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89화 (684/1,794)

템빨 39권 - 18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나이트는 본래 기사를 꿈꾸던 플레이어였다.

Satisfy가 오픈한 이후부터 작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오로지 기사가 되기 위한 수련과 퀘스트 활동에 매진했었다.

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저주라도 받은 것일까?

나이트가 속한 견습 기사단은 늘 예상치 못한 형태의 적들과 조우하며 궤멸당했다.

도시를 옮기고, 급기야 나라를 옮겨 가면서 새로운 기사단에 입단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이트와 함께하는 이들은 언제나 죽음을 맞이했다.

결과.

[사신의 힘을 개방합니다.]

[적으로 인식한 생명체의 영혼을 감지합니다.]

[<죽음의 기운>이 대상의 영혼을 탐하기 시작합니다.]

나이트는 등급 성장형 히든 클래스 <사신>을 얻었다.

최초의 목표로 삼았던 기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클래스였다.

하지만 나이트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사신이라는 낙인,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듯하였기에.

“12분……. 과연 첫 번째 기사의 명성에 거짓은 없군. 이처럼 견고한 영혼은 처음 봐.”

“…….”

“당신, 12분 안에 나를 해치지 못하면 죽어.”

조금씩, 천천히 소모되는 메르세데스의 소울 게이지를 확인하면서 씁쓸하게 미소 지은 나이트가 경고한다.

일대에 내리는 어둠의 장막이 그의 모습과 기척을 지워 나갔다.

***

‘임모탈 그 개새들이 세기는 세구만.’

임모탈 소속원 중 절반가량은 그리드의 평타를 견뎌 냈었다. 2방, 3방 때려야 죽는 놈들이 허다했다. 심지어 네크로맨서인데도 말이다. 템빨은 기본이요, 칭호 작업을 통한 능력치 상승 수치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추정됐다. 과연 대부분이 랭커로 구성된 집단다웠다.

반면 키르 상단은?

퍽!

“켁!”

푹!

“억!”

원 샷 원 킬!

키르 상단원들은 그리드의 평타를 맞으면 맞는 족족 잿빛으로 산화했다. 템빨국, 발할라, 임모탈 다음이라고 거론되는 세력의 소속원들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나약했다.

‘재미는 있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정성껏 육성하는 이유가 뭔가?

남보다 강해지고 싶어서다.

절대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며 무쌍할 때야말로, 플레이어는 비로소 최고의 희열을 느끼는 법이었다.

지금의 그리드처럼 말이다.

콰자작!!

[대상이 사망하였습니다.]

[대상이 사망하였…….]

[대상이…….]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으로 크게 호선을 그리자, 공격 범위 내에 위치했던 키르 상단원 3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산화한다. 그리드의 좌우에 2개씩 떠올라 있는 갓 핸드들이 발사하는 매직 미사일이 무서워서 접근 못하고 발만 구르는 상단원들도 있었다.

‘손맛 좋고.’

홀로 수백 명의 적을 압도하는 그리드의 즐거움이 점차 커졌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지금은 개뿔.”

챙강!

방심하지는 않았다.

극도의 집중력을 유지하며, 갓 핸드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적들의 공격을 하나도 허용하지 않고 검으로 쳐 낸다.

그냥 맞아 줘도 무관할 하찮은 공격들을 왜 굳이 심력을 소모해 가면서 방어하는가?

패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피격 시 독 안개를 방출하는 <+1무한한 애정의 발할라>의 옵션을 그리드는 최대한 감추고 싶었다.

‘여기에도 랭커는 있을 테니까.’

하이에나처럼 때를 노리고 있을 키르 상단의 랭커들.

놈들이 행동을 개시하는 시점부터 그리드가 상처를 입는 일은 불가피해진다. 그 타이밍에 발생할 독 안개가 큰 변수가 되리라고 그리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크아아아악!!”

점차 상승하는 투기.

적색과 자색의 기운에 휘감긴 그리드는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평타일 거라고 상상조차 못할 일격 일격에 더 큰 위력이 실렸고, 250레벨대 플레이어들의 협공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날랜 움직임은 더 신속해졌다.

“흐으!”

“히익!”

뒤집어쓴 안대 너머 번뜩이는 안광이 키르 상단원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다.

전투 내내 미소 짓고 있는 그리드로부터 여유와 저력을 느낀 그들은 격의 차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상상 그 이상이다.

그리드가 각국의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싸워 이기는 모습과 대악마 벨리알을 레이드했던 장면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TV와 인터넷을 통해서 수십 번도 더 반복해서 보았으나,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100 정도의 레벨 차이?

자신들의 컨트롤 솜씨라면 어느 정도 극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 상기한다. ‘나는 컨트롤 잘한다.’는 착각, 초등학생들도 한다는 사실을.

템빨의 차이?

키르 상단에 입단한 이후 보급받은 각종 유니크 아이템이라면 충분히 극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 깨닫는다. 그리드의 강점은 그저 템빨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적 우세?

수백 명과 한 명의 대결, 당연히 수백 명 쪽이 유리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 경험해 본다. 다수에게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쪽의 숫자가 수백 명이라고 해서, 그 수백 명이 한 명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간의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이건 안 돼.’

‘이 괴물을 누가 이겨?’

그리드와 잠시나마 호각을 겨룰 수 있었던 크라우젤이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뭣들 해?”

흠칫!

넋 놓고 있던 키르 상단원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그들의 코앞에 그리드가 다가와 있었다.

“왜 멍하니 있어? 신명나게 엘프들 쥐어 팼던 것처럼 나도 패 줘야지?”

“그, 그게…….”

주춤, 주춤.

군중심리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재수 없게 그리드와 정면으로 마주한 키르 상단원이 뒷걸음치자, 그를 따라서 주변의 다른 상단원들까지 모조리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한 걸음 내디디면 그들은 세 걸음을 도망쳤고, 그리드가 한 걸음 더 내딛자 그들은 서로 발이 엉켜서 주저앉고 말았다.

키르 상단이라는 거대 집단에 소속된 이후부터 느껴 왔던 자부심과 긍지는 눈 녹듯이 사라진 지 오래다.

절망하는 키르 상단원들의 귓가에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외침이 들려왔다.

“엘프들을 방패로 삼아!!”

상왕 키르의 외침이었다.

“모두 원거리 무기로 스왑해라!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자는 마나 물약을 아끼지 말고 먹어라! 그리드를 쉬지 말고 몰아붙여!! 위축되지 마!! 엘프들을 방패로 삼는 이상 너희들은 안전하다!!”

안전.

그 한 단어가 키르 상단원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이를 질끈 깨문 상단원들이 포박당한 채 주저앉아 있는 수천 명의 엘프들 사이로 숨어들더니 각자 활이나 단도 등의 투척 무기를 꺼냈다. 갓 핸드가 쏘는 매직 미사일에 자꾸만 견제를 당한 탓에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던 마법사들 또한 자리를 잡고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스파앗-!

뷰티앙과 아리사를 필두로 삼은 총 32명의 하이랭커들 또한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스톤 샤워.”

쿠르르르릉!!

돌무더기를 쏟아 내는 뷰티앙의 마법이 그리드를 덮쳤고, 이를 회피하는 그리드의 곁으로 아리사가 도달해 시미터를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헤, 막을 줄은 몰랐네. 국대전 때보다 실력이 더 좋아진 거 아니야?”

그리드가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자 감탄하는 아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이 이상은 어렵지?”

신속한 몸놀림.

그리드, 혹은 갓 핸드가 특정 ‘단검’을 매개체로 전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버프 스킬.

그 지속 시간이 곧 끝난다는 사실, 그리드의 전투 영상을 수백 번도 더 되돌려 보았던 아리사는 알고 있었다.

역시나.

쩌정! 츠카카카칵!!

뷰티앙의 계속되는 마법을 회피함과 동시에 아리사의 2회, 3회째 공격은 방어하던 그리드가 4회째 공격은 허용하고 말았다.

벼락처럼 떨어지며 그리드의 가슴을 베어 넘기는 시미터의 칼날 부분에, 뒤늦게 합류하는 아리사의 부하들의 모습이 비쳤다.

“오지는 타이밍이네.”

협공을 가해 오는 아리사의 동료들을 코앞에서 마주한 그리드가 조소한다.

“……?”

그리드의 중얼거림을 듣고 의아해하는 아리사의 두 눈은 찢어져라 커지고 있었다.

[독귀의 독에 중독됩니다!]

[저항할 수 없는 맹독입니다!]

[초당 4,300의 데미지를 입습니다!]

‘뭐?’

이 자욱한 독 안개, 어디서 갑자기 피어오른 것인가?

중독된 아리사가 당황하는 그때.

푹! 푸푸푸푹!!

한발 늦게 합류한 그녀의 부하들이 그리드에게 협공을 퍼부었다.

검과 창이 그리드의 몸을 베고, 찌를 때마다.

구구구구구-

그리드가 무장한 갑옷으로부터 짙은 녹색의 독 안개가 방출되었다.

“쿨럭!!”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됐다.

수십 명에게 동시에 공격받은 그리드보다 그를 공격한 아리사 일당의 생명력 게이지가 더 크게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 아니야? 반사 데미지가 뭐 이딴 식으로 들어와?”

심지어 그 높은 방어력은 뭐고?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몸을 날린 아리사가 황급히 해독약을 꺼내 마셨다.

우행이었다.

자신보다 모든 스탯이 우위에 있는 대상 앞에서, 그 대상의 행동을 제약하지도 않고 물약을 복용한다?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나 잡아먹어 줍쇼, 외치는 꼴이다.

“너보다 강한 적과 상대해 본 경험이 적나 봐?”

푸욱-!!

아리사의 어리석음을 비꼬며 다가온 그리드의 검이 아리사의 가슴을 찌른다.

무려 352레벨의 하이랭커인 아리사의 생명력 게이지가 단 일격에 5분의 1 감소하는 순간이었다.

[14,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오르간의 갑옷>의 내구력이 20 하락하였습니다.]

“에……?”

평타로 이만한 위력이라니?

전설 등급의 갑옷이 무색하게도 커다란 피해를 입은 아리사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었다.

그리드가 국가대항전에서 어쌔신 타르마를 일격에 해치웠던 즉발 스킬 ‘검은 불꽃’을 연계할 거라고 예상한 그녀, 죽음을 직감하며 질끈 두 눈을 감는다.

하지만 불꽃은 폭발하지 않았다.

검을 회수한 그리드는 빠르게 자리를 이탈하고 있었다. 뷰티앙이 전개한 어스퀘이크를 회피하기 위함이었다.

채챙! 채채채채채챙!!

그리드를 바짝 쫓은 다른 랭커들이 맹공을 퍼부었다. 아리사가 잠시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해독제를 복용한 그들은 온갖 버프 스킬로 무장하고 200퍼센트의 힘을 끌어 올린 상태였다.

300레벨 초중반대 랭커 30여 명의 전력,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손쉽게 감당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파그마의 검무.”

스킬을 전개했다.

그렇다.

그리드는 여태까지 평타만 쓰고 있었다. 키르 상단원들 중에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파(派).”

“피해!!”

쿠르르르르르릉!!

연(聯), 살(殺), 파(派), 극(極), 초(超) 등.

공교롭게도, 파그마의 검무 대부분은 전 세계에 노출된 상태다. 실력 좋은 랭커들은 저마다 파그마의 검무 대처법을 준비해 두고 있었고, 파(派)에 대한 대응도 빨랐다.

황급히 몸을 날려 파(派)의 검기가 닿는 구역에서 이탈했다.

“다들 이리로!”

저 멀리, 쥐새끼처럼 엘프들 사이에 숨은 채 마법을 연발하고 있던 뷰티앙이 소리친다.

아리사와 랭커들이 모조리 그의 곁으로 달려가 엘프들 사이에 숨어 버렸다. 그리고 엘프들의 머리를 붙잡아 세우더니 그녀들의 목덜미에 칼을 드리우며 그리드를 위협했다.

“개인의 힘이 아무리 강해 봤자 한계가 있는 법이야.”

“어쩌다가 첫 번째 기사와 함께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과연 단둘이서 엘프들을 모조리 구출할 수 있을까?”

“싸움은 지금이라도 당장 관두자. 그럼 키르가 눈치껏 엘프 몇 마리쯤 선물로 줄 거야. 서로 좋게 가자고.”

“X까.”

제멋대로 떠드는 키르 상단원들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그리드는 엘프들의 안위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드가 광역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 혹시나 엘프들을 해칠까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피라미들 상대하는 데 굳이 스킬까지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근데 이제 귀찮아졌어.”

마리.

키르 상단원들이 엘프를 세는 단위가 그리드의 분노에 다시금 불을 지폈고, 그 대가는 처참했다.

쿠오오오오오-

열망의 무아검에 자색과 적색의 기운이 밀집됐다. 영웅왕의 투기가 무패왕의 힘으로 승화되는 과정이었다.

“너……!”

십만대군 학살검.

국가대항전 당시, 갑작스럽게 출현한 드래곤의 몸을 약간이나마 ‘기울게’ 만들었던 그 화려하고 무자비한 스킬의 전조를 눈치챈 키르 상단원들이 경악했다.

아리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당신 제정신이야? 엘프들까지 모조리 죽일 셈이냐고!!”

“뭐래?”

조소하는 그리드, 눈은 웃지 않는다.

“엘프들은 이 정도로 안 죽어.”

끼리릭-

검이 기운다.

폭발하기 직전의 태양이 저런 색으로 빛날까 싶은 투기의 집약체가 날 끝에 서려 있었다.

“십만대군.”

뷰티앙.

그리드가 보기에 현재 키르 상단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 그였다.

그렇기에 표적이 된다.

츠카칵-!!

뷰티앙에게 돌진하며, 기울였던 검을 세우는 그리드의 귓가로.

“잠깐! 그 힘으로 차라리 첫 번째 기사를 돕는 편이 좋을걸요?”

키르의 음성이 들려왔다.

멈칫, 스킬의 발동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는 그리드에게 키르가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첫 번째 기사와 동행하는 중 아니었습니까? 그녀의 목숨이 사신에게 위협당하고 있습니다만.”

“사신?”

그리드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한다.

색소를 잃어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의 메르세데스가 어둠의 장막에 갇힌 상태였다. 거대한 백골의 사신이 손에 쥔 낫이 그녀의 목덜미에 드리워 있었다.

“방어술의 대가인 한편 대상에게 확정적인 죽음을 선고하는 힘을 동시에 지닌 플레이어가 있습니다. 그의 특수한 전투 방식은 제아무리 최강의 NPC라도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확신…….”

나이트의 ‘어둠’에 갇힌 메르세데스에게 시선을 돌린 채 설명하던 키르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은빛의 날개를 펼친 메르세데스가 검을 내지르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일제히 양단되더니 잿빛의 기둥이 치솟은 까닭이다.

[파티원 ‘나이트’가 사망하였습니다.]

“…뭐?”

메르세데스와 나이트의 실력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키르의 입장에서는 이토록 허무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리드에게 허풍 떨어 댄 것과 달리 나이트가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호각은 겨룰 거라고 장담했다.

한데 이 허무한 결과는 대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키르의 시야에 담기는 풍경이 적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학살의 여파다.

“십만대군 학살검.”

츠칵-!

츠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칵!!

초당 30회.

최강 신속의 검격이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퍼부어지며, 뷰티앙을 비롯한 일대의 모두를 난도질했다.

피의 비가 숲을 적신다.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