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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91화 (686/1,794)

템빨 39권 - 20화

“저, 전하!!”

이게 무슨?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메르세데스에게 키르가 재촉했다.

“전하? 그리드와 각별한 사이가 되었나보군요? 그렇다면 서두르시지요. 이 깊은 숲에서 홀로 미아가 되었다가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큭....!”

주인의 안전보다 우선시할 사항은 없다.

여전히 포박당한 채 방치되어 있는 엘프들과 얄미운 키르를 번갈아 한 번씩 쳐다본 메르세데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리드가 사라진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서 내달리는 그녀였다.

키르는 그녀가 완전히 떠난 후에야 절망적인 속내를 드러냈다.

“또 예상치 못한 지출을....”

<돈 날리기>

대상을 돈다발로 후려치고 멀리 날려 보냅니다. 특정 종족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돈 냄새에 저항할 수 없으며, 필중합니다.

대상에게 1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히며,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3km 떨어진 지점까지 날려버립니다.

스킬 자원 소모:대상의 레벨과 전투력과 비례하여 금화 소모. 보유 중인 금화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스킬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없음.

돈 날리기는 3차 전직한 상인만이 습득할 수 있는, 상인이라는 클래스의 유일한 생존기이며, 공격기이다.

현재 3차 전직한 상인은 단 2명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 스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슨 스킬인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심지어 키르 본인조차도 스킬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왜?

사용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높은 생존률을 보장하는, 무척 강력한 스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43만 골드를 날려버리다니.”

터무니없는 거액이 소모되고 말았다.

스킬의 효과가 좋은 만큼 지출도 클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급격히 줄어든 골드를 확인한 키르는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그리드 때문에 엘프 포획 작전에 실패하고, 덩달아 세계수의 소유권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그가 입게 된 손실액은 이로써 총 4,043만 골드. 한화로 485억이 넘는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손실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상인의 랭킹은 단순히 레벨로만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거래의 성사 여부와 보유 자산 총액으로도 결정되는 바, 상인 랭킹 1위라는 타이틀조차 놓치게 된 키르는 그동안 누려왔던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되었다. 눈앞이 깜깜해졌고 속이 답답해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흥, 잘 됐네.”

분노하는 키르를 베니야루가 비웃는다. 키르의 분노가 그녀에게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네가....! 네가 도와달라고 외치지만 않았어도!!”

퍼억!! 퍽! 퍽!!

키르의 발차기가 포박당한 채 앉아있는 베니야루의 안면에 몇 번이고 꽂혔다. 이내 가래침까지 뱉어낸 그가 베니야루를 자신의 말에 강제로 태웠다.

“너만이라도 비싸게 팔아주마.”

“베니야루님!!”

엘프들이 키르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야탄의 정수에 중독 된 그녀들은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베니야루를 태운 채 그대로 떠나려던 키르가 멈칫하더니 소리쳤다.

“기사 소환!!”

스파앗-!

3명의 기사가 소환 된다.

키르가 자랑하는 네임드급 NPC들이었다.

플레이어의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최강의 기사들에게 키르가 내린 명령은 저열하고 지독한 것이었다.

“1분. 1분 동안 여기에 있는 엘프 년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라. 그리고 몇 마리는 산 채로 챙겨서 도시로 돌아와!”

“예!”

다그닥다그닥!!

베니야루를 태운 채, 그리드가 날아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말을 달리는 키르의 가슴 속에 깊은 원한이 자리 잡는다.

‘그리드....! 이날의 일을 평생토록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그가 등진 숲으로부터 엘프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

베니야루의 공허한 눈동자에는 어둠이 싹트고 있었다.

***

“.....”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돈 포대에 얻어맞고 수 킬로미터 바깥까지 날아와, 그대로 지상에 곤두박질 친 그리드는 잠시 멍하니 누워있었다. 하지만 이내 화들짝 정신을 차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와, 어이없네?”

저항할 수 없는 금력이라니?

상상조차 못 해 본 종류의 스킬이다.

상인에게 이토록 위험한 스킬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그리드는 키르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되도록 많이 괴롭혀주겠답시고 살려뒀다가 낭패네.’

키르는 전투 개시와 함께 전장에서 이탈했었고 그리드는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를 쫓아가 죽이지 않았다. 십만대군 학살검의 영향범위에 넣겠답시고 의식하지도 않았다.

왜?

전투 스킬은커녕 별도의 도주기조차 없는 상인쯤이야 언제든지 손쉽게 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자신감의 말로는 처참했다.

그리드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비교적 생소한 직업군의 정보들을 최대한 많이 수집하고 특징을 숙지해야겠군.’

과연 이 공부에 끝이 있을까?

Satisfy에 존재하는 직업의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그리드의 다짐은 섣부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드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본인의 근성을 믿었다. 그리고 동시에 반성했다.

‘메르세데스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했어.’

상왕 키르는 나름의 거물인 바, 대상의 스킬과 능력치 일부를 간파할 수 있는 메르세데스에게 그를 예의주시하라고 명령함이 옳았다. 그럼 낮은 확률로라도 돈 날리기 스킬을 간파할 수 있었을 테고, 지금 같은 치욕을 면할 수도 있었다.

‘명색이 전설의 기사를 얻고도 제대로 써먹을 생각을 못하다니.... 쯧.’

머리가 나쁘다는 문제가 아니다.

이번 사태는 너무 과도한 자신감이 문제였다.

본인을 플레이어 최강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리드에게 있어서 키르 상단은 너무 하찮은 적이었고, 그래서 방심하고 말았다.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여 많은 부분을 놓쳤다.

‘뭐, 다 경험이 되겠지.’

브라함의 부츠를 착용하는 그리드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메르세데스와 엘프들을 버려둔 채 홀로 멀리 날아왔다는 점에 대해서 그는 일말의 초조함도 없었다.

메르세데스를 믿었기 때문이다.

쿠와아아아아앙!!

플라이를 전개하여 날아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그리드.

숲에 가득한 온갖 장애물들을 비행의 이점으로 돌파하는 그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번진다.

‘키르 이 멍청한 자식아.’

그 타이밍에 나를 날려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전장에는 메르세데스가 남아있다. 키르 상단의 잔당들을 정리한 그녀는 지금쯤 키르까지 해치우고 엘프들의 구출에 성공했을 터이다.

‘기왕이면 키르 그 새끼는 살아있으면 좋겠다만.’

돈을 뜯을 수도 있다.

그리드가 놈의 불쾌한 개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잠자코 들어주었던 이유는, 놈이 지껄였던 개소리가 ‘일반론’이기 때문에 존중해서가 아니었다.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인내였다.

기왕 살려둔 김에 여지와 희망을 주고, 자신의 목숨을 놓고 협상할 ‘상인’과의 흥정을 토대로 재물을 취할 의도였다.

원하는 만큼의 재물을 안 준다고 하면?

그때 가서 죽이면 그만이었다.

강자의 여유였고, 키르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절망적인 강요였다.

‘아직 희망은 있어. 메르세데스가 눈치껏 살려뒀을 수도.... 음?’

기대를 잃지 않고 숲을 가로지르던 그리드가 멈칫, 제자리에 섰다. 저 멀리서 메르세데스가 달려오는 모습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전하!! 괜찮으신가요?!”

“뭐야?”

예상치 못한 조우!

잠시 당황하던 그리드가 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벌써 키르까지 죽이고 온 거야?”

“예....? 아니요. 전하의 신변이 걱정되어 곧바로 뒤따라 왔습니다만.”

“뭐?”

그리드가 미간을 좁혔다.

메르세데스를 거둔 이후 쭉 온화한 모습만을 보여줬던 그가 쌍심지를 켜자 메르세데스는 깜짝 놀랐다.

그리드가 일갈했다.

“내가 그렇게 못미더웠나? 처단해야할 적과 지켜야할 대상들을 버려두고 냅다 달려올 정도로?”

“....죄송합니다.”

메르세데스는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기사란 주인에게 핑계를 대지 않는 법이었다.

다시금 날아오른 그리드가 묵묵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그녀에게 재촉했다.

“뭐해? 당장 전선으로 복귀해!”

“네!”

그리드 또한 더 이상 메르세데스를 책망하지 않았다.

주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하는 기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그녀가 키르와 엘프들을 뒤로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를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적에게 공격당한 주인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과연 그녀에게 있었을까? 키르고, 엘프고, 나발이고 간에 그녀가 그리드를 뒤쫓아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의무는 그리드를 지키는 것이지 엘프를 지키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만, 역시 아쉽기는 했다.

메르세데스가 플레이어였다면?

그리드에게 귓속말을 날리거나, 파티창에 표기 된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하는 등의 수단을 사용해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했을 테니까.

‘....NPC의 한계.’

이처럼 플레이어와 NPC는 결국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그리드가 느끼는 기분은 묘했다. 자연스럽게 아이린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이 욱신거렸다.

“기사 소환!”

잡념을 떨쳐내기 위함일까.

스킬을 사용하는 그리드의 외침이 평소보다 크다.

‘아스모펠이나 피아로를 소환할 필요는 없어.’

대륙 전역을 돌며 전대 적기사들을 수소문 중인 아스모펠과, 기껏 다시 뱀파이어의 도시로 복귀한 피아로를 소환한다는 건 그들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꼴이 된다.

그리고 애초에 그리드가 원하는 기사는 기동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미 도망쳤을 키르를 바짝 추적할 수 있는!

“후로이! 페이커!”

[소환 명령을 보냈습니다. 응답 대기 중입니다.]

[대상이 소환을 수락하였습니다.]

[기사 후로이와 기사 페이커를 소환하였습니다.]

“신 후로이! 주군의 부름에 응하여 날아왔나이다!”

“무슨 일이지?”

즉각 부름에 응하고 등장하는 후로이와 페이커 두 사람에게 그리드가 부탁했다.

“이 숲 어딘가에 상왕 키르가 있어. 그리 멀리가지는 못했을 거야. 당장 놈을 찾아서 내 눈 앞에 데려와줘.”

웅변가 후로이에게는 비룡이 있다. 상공에서부터 숲 전체를 살필 수 있을뿐더러 뛰어난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살신 페이커는 어쌔신답게 추적술에 능했다.

“예!”

“알았다.”

역시나 두 사람은 자신만만했다.

앞뒤 정황은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이었으나 상황의 긴박함을 눈치 채고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이 떠나고 수 분 후에야.

“....아.”

“.....”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는 엘프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하나 같이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엘프들의 숫자, 확연히 줄어있었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족히 백 명 이상은 사라진 상태였다.

베니야루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리드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끔찍한 광경이 피어오르는 머릿속을 비워내고자, 몇 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심호흡한 그가 아직 어린 엘프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포박하고 있는 포승줄을 풀어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흑.”

엘프는 말하지 못했다.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덜덜 떨면서 시선을 떨굴 뿐이었다. 그녀는 명백히 그리드를,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털썩!

메르세데스가 무릎 꿇었다.

그녀는 작금의 끔찍한 사태가 자신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까닭에 그리드가 기껏 쌓아올린 엘프와의 신뢰가 무너졌음을 알았고, 안타까워했다.

그녀의 귓가로 그리드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다. 메르세데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잘못은 당연히 키르에게 있다.

“씹새가....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네.”

NPC를 인공지능 덩어리라고 비하하며 엘프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키르에게 그리드는 강한 적의와 혐오감을 느낀 반면 살의까지는 품지 못했었다. 비단 키르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NPC를 인공지능, 혹은 그래픽 덩어리라고 인식하는 실정이었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템빨단원들만 봐도 NPC와 플레이어를 명백히 구분 짓는 사람이 대부분 아니던가?

그저 스쳐지나갈 뿐인 악연인 키르에게 NPC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강요할 생각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그리드가 키르의 관념을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재수 없는 새끼, 돈이나 왕창 뱉기를 바랐다.

물론 몇 분 전까지의 이야기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다.

“후우.... 후우.....””

그리드가 심호흡을 시작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끔찍하고 비참한 일을 셀 수 없이 많이 목격해왔건만, 어째서 매번 적응되지 않는 걸까?

차가운 눈빛으로, 떨리는 손으로, 겁을 지려먹고 있는 엘프들의 포박을 하나, 둘씩 풀어나가던 그리드가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그리드:상왕 키르의 도시 말인데. 어느 나라에 소속돼있지?

-라우엘:가우스 왕국입니다.

-그리드:우리가 도시를 침략하게 되면 가우스 왕국령을 침범하는 꼴이 되는 건가?

-라우엘:아무래도 그렇죠. 외교 문제로 번져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라우엘은 묻지 않았다.

그는 그리드에게 불려간 후로이와 귓속말로 대화를 나눔으로써 현재 그리드가 놓인 상황을, 그리드의 의지를 어렴풋이 유추하고 있었다.

-라우엘:이생에서 저의 역할은 전하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것.... 전하. 아무 걱정 마시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리드:.....

-라우엘:메르세데스 양께서 합류한 이후 템빨국의 전력은 이제 가우스 왕국을 확실히 웃돌고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우리가 꿀릴 게 없어요.

물론 타국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제국조차도 견제하는 템빨국의 세력 확대를 다른 소국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자칫하면 연합국 대 템빨국의 전쟁 구도가 만들어지고 큰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라우엘은 굳이 이와 같은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최강의 플레이어 그리드.

언제든지 날개를 펼치고 비상할 수 있는 그에게 ‘책임’을 강요하며 통제하는 일,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는 없었으니까.

라우엘은 그리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기껏 노력해서 쌓아올린 힘을 길드를, 나라를 위한답시고 억제한다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분할까? 강해진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회의감만 느낄 것이다. 슬슬 욕구를 풀어줘야 할 타이밍이다.

-라우엘:자,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지금 당장이라도 군대를 소집해서 키르의 도시를 짓밟고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리드:굳이 군대를 움직일 필요 있어?

-라우엘:네?

그리드가 최근에 새롭게 얻은 <신격>과 <아스타로트의 힘>에 대해서 라우엘은 모른다.

그리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드:군대는 놔둬. 내가 혼자 가서 다 조질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도망친 키르를 쫓아 놈에게 납치당한 엘프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메르세데스.”

“네!”

“여기 있는 엘프들의 구속을 풀어주고 그녀들을 보호해줘.”

“알겠습니다.”

메르세데스가 순순히 명령을 받들었다. 전하를 혼자 보낼 수 없다는 말 따위 뱉지 않았다.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범할 정도로 어리석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주인의 힘을 믿었다. 주인이 그러기를 바랐으니까.

그리드는 새로운 귓속말을 접하고 있었다.

-페이커:수십 명의 엘프를 납치하고 이동 중인 일당을 발견했다. 하지만 여기에 키르는 없어.

-그리드:다른 일당이 남아있었다? ...하긴, 키르 혼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백 명도 넘는 엘프들을 해치거나 납치하는 건 불가능했겠지.

그리드는 키르가 기사 소환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키르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귀족 작위쯤 당연히 갖고 있을 테니까.

-그리드:좋아. 잘 됐어. 이참에 키르의 기사들을 모조리 처리해야겠군.

그리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메르세데스를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로 사악한 미소였다.

-그리드:놈들의 위치를 알려줘. 그리고 너는 계속 키르를 추적해.

페이커의 가장 큰 장점은 군말이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으면 딱히 어떤 의견을 피력하는 일 없이 그저 순응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방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페이커:내가 소환 됐던 지점을 기준으로 북서쪽 2킬로미터 지점이다. 주의해라. 적은 총 3명이고 셋 모두 네임드급 NPC야. 상황에 따라서 키르의 추적을 멈추고 네게 합류하겠다.

-그리드:합류해야할 일.... 없을 거야.

***

‘지금쯤이면 눈이 돌아갔겠지?’

키르는 웃고 있었다. 뒤늦게 현장으로 돌아온 그리드가 엘프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느끼게 될 분노를 떠올리면서 속이 뻥 뚫리는 쾌감을 느끼는 그였다.

물론 잠시뿐이었다.

자신이 현금 500억에 가까운 거액을 하루아침에 날려먹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다시 상기하며, 사소한 기쁨 따위 금방 잊어버린다.

“개 같은 새끼!!”

절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키르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리드가 천하의 개잡놈이었다.

당연했다.

그리드는 괜한 오지랖으로, 심지어 고작 NPC들을 돕겠다는 이유 따위로 생판 초면인 상대의 인생을 망쳐버렸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민폐 캐릭터였다.

‘거의 사이코패스 수준....’

생각하던 키르가 문득 아차 싶었다.

지난 날 자신의 모습들을 상기한 것이다.

여태까지 자신 또한 수많은 약자들을 짓밟고 올라서지 않았던가?

상인 랭킹 1위를 목표로 달려오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히고 자신의 이득을 취해왔다.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겠다는 미명 하에 자신의 악행을 모조리 정당화시키면서.

‘.....결국 나도 똑같아졌군.’

실로 수 년 만에 되찾은 이성이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의 베니야루를 발견하고 이미 늦었음을 깨닫는다.

꾸욱!

이를 악 물고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은 키르가 베니야루에게 경고했다.

“희망 따위 품지 마.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순순히 현실에 순응하해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마음을 다스린 키르의 눈에 다시금 독기가 깃드는 그때였다.

크롸라라라라라라라!!

상공에서부터 거대한 기성이 들려왔다. 용의 포효였다.

‘비룡?’

이곳에 비룡의 서식지가 있었나?

숲 위 하늘에 떠올라있는 붉은 비룡을 발견한 키르가 의문을 품는 순간.

쿠와아아아앙!!

무서운 기세로 하강한 비룡이 지상에 착륙했다.

녀석은 마치 노린 것처럼 키르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놈 탓에 키르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갑자기 출몰한 비룡이 하필이면 내 앞길을 가로막다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허둥대던 키르가 이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비룡의 등 위에 사람이 탑승하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그 사람의 아이디는 후로이였다.

비룡에서 내린 후로이가 키르에게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최근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나?”

“그 사실을 어떻게....?”

“.....”

키르와 후로이 두 사람 모두 당황한다.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후로이였다.

험험,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방금 전의 상황은 마치 없던 것처럼,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후 소리쳤다.

“호오! 설마 했더니 역시나 그랬군! 네놈이 훌륭하고 소중한 부모님을 여읜 충격과 슬픔으로 엇나간 나머지 개쓰레기 새끼가 되었구나!!”

“뭣.....!!”

초면인 상대의 돌아가신 부모님을 언급하면서까지 욕설을 지껄이다니?

그리드도 그렇고, 후로이도 그렇고, 키르의 입장에서는 템빨단 놈들이 죄다 지독한 악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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