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9권 - 23화
“라우엘이 대기하고 있으라기에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소환당했네. 상황은 대강 들었어.”
끼리릭-!
황홀한 구릿빛 피부의 미인이 활시위를 당겼다. 시위에 걸린 3개의 화살촉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크고 도톰한 입술처럼, 풍성하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처럼 화려하고 붉은 불꽃이었다.
“잔챙이는 우리에게 맡겨.”
싱긋,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린 지슈카가 활시위를 놓자 신기에 가까운 궁술이 전개됐다.
슈슈슉!!
시간 차 없이 쏘아진 3발의 화살이 암왕 디아스의 미간과 눈,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도달한 것이다.
피격 당사자 디아스는 물론이고 그에게 붙잡혀 있는 수십 명의 엘프들까지 모두 깜짝 놀랐다.
‘엘프도 아닌데 이만한 궁술을?’
푹-! 푸푹!!
퍼퍼펑!!
빛살처럼 쏘아진 화살이 명중함과 동시에 폭발한다.
치명상을 입은 디아스가 뒤로 멀찍이 날아가 뒹굴었다.
무방비하게 쓰러진 그에게 돌진한 크리스가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그리드를……!!”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크리스는 생각한다.
국왕 그리드에게 도전하려는 자, 공작인 나부터 꺾음으로써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고!
서걱!!
거검에 베이는 디아스!
연속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움찔거리는 그에게 레가스의 발차기와 폰의 창이 꽂혔다. 강렬한 스킬 이펙트가 어지럽게 폭사했다.
마무리는.
“쥬드. 벤다.”
쥬드의 일격이었다.
부웅!!
쥬드의 공격이 넝마가 된 디아스를 노리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었다.
“……?????”
왜 갑자기 트롤링을?
쥬드가 디아스를 마무리 지을 거라고 예상했던 일행들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쥬드를 대신해서 크리스가 재차 나섰다.
“천톤 검!!”
쿠우우우웅!!
묵직한 일격!
디아스가 잿빛으로 산화했다.
“자, 이제……?”
곧바로 그리드를 지원하려던 일행이 멈칫한다. 디아스의 사망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을뿐더러 경험치와 아이템을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모두 당황했다. 쥬드만이 놀라지 않고 예의 그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지슈카의 등 뒤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디아스의 목소리였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주인이 사고 한번 제대로 쳤나 보군. 남들에게 원한 좀 그만 사라고 내 그토록 일렀건만, 급기야 사자의 코털까지 건드리고 말았어. 쯧!”
크리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지슈카! 피해라!!”
늦었다.
푸우욱-!!
검게 물든 디아스의 손이 지슈카의 갑옷을 꿰뚫고 들어가더니 그녀의 탄력 있는 피부와 근육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12,3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환술에 빠진 상태입니다. 통각이 극대화됩니다.]
[5,700의 추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모든 자원의 회복 속도가 느려집니다. 방어력과 저항력이 하락합니다. 앞으로 10초 동안 스킬과 마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쿨럭……!”
강하다.
허를 찔리고 중상을 입은 지슈카의 경각심이 뒤늦게 극대화되었다.
‘그리드는 이런 괴물들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던 거야?’
상대한 적 없지만, 착각은 자유!
디아스는 그녀로부터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퍼퍼펑!!
뒤늦게 날아온 레가스의 발차기와 폰의 찌르기가 애꿎은 허공을 관통하며 파공성을 터뜨렸다.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공격을 회피하고, 휘유! 한숨 돌렸다는 듯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한 디아스의 시선이 푸오와 그리드를 살폈다.
“망했네. 이거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잖아.”
템빨왕과 그의 기사들, 소문 이상의 실력이다.
당장 자신만 해도 위험했다.
디아스는 판단한다.
그리드의 기사들과 일대일로 대치했다면 또 몰라도, 이들 전부를 상대로는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특히 입을 살짝 벌린 채 멍청한 표정으로 있는 거구의 기사가 문제였다.
“쥬드. 죽인다.”
‘이자에게는 환술이 통하질 않아. 바보 같은 표정은 조롱의 의미를 담은 연기인가?’
쩌어어어엉-!!
날아오는 묵색 대검을 수도로 막아 내는 디아스.
검에 실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팔을 황급히 회수하는 그에게, 허리를 크게 젖힌 쥬드가 좌로, 우로 연속 베기를 시전했다.
쩌정! 쩌저저저정!!
“크윽……!”
무지막지한 힘!
디아스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환술이 벗겨졌다.
그러자.
“거기였나!!”
쥬드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보고 있던 다른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디아스의 본체로 향했다.
디아스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환술이 깨질 줄이야…….”
처음 겪는 일이다.
바이올렛 왕국을 무대로 활약했던 암왕 디아스는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셀 수 없이 많이 상대해 보았지만 이토록 빠른 위기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가 봤을 때 쥬드는 초월적인 고수였다.
“템빨왕의 제일 기사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너였던 거군.”
“쥬드. 주군의 첫 번째 기사!”
쩡-! 쩌저저저저정!!
쥬드의 대검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연속적으로 호선을 그리며 디아스를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
그리드에게 기사로 발탁된 이후 성장을 거듭해 온 쥬드.
수인족 왕 맥스옹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한계 돌파>를 체험하고, 이후 벨리알 레이드에서 한층 더 강해진 그가 3회째 <한계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푸욱!! 푹푹!!
디아스가 반격하며 저항을 시도했다. 쥬드의 대검을 막아 낸 그의 수도가 쥬드의 복부를 몇 차례나 관통했다.
하지만.
퍼퍼퍼퍼펑!!
쥬드를 원호하는 지슈카의 화살 세례가 그의 반격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화살이 쏘아지고 또 쏘아질수록 디아스의 상처는 늘어나는 반면 쥬드의 상처는 회복되며 줄어들었다.
쥬드와 함께 협공해 오는 크리스와 폰, 레가스도 압박이었다.
급기야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디아스가 쿨럭! 피를 토해 내며 말했다.
“너희들이 사용하는 무구… 그거 전부 템빨왕이 제작해 준 거겠지? 소중한 추억이, 훗날에는 역사가, 전설이 될 이야기들이 그 무구들 속에 담겨 있을 거야. 맞지?”
그래,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디아스는 전하고 싶었다.
“우리도 저마다의 사정을 지녔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악역이 되었다만, 나나 저기 있는 괴물 녀석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할 이야기가 많아. 특별한 힘을 지녔다는 이유로, 혼종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끔찍한 인생을 살아가던 도중에 주인을 만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
무슨 말을 하려는가?
네임드 NPC의 장황한 서두가 크리스 일행의 귀를 사로잡았다. 퀘스트의 전조일 거라는 생각에 모두들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쥬드만 빼고 말이다.
바둥바둥!
레가스와 폰에게 붙잡힌 쥬드가 몸부림을 쳤지만 모두들 무시하고 디아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디아스는 그들에게 퀘스트를 주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부탁을 할 뿐이었다.
“우리의 주인을 너무 증오하지만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도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거든.”
플레이어에게도, NPC에게도, 괴물에게도.
모두에게 사연은 있다.
이를 전하는 디아스의 마지막 바람은 단지 주인의 안전, 그것 하나뿐이었다.
따악!
말을 끝낸 디아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
주변의 나무 중 몇 개가 엘프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변한 게 아니라 되돌아간 것이다.
푸오가 지속적으로 엘프들을 섭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잦은 공복을 호소했던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푸오 저 녀석, 여전히 공복 상태야. 놈이 느꼈던 포만은 내 환술에 의한 거였다. 하지만 이제 곧 환술이 풀릴 테니 앞으로 오래 싸우지 못할 테지.”
씁쓸한 표정을 지은 디아스가 그리드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시작하는 푸오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지슈카가 질문했다.
“엘프들을 살려 준 이유가 뭐지?”
“내가 이래 봬도 정의의 사도였거든.”
“…….”
“크큭, 농담이야. 말은 바로 하자. 나는 엘프들을 도운 게 아니라 주인을 위했을 뿐이다.”
그래, 푸오가 주인의 ‘상품’들을 해치는 걸 볼 수 없어서 환술로 엘프들을 보호했을 뿐이다. 결국 모든 게 주인을 위해서였다.
우리의 젊은 주인, 우리를 진심으로 대해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나, 처음 만난 그날에 베풀어 주었던 은혜만큼은 진짜였으니까.
“부디 우리 주인에 대한 분노가 조금이나마 사그라졌기를…….”
바람을 뱉은 디아스가 여전히 레가스와 폰에게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쥬드에게 목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최강의 기사에게 최후를 맡기는 것이었다.
“자, 잠깐.”
지슈카가 쥬드를 말리려고 했다. 디아스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크리스와 폰, 레가스 또한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쥬드는 단호했다. 레가스와 폰을 간신히 뿌리치더니,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검을 휘둘러서 디아스의 목을 잘랐다.
“시간 낭비. 안 된다. 주군. 도와야. 한다.”
잿빛 기둥을 등진 쥬드가 곧바로 그리드에게 달려갔다.
디아스가 죽고 환술이 완전히 풀리자 끔찍한 공복에 휩싸인 푸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광전사로 돌변해 있었다. 커다란 양손을 계속해서 휘두르며 그리드를 압박하는 중이었다.
“쥬드! 돕는다!”
오직 그리드만을 바라보며, 오로지 그리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아니, 생각 없는 기사.
디아스를 쓰러뜨림으로써 세 번째 <한계 돌파>를 맞이한 그리드의 제일 기사 쥬드가 기세등등하게 출격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연살파극(聯殺派極)!”
“크워어어어어어!!”
광전사로 돌변한 푸오는 오로지 공격에만 열중하였고, 그것이 도리어 독이 된 상태였다.
그리드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회피할 생각도 못하고 맞아 주면서, 기껏 넣는 역공이라고는 죄다 실드에 가로막히거나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독 안개 옵션만 발동시키는 꼴이 되었으니 엄청난 데미지가 누적된 입장이었다.
끝내.
쿠우우우우우우웅!!
푸오는 신장의 효과 덕분에 2번 연속 전개된 연살파극을 견디지 못했다.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더니 잿빛으로 산화해 버렸다.
뒤늦게 그리드의 곁으로 달려온 쥬드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주군. 멋짐!”
***
“…….”
세계수의 숲에 진입한 이후 잠시도 쉬지 못한 키르의 스태미나가 고갈됐다.
상태 이상 탈진에 걸려서 축 늘어진 그의 뺨을 유니콘 페로가 핥아 주었다. 페로의 맑은 눈에는 진한 애정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키르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펫 또한 인공지능, 그래픽 덩어리에 불과했으니까.
“칫.”
마치 더럽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뺨에 묻은 침을 닦아 낸 키르가 시선을 뒤로 돌렸다.
묵묵히 서 있는 페이커가 보였다.
키르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이토록 집요하게 구는 거지? 도대체 나를 죽여서 어떤 의미가 있는 거냐? 내가 경험치와 아이템을 잃는다고 해서 템빨국에 돌아갈 이득이 대체 뭔데?”
입장 좋은 투정이라는 건 키르 본인도 알고 있었다.
Satisfy는 현실과 똑같은 경쟁 사회인바, 플레이어가 플레이어를 견제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키르가 이대로 승승장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언젠가는 그리드와 비견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터였고, 그때가 오면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그리드를 위협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씨발… 빌어먹을…….”
키르는 그리드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적이 되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끝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작금의 상황,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당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유니콘의 축복 덕분에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 스태미나.
탈진을 극복하고 축 늘어졌던 몸을 세운 키르가 여전히 공허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에 포박되어 있는 베니야루의 입가에 작은 유리병을 들이밀었다. 병 안에는 검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야탄의 정수다. 이 정도 양을 한꺼번에 복용하게 되면 제아무리 네임드 NPC라도 즉사를 면할 길이 없지. 알겠어? 나는 절대로 혼자 죽지 않아.”
그리드는 베니야루를 호명했었고, 베니야루는 그리드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었다.
키르는 베니야루와 그리드가 각별한 사이일 것으로 추측했다. 베니야루의 죽음이 그리드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거라고 보았다.
“나 혼자만 전부를 잃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안 그래.”
“……!”
악에 받쳐 지껄이던 키르가 깜짝 놀랐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빌어먹을 그리드 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갓 핸드가 날아와 망치를 휘두른 까닭이다.
퍼억!
“으윽!”
망치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경직되는 키르!
그리드에게 품속의 베니야루를 빼앗기고 만 그가 꽈드득! 이를 갈았다.
“네놈……! 네놈 대체 내게 뭘 얼마나 빼앗아 가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명백한 피해자!
키르가 느끼는 본인의 입장이었다.
그의 외침에 담긴 증오와 분노는 진실했다.
그리드가 반문했다.
“너는 엘프들에게 뭘 얼마나 빼앗아 가야 직성이 풀렸던 거지?”
“뭐…….”
키르가 할 말을 잃는다.
피해자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게 된 지금의 그에게 있어서 그리드가 던진 질문은 허를 찌르고도 남는 것이었다.
완전히 말문을 닫아 버리는 키르에게 시선을 뗀 그리드가 베니야루를 살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까?
마치 인형을 보는 듯하다.
감정을, 생각을 모조리 차단한 상태 같았다.
“그녀가… 엘프들이 대체 네게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고통을 받는 거지?”
“…….”
지금의 키르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 그에게 그리드가 검을 겨눴다. 당장이라도 목을 칠 기세였다.
그때 후로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그리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군, 저 후레자식이 타고 있는 말은 유니콘입니다.”
“유니콘? 근데?”
“빼앗으시죠.”
“뭐?”
펫을 빼앗아?
무슨 수로?
펫은 아이템과 다르다. 플레이어가 죽는다고 떨구는 개념이 아니었다. 펫에 대한 플레이어의 소유권은 영원히 완전하게 보장되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양도받으시면 됩니다.”
“아니, 자꾸 뭔 소리야.”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후로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그였다.
“저 새끼가 대가리에 총이라도 맞지 않은 이상 나한테 펫을 양도하겠어?”
“살려 주시는 대가로…….”
속닥속닥!
갑자기 멈춰 서서 귓속말로 떠드는 그리드와 후로이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일행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잠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키르, 살려 줄까?”
그리드의 갑작스러운 제안 때문이었다.
“뭐? 살려 주겠다고?”
키르도 당황했다.
귀를 의심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살려 줄게. 너 이번에 엘프들 붙잡느라고 돈 꽤 썼을 거 아니야? 거기에 죽기까지 하면 랭킹이 떨어질 테고, 앞으로의 거래에 차질이 발생할 텐데?”
맞는 말이다. 키르는 부정하지 못했다.
잠자코 생각해 보는가 싶던 키르가 역시나 상인답게 즉각 눈치챘다.
“살려 주는 대가로 원하는 게 뭐지?”
질문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손가락으로 유니콘을 가리켜 보였다.
“그거.”
“미친 새끼!!”
키르의 반응은 격했다. 당연하다. 유니콘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으니까!
키르가 계산하기로, 플레이어 중에서 유니콘을 펫으로 거느린 사람은 단 10명도 되지 않았다. 그 귀중한 신수를 바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절하려는 그에게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 수틀리면 척살령을 내려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꿀꺽!
척살령!
그 한마디가 키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는 최근의 임모탈이 어떤 수모와 고통을 겪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강의 플레이어 집단인 임모탈조차 감당 못하는 템빨국의 척살령을 그들과 비교하면 일개 상인에 불과한 자신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힘들다.
제국의 비호 아래 템빨국의 공습은 막을지 몰라도, 템빨의 유혹에 넘어간 다른 평범한 플레이어들의 기습까지 감당하기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자칫했다가는 무려 20억 명의 표적이 되는 수가 있다!
까드득!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진 키르가 몸서리치면서 손톱을 깨물었다. 그에게 그리드는 깊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유니콘 내놔. 그럼 척살령도 내리지 않고 목숨도 살려 줄 테니까.”
“정말… 정말로 살려 줄 거냐? 척살령도 내리지 않을 거고?”
“응. 대신 다음에 또 우연히 만나면 열 받아서 죽일 수도 있어. 나, 네가 정말로 싫거든. 평생 나랑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거야.”
“크윽……!”
재력과 무력, 그리고 권력까지 삼위일체로 갖춘 인물이 바로 그리드였다. 템빨을 원료로 삼은 그의 인력은 무한하다고 봄이 옳다. 키르는 그리드가 두려웠다. 그의 제안에 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하여, 결국.
[유니콘 ‘페로’의 소유권을 플레이어 ‘그리드’에게 양도하였습니다.]
그리드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미래를 본 선택이었다.
“…이제 돌아가도 되는 거겠지?”
힘 빠진 목소리로 질문하는 키르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라.”
터벅터벅.
시간과 돈, 그리고 자존심과 유니콘까지 모조리 상실한 키르의 걸음걸이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는 살기와 의욕이 넘쳐흘렀다.
‘반드시… 반드시 언젠가 오늘의 수모를 갚아 주겠다.’
1년, 2년 안에는 불가능할 일이다. 하지만 4년, 5년 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키르는 반드시 재기해서 당초의 계획대로 제국의 비호를 받고, 가우스 왕국을 중심으로 연합국까지 세워 그리드에게 복수하리라고 천 번, 만 번 다짐했다. 더 강한 힘과 권력을 쌓게 되면 그리드와 충분히 대적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믿음은 곧 무참히 깨졌다.
“그새 경고를 잊었어? 내가 마주치지 말자고 했잖아?”
“뭐?”
20여 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키르가 고개를 들었다가 질색했다. 새하얀 유니콘 위에 탑승한 그리드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장난……! 설마!!”
설마 플레이어의 지존이라는 자가 삼류 양아치 같은 짓을?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불길한 상상을 떠올렸다가 부정하는 키르에게 그리드가 칼을 겨눴다.
“내가 또 마주치면 죽인다고 했잖아. 조심하지 그랬어?”
“이, 이 개자식이……!”
악당. 아니, 건달. 아니, 양아치다.
양아치 중의 개양아치다.
그리드의 본질을 뒤늦게 꿰뚫어 본 키르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기사 소환!!”
보험으로 빼돌린 엘프 노예들에게 집착할 때가 아니다.
내 오늘 그리드 저놈을 요절내리라!
다짐하며, 3명의 기사를 소환하려던 키르가…….
“뭐라고……?”
넋을 잃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알림창 때문이었다.
[소환 가능한 기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 설마……?”
“유니콘은 잘 쓸게.”
푸우욱!!
세계수의 숲을 지옥도로 만들었던 키르가 잿빛으로 산화한다.
상왕 몰락의 전조였다.
그렇다.
그리드에게 목이 베인 이날, 키르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아직 남은 것이 있었다.
대륙 각지에 보유 중인 상권과 도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유니콘이 슬피 웁니다.]
[유니콘과의 호감도가 매우 낮습니다.]
[유니콘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을 추천합니다.]
[엘프족과의 호감도가 50 올랐습니다.]
[세계수가 당신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세계수가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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