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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92화 (687/1,794)

템빨 39권 - 21화

-후로이 : 주군!! 빌어먹을 개자식을 발견 하였나이다!!

-그리드 : 빌어먹을 개자식? 키르 말이야?

-후로이 : 네! 그러하옵니다!

-그리드 : 좋아. 페이커, 당장 후로이에게 합류하도록 해. 나도 엘프들을 구출한 뒤에 따라갈게.

-페이커 : 알았다. 누차 말하지만 조심해라.

쿠와아아아아아아-!!

그리드만큼 펫 의존도가 낮은 플레이어는 드물다.

종족, 속성, 성별, 레벨 등에 따라서 각기 다른 특징을 자랑하는 펫은 플레이어의 든든한 우군이었고, 개인의 힘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펫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서 자연히 펫의 레벨도 높았다.

초창기부터 후로이와 활동하며 300레벨을 돌파한 ‘초원 위 하늘의 제왕’이 내뿜는 화염은 키르에게 충분한 위협을 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9,7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화상을 입었습니다! 초당 1,330의 화상 피해를 입습니다!]

“크으윽....!”

불길에 휩쓸린 키르가 고통에 몸부림친다.

온갖 레전드리급 방어구와 장신구, 보석류 아이템들이 부질없는 끔찍한 피해였다.

<독설>에 당해 방어력과 저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브레스를 직격 당하자 본인을 그리드 다음가는 템빨러라고 자부해온 키르일지라도 중상을 면할 길이 없었다.

‘승산이 없다!’

키르의 판단은 빨랐다.

후로이가 누군가?

단순한 웅변가가 아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세컨드 클래스를 획득한 그는 검사이기도 했다.

심지어 비룡까지 거느린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하이랭커에 준하는 강자.

반면 돈 날리기를 제외하면 전투 수단이 전혀 없는 상인 키르의 입장에서는 퇴각을 고려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도망치기도 어려웠다.

“사람새끼로 태어난 이상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어야 하거늘!!”

“이 자식이....!”

[도발 당합니다!]

일단 살고 보자.

생각하며, 뒤도 안 보고 달아나려던 키르가 제자리에 멈춰 선다.

<도발>이라는 이름의 상태이상이 그의 이성과 본능보다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시스템에 항거한다는 것은 NPC나 플레이어 모두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푸욱-!!

양산형 그리드의 장검과는 완전히 다른 아이템이라고 봐도 무방한 <그리드의 장검>이 무방비한 키르의 옆구리를 깊숙이 찔렀다. 하지만 키르 또한 레전드리 등급의 방어구를 도배하고 있는바, 근본적으로 웅변가인 후로이의 일격에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나는 상왕 키르다....! 너 같은 어중이떠중이 따위가 쉽게 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도발의 지속시간이 끝나자마자 물약을 꺼내 마시며 도망치는 키르의 외침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제아무리 후로이가 하이랭커급 강자라지만 템빨왕 그리드와 비교하면 하찮지 않은가!

그리드에게는 찍소리조차 낼 수 없었고, 살기 위해서는 거액의 금화를 바쳐 <돈 날리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던 키르라지만, 그리드의 부하에 불과한 후로이에게는 굳이 돈 날리기를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돈을 낭비하는 건 사치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크롸라라라라라라라!

비룡의 강력한 화염은 그에게 고민을 강요하고 있었다.

비룡은 마치 외치는 듯했다.

살고 싶으면 돈을 바치라고!

‘안 돼....! 더 이상의 지출은 정말로 감당하기 어렵다!’

제길, 이럴 때 기사 소환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키르가 보유한 기사는 단 3명이다.

그리고 키르는 그들 전부를 불과 몇 분 전에 소환한 상태였다.

재사용 대기 시간 탓에 지금 곧바로 다시 그들을 소환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후회가 밀려온다.

그리드에게 사소한 복수를 하겠답시고 기사들을 소환해가면서까지 엘프를 학살한 일이!

콰쾅! 쿠콰콰콰쾅!!

숲을 불바다로 만드는 브레스의 폭격!

허겁지겁 말위에 올라탄 키르, 간신히 회피한다.

시야를 방해하는 수풀과 위협적인 가시덩굴, 그리고 바위와 나무들을 마치 날 듯이 돌파하는 키르의 백마는 명마 중의 명마였다.

후로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마의 이마에 아주 작은 뿔이 솟아있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챈 까닭이다.

“유니콘?”

말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뿔의 크기가 작다. 뿔의 크기를 보아 아직 성체는 아니다.

하지만 새끼 유니콘이라고 해도 그 가치는 천문학적이었다.

후로이가 알기로 각국의 왕족 NPC 중 일부만이 유니콘을 보유했다고 들었다.

“역시 부자는 다르군....!”

황급히 비룡 위에 올라탄 후로이가 그대로 키르의 뒤를 쫓았다. 때마침 페이커가 합류하고 있었다.

키르는 지상에서도, 상공에서도 자신의 뒤를 바짝 추격해오는 그들에게 큰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내가 왜 이딴 수모를 겪어야하는 거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엿보이는 키르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초라한 모습이다. 그리드, 크라우젤, 아그너스, 아레스 등의 내로라하는 명사들 다음가는 명성을 자랑했던 상왕의 위엄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

“손에 꼽아도 좋을 정도로 불쾌한 임무로군.”

상왕 키르의 기사 중 하나, 바누스가 혀를 찬다.

숲을 가로지르는 그의 곁에는 포승줄에 묶인 엘프 20여 명이 함께였다.

비록 다른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저항조차 못하는 여성들을 학살하고 납치하는 임무라니?

주인 키르가 내린 이번 임무가 바누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솔직히 말해서 바누스는 자존심이 상했다.

무려 투왕이라고 칭송 받는 자신 같은 거물이 삼류 도적이나 다름없는 임무를 수행하다니,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주인을 잘못 골랐어.’

주인 키르는 약속했었다.

자신을 따르면 막대한 부와 명예를 안겨주겠노라고.

전사에게 있어서 최고의 명예란?

이름난 강자와 싸우고 승리하는 일이다.

그래, 키르는 말했었다. 자신을 따르면 셀 수 없이 많은 강자들과 싸우게 될 거라고. 하루하루가 즐거울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이따위다.

“칫....”

얼굴을 구긴 채 길을 걷던 바누스가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휘둘렀다.

숲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점차 느리게 걷는 엘프들을 재촉하기 위함이었다.

철썩! 철썩!

“아윽....!”

신음하는 엘프들의 생명력 게이지가 눈에 띄게 줄었다.

평범한 키르 상단원들이 엘프들을 때렸을 때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바누스의 높은 무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바누스가 엘프들에게 경고했다.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으니까 허튼 수작 부리지마. 그게 서로에게 좋다.”

이때.

“다른 기사들과 엘프들은 어디에 있지?”

쿠웅- 상공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며 등장한 흑발의 사내가 바누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맹금류의 것을 연상하게 만드는 사내의 날카로운 눈매를 목도한 바누스가 화색을 지었다.

“템빨왕?”

아직 키르를 섬기기 전, 돈과 싸움을 갈망하며 대륙 전역의 전장을 찾아다녔던 용병 바누스는 구 에트날 왕국에도 고용 된 전력이 있다. 전쟁 상대는 템빨국이었다.

당시의 짜릿한 경험을 바누스는 잊지 못한다.

그 검은 피부 성기사의 이름, 토반이라고 했던가?

템빨국 최강의 전사로 추정됐던 그와의 1대1 혈투를 떠올리면 아직도 짜릿했다.

장장 1시간의 사투 끝에 쓰러뜨렸던가.

바누스는 자부한다.

만약 자신이 그 템빨국 최강(?) 전사의 발목을 붙잡지 못했다면, 구 에트날 왕국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템빨국에 점령당했을 거라고.

“큭....! 큭큭큭! 그렇군! 우리 주인께서 누구를 상대로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나 했더니, 바로 당신이었나?”

꾸드득! 꾸득!!

바누스의 거대한 근육이 더욱 더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악력만으로 사람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수 있는 괴력의 사내가 호승심을 불태웠다.

“전쟁에서 당신의 활약, 멀리서 잠시나마 엿보았었다. 수천 병사들을 아주 휩쓸고 다니더군. 후훗, 좋아.... 이거 아주 기대되는군! 고맙다! 내 앞에 나타나줘서!!”

포효한 바누스가 망설이지 않고 그리드에게 돌진했다.

천 옷 한 장 걸치지 않아도 창칼에 베이지 않을 정도로 단련 된 그의 근육, 템빨국 최강(?) 전사 토반의 일검조차 막아냈던 그의 그 단단한 근육이 키르에게 하사 받은 레전드리 방어구의 방어력과 맞물려서....

서걱!!

그리드의 일격에 처참하게 베인다.

“윽....?!”

수십 년 만에 겪는 고통!

당황하는 바누스였으나 육체처럼 견고한 정신력으로 견뎠다.

휘두르던 팔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내질러서 그리드의 가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오우거조차도 풍선처럼 터뜨리는 그의 주먹, 템빨국 최강(?) 전사 토반에게조차도 일격에 큰 피해를 선사했던 그의 주먹이 키르에게 하사받은 레전드리급 너클의 공격력과 맞물려....

터엉-!

그리드의 갑옷에 미세한 충격을 전달한다.

“뭐, 뭐라고?”

바누스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주먹에 부셔지기는커녕 흠집조차 생기지 않는 갑옷이라니?

아니, 갑옷이 멀쩡한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애초에 갑옷은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 된 방어구니까.

하지만 그리드가 자신의 주먹에 실린 무게를 감당 못하고 날아가기는커녕 제자리에 꿈쩍도 안 하고 버티고 선 모습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전설의 힘인가....? 토반보다 강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군....”

바누스는 놀라웠다. 그리고 놀라운만큼 즐거웠다.

“솔로 넘버 나이트 이후로 처음이다! 내게 전력을 강요한 상대는!!”

쿠와아아아아!!

소리치는 바누스의 주변으로 마나가 휘몰아쳤다. 그리드에게 입은 상처가 치유되면서 안 그래도 비대하게 부풀어있던 그의 근육이 더욱 더 부풀어 올랐다. 특히 오른쪽 팔뚝은 오우거의 팔뚝보다 더 두꺼워졌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쩌렁쩌렁!

극도로 흥분하여 포효하는 바누스!!

대륙 최강의 실력자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었던 ‘적기사단의 아홉 번째 기사’에게 중상을 입혔던 궁극의 기술을 전개하는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렇다.

스스로를 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대부분의 강자들은 늘 이렇듯 자신감이 충만한 법이었다.

그리드에게 얻어맞기 전까지는!

“회(回).”

퍼억!!

“컥!!”

내가 내 주먹에 얻어맞다니?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된 바누스!

검붉은 피를 토하며 주저앉는 그의 목덜미에 그리드의 칼이 드리웠다.

“너 말고 다른 2명의 기사들과 엘프들은 어디로 갔지?”

사실 그리드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력을 대부분 무력화시킨 바누스의 높은 방어력과, 자신의 방어력을 관통한 바누스의 높은 공격력에 그리드는 솔직히 감탄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 실력의 네임드 NPC라면 필시 높은 충성도를 지녔을 테니 대답보다는 죽음을 택하리라고 보았다. 실제로 그리드를 섬기는 NPC들은 하나 같이 높은 충성도를 자랑하지 않는가? 마이너만 빼고.

한데 의외로 바누스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냥 이 앞으로 쭉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다. 난 단지 그들과 함께 있기 싫어서 행군 속도를 늦춘 것뿐이거든.”

“.....”

그리드가 짐짓 당황했다. 바누스가 순순히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까닭이다.

망설이는 그에게 바누스가 목을 내밀었다.

“뭐해? 어서 죽이지 않고.”

“.....”

“음? 이제 와서 뭘 망설이지? 당신, 에트날 전쟁에서만 해도 수만 명을 학살한 살인귀 아닌가? 뜸들이지 말고 어서 죽여라. 전사인 내게 패배는 곧 죽음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더 이상 살아갈 의미도 없어.”

“....그래.”

그리드의 당초 계획은 키르의 기사들을 모조리 해치우는 것이었다. 그는 키르의 모든 것을 빼앗을 계획이었다. 바누스의 실력과 태도를 보고 약간의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해서 이제 와서 망설이는 것도 웃겼다.

결국, 마음을 다잡고 검을 치켜드는 그에게 바누스가 조언해주었다.

“나를 꺾은 최강의 전사여. 네가 쫓고 있는 나머지 2명의 기사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괴물들이다. 방심하지 않는 편이 좋아. 큭큭.”

쏴아아아아....

잿빛으로 산화한 바누스는 하나의 너클을 남겼다.

전설 등급의 너클이었다. 그리드가 제작한 아이템과 비교하면 성능이 크게 떨어졌지만 녹여서 재료로 사용하기 좋을 듯했다.

너클을 챙긴 그리드가 엘프들의 포박을 풀어주며 말했다.

“아까 그 장소로 돌아가.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

겁먹고 있는 엘프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이름은 데루야루. 동글동글한 뺨과 둥글고 커다란 눈동자 탓에 토끼를 연상시키는 미소녀였다.

“저는 12테 중 하나에요.... 데루 가문의 가주에요.... 동족을 대표하여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인사는 나중에.”

아직 모두를 구한 건 아니다.

데루야루와 엘프들을 뒤로한 그리드가 바누스가 일러준 방향으로 힘껏 내달렸다.

“노에, 랜디. 그리고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전사의 경고를 존중해 만반의 준비까지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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