내어서라도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이를 받아내는 그리드의 표정은 덤덤했다.
물론 그리드도 알고 있다.
깊은 원한의 대상이 되는 일은 절대적인 독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큰 화가 되어서 돌아올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부족했던 시절에 품었던 원한을, 분노와 증오를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준 경험이 있는 그리드가 이 사실을 모를 리 만무한 것이다.
‘...이제는 내가 복수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나.’
더 큰 힘을 얻을수록, 그 힘을 행사할수록 위태로워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몰아붙여도 괜찮을까?”
“안 괜찮을 이유는 뭐지?”
그리드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근심어린 표정을 짓는 지슈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늘 내 행동에 잘못 된 부분이 있었어?”
상왕 키르는 잠재적인 경쟁상대다. 명분이 있어서 싸웠고, 싸운 이상 철저히 짓밟고 빼앗는 편이 그나마 후환이 적었다. 어중간하게 자비를 베풀었다가는 도리어 더 큰 독이 되어서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플레이어 세력들이 화합과 배신, 동맹과 전쟁을 반복하고 있지 않던가?
“생존의 문제야. 상대방에게 여지를 줄 생각 따위 없다.”
그래,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만만하게 보였다가는 제2의, 제3의 임모탈이 탄생할 것이고 나의 소중한 사람이 위협을 겪게 된다.
‘복수를 시도조차 못하게끔 짓밟아주마.’
다짐하는 그리드의 차가운 눈빛을 엿본 템빨단원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곳곳에서 꿀꺽,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크리스만큼은 밝은 표정이었다.
한때 7대 길드의 수장이었던 크리스는 리더가 갖춰야할 덕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에게만큼은 하염없이 냉혹할 필요가 있지.’
Satisfy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에게 상냥하게 굴었다가는 역으로 잡아먹힐 뿐이다.
크리스는 그리드의 자질이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그리드는 유니콘의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유니콘>
동대륙의 전설적인 신수입니다. 무척 호전적이며 쉽게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남성을 혐오하는 기질이 있으며 여성을 한없이 사랑합니다.
이름:미설정
레벨:189
호감도:-110/100
생명력:40,000/40,000
마나:80,000/80,000
방어력:1,980
*마갑 장착 가능.
상태:슬픔. 짜증.
(여자 친구를 많이 만들어줘서 그나마 조금 정들었던 주인이 나를 버림. 버릴 거면 내가 지를 버려야지 왜 지가 나를 버림? 자존심 상해서 슬픔. 새 주인이 하필이면 또 남자라서 더 짜증임.)
-보유 스킬 목록-
<유니콘의 축복>(패시브)
탑승자의 모든 자원 회복 속도를 20퍼센트 상승시킵니다. 탑승자가 여성일 경우 추가로 30퍼센트 더 상승시킵니다.
<질주>
초당 60미터의 거리를 최대 3초 동안 이동합니다. 이때 유니콘과 탑승자는 슈퍼아머 상태에 돌입하여 모든 상태이상에 저항합니다. 단, 물리적인 상태이상에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탑승자가 여성일 경우 최대 5초 동안 이동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2분
마나 소모:4,900
<도약>
유니콘이 최대 10미터 떠오릅니다. 도약 순간에는 모든 종류의 공격과 장애물을 회피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5분
마나 소모:7,800
<격퇴>
유니콘이 크고 아름다운 뿔로 대상을 공격합니다. 대상을 넉백 시키며 10,000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힙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30초
마나 소모:1,500
<수컷 혐오>
유니콘은 대상이 어떤 종족일지라도 수컷이라면 무조건 싫어합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유니콘의 주인이 남성일 경우 하루에 한 번씩 호감도가 1씩 하락합니다.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여성과 지속적인 교감을 시켜줘야 합니다.
“.....”
성 차별하는 말이라니?
당황한 그리드가 유니콘을 살펴보았다.
윤기나는 흰 털과 길게 뻗은 목, 그리고 아름다운 뿔의 조화로부터 상당한 기품을 엿볼 수 있었다. 검고 큰 눈동자는 한없이 순수했다.
생김새와 상태창에 나오는 설명들이 전혀 매칭이 안 되는 것이다.
‘버근가?’
상태창에 명시 된 내용들이 모조리 잘못 된 건 아닐까?
긴가민가한 그리드가 유니콘의 얼굴을 쓰다듬는 순간이었다.
푸르릉!!
갑자기 도끼눈을 뜬 유니콘이 거친 숨을 내쉬더니 그리드의 가슴을 뿔로 박았다.
[10,0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윽...!”
방어력이 극도로 높은 그리드에게 있어서 만 단위 피해는 이제 생소한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격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 친 그가 유니콘을 찌릿, 노려보는 그때였다.
푸르릉.
갑자기 눈을 반달로 그린 유니콘이 지슈카에게 다가갔다. 지슈카의 커다란 가슴에 얼굴을 부비면서 지슈카의 작고 예쁜 얼굴을 혀로 날름날름 핥아댔다.
녀석의 실체를 모르고 겉모습에 현혹 된 지슈카가 밝게 웃는다.
“사람을 참 잘 따르는 아이네. 다행이야. 좋은 펫을 얻어서.”
“....방금 나 얻어맞는 거 못 봤어?”
“에이, 애정 표현이겠지. 주인을 공격하는 펫이 어디에 있어?”
푸릉! 푸르릉!!
지슈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리드와 지슈카의 대화를 엿듣는 유니콘의 상태가 변한다.
상태:기쁨
(못생긴 새 주인한테 예쁜 여자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음. 완전히 개이득임.)
[유니콘과의 호감도가 10 상승하였습니다.]
“.....”
싫은 놈이다.
아니, 여자 밝히는 건 둘째 치고 말투는 또 뭐야?
‘개발자가 약 빨고 만들었나?’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유니콘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성격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이름을 대충 지어줄 생각은 없었다.
“템빨콘.”
푸르릉! 푸릉!
[유니콘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유니콘과의 유대가 싹틉니다.]
[유니콘과의 호감도가 정상수치로 회복됩니다.]
호감도:0/100
이름 하나 지어줬다고 이토록 기뻐하다니?
푸르릉, 푸르릉 거리는 유니콘을 보면서 그리드는 유니콘이 의외로 순수한 생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템빨단원들의 눈에는 유니콘이 주인을 잃었을 때보다 더 슬프게 우는 것처럼 보였다.
***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프족 12개 가문의 주인들 ‘12테’가 그리드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자존감 높은 엘프가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고금을 통틀어 봐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자부심을 느끼기보다 민망했다.
“감사 받자고 한 일이 아니야. 말했잖아? 스틱세이에게 받은 은혜를 돌려주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그....”
그리드의 손에 이끌려서 몸을 일으킨 데루야루.
엘프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어린 생김새를 지닌 그 동글동글한 소녀가 조심스럽게 질문한다.
“숨은 현자 스틱세이 님과는 정확히 어떤 관계이신 건가요? 혹시 스틱세이 님의 근황을 알고 계시나요?”
100년 전, 존경하는 하이엘프 스틱세이가 숲을 떠난 직후 일어난 ‘비극’ 탓에 세계수의 숲은 절반으로 나뉘었다.
세계수를 경계로 삼아 별도의 마을을 건설한 남성 엘프들과 여성 엘프들은 벌써 수십 년 동안이나 서로를 외면하며 지냈다. 숲에서 마주쳐도 모른 체할 정도였다.
작금의 사태를 12테는 심각하게 여겼다. 안 그래도 개체수가 적은 엘프들의 출산율이 더욱 더 떨어지자 종족의 존망을 걱정하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남성 엘프들을 데리고 떠난 철부지 왕은 12테의 걱정을 묵살했다. 여성과의 화해는 없을 거라고 단단히 못 박았다. 여성 엘프들 또한 여전히 남성 엘프들을 혐오하고 있었다.
이럴 때 하이엘프 스틱세이가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철부지 왕의 귓방망이를 후려 쳐서라도 정신을 일깨워주었을 테고, 종족 화합의 기반을 다져주었을 텐데....
12테들은 스틱세이가 그리웠다. 특히 이번 사건을 통해서 더욱 더 스틱세이의 필요성을 느꼈다. 스틱세이가 있었다면 인간의 저급한 함정에 빠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스틱세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녀들이었다.
그리드가 설명했다.
“스틱세이와는 각별한 친구랄까.... 지금 스틱세이는 템빨국에 머물면서 나를 위해 온갖 도움을 주는 중이야.”
“스틱세이 님께서 인간들의 나라에....”
술렁거리는 12테들 사이에 선 그리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스틱세이의 근황을 모르는 거야? 그는 최근에도 이곳을 찾아왔을 텐데?”
스틱세이는 칸의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서 세계수의 숲을 다녀갔었다. 한데 엘프들이 그 사실을 모르자 그리드로써는 의아했다.
12테들이 당황했다.
“스틱세이 님께서 최근에 숲을 방문하셨다고요?”
“응.”
“이런....”
그리드가 재차 대답하자 12테들이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스틱세이 님께서는 하필이면 왕이 있는 마을로 떨어지셨던 게 아닐까?”
“맞아. 그런 것 같아.”
“그 저질 왕이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았을 게 분명해. 스틱세이 님께서는 숲의 사정을 모르실 거야.”
결론은 하나다.
심각한 표정으로 떠들던 12테들이 일제히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틱세이 님께 숲에 방문해 달라고 전해주실 수 없을까요?”
“왕만 찾아뵙지 말고 꼭 우리 12테들도 만나보라고 전해주세요.”
“어? 으, 응. 그래.”
엘프족에는 또 어떤 에피소드가 숨어있는 걸까.
자신들의 왕을 ‘저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아 여러 가지 사정이 있나보다.
그리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귀찮을 것 같은 냄새가 풀풀 풍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숲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초의 나무 ‘세계수’의 부름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엘프들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할 생각이겠지?’
필시 큰 선물을 주지 않을까?
기대감에 휩싸인 그리드가 엘프들의 안내를 따라서 마을로 이동했다.
그는 다른 12테들과 달리 묵묵히 있는 베니야루의 눈동자에 깃든 공허와 분노를 엿보지 못했다.
다만,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만큼은 똑똑히 목격했다.
[죽은 이들을 거느리는 자가 전설로 거듭났습니다!]
[세계가 공포에 빠질 것입니다!]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알리는 월드 메시지.
여태까지와는 양식이 다소 다르다.
‘거듭났다’는 표현과 ‘죽은 이들을 거느리는 자’라는 명칭.
단 한 명만이 떠오른다.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선 템빨단원들의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리드가 읊조렸다.
“아그너스....”
***
『데뷔와 동시에 유명세를 떨치게 된 조각가 폴리쉬가 Satisfy를 통해서 조각술을 익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Satisfy를 통한 기술 학습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미 많은 단체와 국가가 Satisfy를 통한 인재 육성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 S.A그룹은....』
거대한 고성은 적막에 잠겨있었다.
어둠속에 밝혀진 TV 속 앵커의 목소리만이 무의미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치이이익.
캡슐이 열린다.
비틀비틀, 메마르고 창백한 몸을 일으켜 세운 녹발의 사내가 알몸 위로 가운을 걸쳤다.
아그너스였다.
피곤에 절은 그의 시선이 방 중앙에 장식되어 있는 커다란 초상화를 쫓았다.
초상화 속 여인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지독히도 불행했던 그 시절의 공허한 표정은 흔적조차 없다.
“다시 만날 날이 머지않았어.”
성장형 히든 클래스 <바알의 계약자>가 드디어 레전드리 클래스로 승급했다. 무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피 토하는 노력을 거듭한 결과다.
그토록 바라던 ‘창조’ 스킬을 얻은 것이다.
“카롤린, 나는 너를 만들겠다.”
그 어떤 희생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현실이 아닌 거짓일지라도 상관없다.
아그너스는 못난 자신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렸던 유일한 사랑과 다시 함께하는 삶을 만들고 싶었다.
그때는 이 메마른 현실이야말로 거짓이 되리라.
생각하며, 초상화에 뺨을 기댄 아그너스는 그대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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