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9권 - 19화
엘프족은 메르세데스의 공격과 그리드의 파(派)를 버텨냈었다.
심지어 베니야루는 연살파극(聯殺派極)마저 견뎠다.
가녀린 육체에 나뭇잎 몇 장 붙이고 있을 뿐인 엘프들, 겉모습과 달리 높은 방어력과 생명력을 보유한 것이다. 뱀파이어보다 상위종 다웠다.
하지만 과연 십만대군 학살검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십만대군 학살검(열화판)>Lv.1
공격 대상의 반경 10미터에 있는 모든 존재(피아 구분 불가)에게 공격력의 60퍼센트에 해당하는 피해를 총 30회 입힙니다.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십만의 대적을 ‘몰살’시키고자 무패왕이 친히 창안한 궁극의 검술은, 비록 열화판일지라도 파그마의 검무를 초월하는 위력을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1열망의 무아검을 무장한 그리드가 발현하는 십만대군 학살검은 <검은 불꽃>을 폭발시킬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한데 왜?
엘프족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리드가 어째서, 무슨 배짱으로 십만대군 학살검을 사용한 것일까?
당연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그 비밀, 그리드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에 끼워진 골무에 있다.
<(파그마가 제작한)엘프족 활골무>
등급:레전드리
내구도:111/111
*활 착용 시 공격 속도 +20퍼센트.(엘프족은 효과를 2배로 받음)
*일반 공격, 혹은 스킬 공격을 ‘타겟팅 모드’로 전환 가능.(재사용 대기 시간 3분. 엘프족은 재사용 대기 시간 절반만 적용)
번헨 열도에서 포비아의 데스나이트를 해치우고 획득한 전설급 아이템!
논타겟 스킬을 타겟팅 스킬로 변형시켜주는 희대의 사기 아이템이다.
하지만 활골무를 얻었을 당시의 그리드는 두뇌가 활성화 된 상태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활골무의 사기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오로지 십만대적검에만 심취했었다. 그리고 활골무는 자연스럽게 잊어갔다.
이번에 세계수의 숲을 발견함으로서 그리드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활골무를 상기한 일일 것이다.
<세계수의 목걸이>를 떠올리며 덩달아 함께 떠올릴 수 있었던 활골무를 착용한 그리드.
“십만대군 학살검.”
그가 전개하는 광범위 스킬이.
츠칵-!
츠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칵!!
수천 명의 엘프들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키르 상단원들만을 저격하고 날아가 그들의 몸을 난도질했다.
이때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검은 불꽃의 폭발이 엘프들을 함께 휩쓸었지만.
“꺄악!!”
“우읏....!”
기본 생존력이 높은 엘프들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로 운 나쁘게 2번, 3번 연달아 폭발에 휩쓸린 엘프들도 중상을 입는 수준에 그쳤다.
“거봐. 쟤들은 이 정도로 안 죽는다고 했지?”
곧 끝이다. 아파도 조금만 참아라.
펑-!
퍼퍼퍼퍼퍼퍼퍼펑!!
쉬지 않고 발생하는 잿빛 기둥의 이팩트를 확인하며, 십만대군 학살검의 시전이 멈추자마자 검을 회수한 그리드가 곧바로 회(回)를 전개했다.
쩌엉-!!
서걱!!
그리드를 양단할 기세로 날아왔던 아리사의 시미터가 역으로 아리사의 가슴을 벤다.
일격에 큰 피해를 입고 스턴 상태에 빠진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국가대항전에서 타르마를 일격에 해치웠던 즉발 스킬.
폭발하는 검은 불꽃을 어떻게 수십 차례나 연속으로 발생시킨단 말인가?
모든 스킬에는 재사용 대기 시간이 존재하며, 위력이 강한 스킬일수록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길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혼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아리사에게 그리드는 도리어 반문을 던졌다.
“뭘?”
그렇다.
그리드는 아리사의 의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검은 불꽃>을 스킬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콰작!!
그리드의 평타가 아리사의 무방비한 옆구리를 1회.
츠카칵!!
2회, 3회 베고 찔렀다.
사실 3회째 타격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미 회(回)에 반격을 당한 시점부터 개피가 된 아리사는 2회째 타격에서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했다.
200레벨대 플레이어 수백 명이 달라붙어도 해칠 수 없는 하이랭커조차도 그리드의 비상식적인 공격력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었다.
그리드는 외치는 듯했다.
나 외의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라고.
“미쳤군....”
억만금 주고 고용한 나이트가 허무하게 사망하고, 또 억만금 주고 육성해온 상단의 근위대가 무참하게 박살나자 키르는 할 말을 잃었다.
승승장구한 끝에 상인 랭킹 1위를 차지하고 급기야 상왕이라고 불리게 된 그의 입장에서 그리드라는 재앙은 생소했다.
저벅저벅.
십만대군 학살검의 폭격이 끝나고 살아남은 생존자는 단 34명.
그마저도 적의를 잃어 묵묵히 서있을 뿐이다.
키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그리드의 앞길을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했다.
키르는 어이없고 허무했다.
힘들게 쌓은 재력을 토대로 완성한 군대가 단 일인의 무력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다.
돈의 힘이,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권력이 급선무다.’
키르는 깨달았다.
도시 하나를 구입한 것으로 기고만장해서는 안 됐다는 사실을.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돈의 한계를 깨부술만한 힘, 바로 권력이었다.
‘작은 도시 사는데 쓴 돈을 황제에게 투자했더라면.’
지금쯤 제국의 비호 아래 있었을 터이고, 만약 그랬다면 천하의 그리드라도 자신을 이토록 함부로 적대하지는 못했으리라.
꽈드득! 후회하고 반성하며, 분해 이를 가는 키르의 눈앞에 그리드가 다가와 섰다.
“엘프 노예의 수요는 있나?”
“없어도 만드는 것이 상인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왜요? 노예 구매 예약자라도 있다면, 그들조차 찾아가 징벌하실 생각입니까? 그게 당신의 정의인가요?”
“그 정도로 부지런하지는 않아. 다만 궁금했을 뿐이야. 사람을 사고 파는 행위를 당연시 여기는 족속이 과연 몇이나 될지.”
“사람?”
귀를 의심한 키르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 미쳤어? 지금 NPC 따위를, 저 인공지능 덩어리들을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야?”
키르의 눈빛에 노기가 서렸다.
“NPC의 존재 이유는 우리들 플레이어의 편의와 진보를 위해서고, 사람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존재는 당연히 우리들 플레이어뿐이다. NPC와 혼인해서 애까지 낳더니 현실과 게임을 망각하는 병신이 된 건가?”
아니면.
“망각이 아니라 바람인가? 부인과 자식 모두 진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다보니 NPC가 사람이니 뭐니, 미친 개소리를 지껄이게 된 거야?”
하긴, TV 속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조차 허다한 세상이다.
실제로 대화할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NPC와 사랑에 빠진다고 해서 크게 이상하지도 않다.
“큭큭....!”
키르는 웃음밖에 안 나왔다. 더욱 더 허망해졌다.
자신은 생존을 위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완성하겠다는 장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치열하게 게임을 플레이해왔다.
한데 명색이 지존이라는 놈은 NPC들과 소꿉놀이나 하고 있던 것이다.
“....인정 못해.”
분노가 치솟는다.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그리드를 노려보며 이마에 핏대를 세운 키르가 크고 묵직한 포대를 꺼냈다. 짤그락 거리는 소리를 보아 돈이 한가득 들어있는 게 분명했다.
수백 킬로그램의 금화라?
“돈을 그렇게 많이 갖고 다녀? 괜히 상인 랭킹 1위가 아니구만.”
솔직히 놀란 그리드가 코웃음쳤다.
“그래서 결국은 뭐야? 돈 줄 테니까 살려달라고? 좋아. 줘봐. 금액에 따라서 살려줄 수도 있어.”
엘프 구출에는 성공했다.
몇 남지 않은 키르 상단의 잔당들은 메르세데스가 모조리 해치우는 중이었다.
이제 키르 한 명만이 남았고, 그리드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키르를 반드시 죽여야 할 정도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챙길 수 있는 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키르가 조소했다.
“저마다 다른 개소리를 지껄여도 결국 죄다 똑같군.”
인간이 끝내 원하는 건 돈이다.
탐욕 없는 인간은 지극히 드물다.
다시 한 번 상기한 키르가.
“돈? 갖고 싶다면 얼마든지 주마!!”
소리치며, 그리드에게 돈이 한가득 들어있는 포대를 휘둘렀다.
‘미쳤나?’
이걸 지금 공격이라고 하는 건가?
상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하고, 상인은 전투가 불가능한 클래스라고만 알아왔던 그리드의 입장에서 키르의 공격은 무의미한 발악으로밖에 안 보였다.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가엽게까지 느껴지는 발악이었다.
“.....!”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키르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주려던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키르의 느릿한 공격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금력이 당신의 탐욕을 자극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금력에 이끌립니다.]
‘뭐?’
불안이 스치는 순간.
퍼어억!!
크고 묵직한 돈 포대가 그리드의 안면을 강타하였고,
[1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재물이 지닌 무게란 위대한 법입니다.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장으로부터 이탈합니다!!]
피잉-!
하늘 높이, 그리드의 몸이 날아가더니 별이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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