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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87화 (682/1,794)

템빨 39권 - 16화

“세계 최고의 부자라더니 쪼잔하네요.”

눈물 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를 거듭할수록 요염함이 더해지고 있는 예림이 영우의 단단한 팔뚝에 찰싹 달라붙었다.

“오빠 생일 축하해주러 온 사람 맞아요? 왜 정작 오빠한테는 선물 안 주고 그냥 가는 거예요?”

“아니야. 나도 큰 선물을 받았어.”

쓰담쓰담!

예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영우의 태도는 더없이 친근했다. 그녀가 온갖 육탄 공세를 펼치더라도 여동생으로 인식할 뿐이었다.

당연하다. 예림은 여동생 세희의 절친이었으니까!

“큰 선물이요?”

이 오빠는 대체 언제쯤에야 날 보고 두근거려줄까?

아무리 밀착해봤자 일말의 동요 없는 영우를 확인하고 뾰로통해진 예림이 질문한다.

자칫 ‘손’의 봉인이 풀릴까, 염려하며 그녀를 떼어낸 영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응. 가치를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큰 선물.”

일말의 과장도 없다.

“대장장이 신은 파그마의 후예의 전직 퀘스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임철호 회장이 준 이 힌트는 천금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

대장장이 신과의 호감도가 마이너스 10까지 떨어질 경우 받게 된다는 저주.

영우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며 행동에 큰 제약을 걸었던 그 저주를, 이제 영우는 두려워하기보다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저주를 받는 순간 발생할 이벤트가 뭘까?’

두근두근!

영우의 심장이 뛴다.

어서 빨리 게임에 접속하고 싶은 그였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그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접속 제한 시간 1시간 반 밖에 안 남았지? 생일 축하 파티는 그때하자.”

“세희야....”

영우가 감동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어느 여동생이 오빠의 Satisfy 접속 제한 시간까지 알아두고 배려해주겠는가?

와락!

너무 기쁜 마음에 세희를 힘껏 껴안아준 영우가 이어서 곧장 캡슐로 달려갔다.

***

쏴아아아아아....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든다.

오전의 숲은 고요했다.

커다란 바위 위에 홀로 앉은 메르세데스.

눈 감은 채, 자이언트 곱등이와의 전투를 복기해본다.

‘결론적으로.’

튼튼한 방패만 있었어도 곱등이의 공세를 견딜 수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만큼은 쌍검보다 방패가 더 효율적인 장비라는 판단이었다.

‘우리 가문의 검술이 썩 훌륭하지 못하다는 반증이겠지.’

메르세데스가 쌍검술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녀의 검술이 베인츠식 검술을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익혀온 가문의 검술이야말로 자신에게 적합한 검술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전설의 경지에 오르고 보니 착각이었다.

베인츠식 검술은 다수의 적을 빠르게 살상할 때 유용할지 몰라도 강한 적에게는 너무 많은 허점을 노출했다.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아스타로트 레이드에서도 결국 의지했던 검술은 무상검법이 아니었던가?

‘어설픈 두 자루 검에 집착할 이유는 없어.’

그리드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간파하셨던가.

하여 내게 갑옷과 방패를 제작해주겠노라 말씀하셨음인가.

“......”

새롭게 하사 받은 갑옷을 어루만지며 생각하던 메르세데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직은 불완전한 그녀의 혜안이 숲 깊은 곳에 꽂힌다.

그녀는 족히 수천이 넘는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마을에 갔던 엘프들이 동료들을 이끌고 돌아오는 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저 많은 기척 중 일부는 분명히 인간의 것이었다.

또한.

‘엘프들이 품고 있던 정령의 기운이 힘을 잃었어.’

심상치 않다.

자이언트 곱등이 레이드 직후.

그리드는 ‘휴식’을 위해서 잠시 떠난 상태였고, 가지치기를 끝낸 피아로는 뱀파이어의 도시로 귀환한 상태였다.

지금 이 자리에는 메르세데스 혼자다.

“.....”

메르세데스가 부여 받은 임무는 ‘휴식’을 끝낸 그리드가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는 것.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던 그녀가 잠시 생각해본 후 나무 위로 올라 몸을 숨겼다. 어쌔신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충분히 은밀한 행동이었다.

곧 이어.

“어차피 정령 못 부른다니까?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걷기나 해.”

인간과 엘프들의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명의 엘프들은 하나 같이 포승줄에 묶여있었고, 수백 명의 인간들은 그녀들을 감시하는 한편 조롱하고 있었다.

‘무슨....?’

메르세데스가 당황했다.

베니야루는 말하지 않았던가?

마을에 ‘친구’가 도착했다고.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겠노라고.

한데 저 꼴은 뭐란 말인가?

꽈드득!

메르세데스의 이가 갈렸다.

베니야루와 엘프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렴풋이나마 눈치 챈 것이다.

빛을 잃은 엘프들의 눈동자.

그녀들의 가녀린 몸에 남은 온갖 상처들이 메르세데스의 분노를 자극했다.

하지만 이내.

‘....내게는 분노할 자격이 없어.’

이처럼 생각하게 된 메르세데스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누군가?

제국의 기사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민족을 침략하고 멸망시킨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다.

물론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자행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이민족들의 목숨을 빼앗았을지언정 그들을 조롱하거나 노예로 만든 적은 없다고 하나.

‘....나 또한 저들과 같았어.’

저들을 비난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

깨달으며, 메르세데스는 눈을 감았다. 끔찍한 광경을 애써 외면했다.

애초에 외면해야하는 입장이다.

그리드의 명령도 없이 멋대로 행동하여 엘프들을 구원할 의리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꾸욱....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숨죽이고 앉은 채, 불끈 쥔 주먹을 바들바들 떠는 메르세데스.

지상의 누군가가 그녀의 기척을 감지한다.

“흐음.”

나이트.

러시아에서 진행 된 소규모 PvP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던 사내.

기존까지 러시아 최강의 플레이어라고 알려졌던 알렉산더조차도 손쉽게 해치운 그는 여전히 무명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의 인지도는 러시아 내에서만 통용됐다. 어설픈 실력자라서가 아니라, 그 본인이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났다.

상왕 키르가 억만금을 쥐어주면서까지 그를 섭외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왜 그래?”

말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는 나이트를 발견한 키르가 다가와 묻는다.

잠시 생각해 본 나이트가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니야.”

당연히 거짓말이다.

나무 위로부터 한 순간 얼핏 느껴졌던 기척, 패시브 스킬 <사신의 육감>은 ‘최고 위험’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쪽에서는 싸울 의지가 없는 것 같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그냥 모른 척 지나가면 좋을 일이다.

판단한 나이트가 키르를 재촉했다.

“야탄의 정수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가까운 신전에 도착해야하지 않아?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러지.”

나이트의 의견에 수긍한 키르가 행군 속도를 높였다. 채찍으로 엘프들의 등짝을 후려치며 그녀들의 걸음을 재촉했다.

몇 명의 플레이어가 그 모습이 재미있을 것 같다며 따라하자 채찍질 소리가 숲에 끊임없이 울렸다.

베니야루의 이가 갈렸다.

어째서 나는 또 인간을 믿었을까?

나의 어리석음이 엘프족을 또 한 번 큰 위기에 빠뜨리고 말았다.

혀라도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오늘날 자신 때문에 위기를 겪게 된 다른 동족들을 모조리 구원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어떤 치욕과 고통이라도 인내해야 했다.

키르는 그녀의 마음을 뻔히 눈치 채고 있었다.

“좋은 표정이야. 어디, 발악할 수 있는 만큼 발악해봐. 너의 의지가 꺾이는 그 순간을 기대하며 괴롭혀줄 테니까. 큭큭큭.”

“더러운 인간 놈....!”

베니야루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성을 잃은 그녀가 또 다시 부질없는 시도를 하였다.

마나를 운용하는 동시에 정령을 불렀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안기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끄으으아악....!”

몸 속 깊숙이 침투한 야탄의 정수가 베니야루의 마나와 혈액을 불태운다.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베니야루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토해내는 그녀를 바라보는 키르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역시 돈이 최고야. 비싼 물건일수록 제값을 하잖아. 안 그래?”

이날을 위해서 야탄의 종과 거래한 키르가 지출한 금액은 무려 4천만 골드에 육박했다. 한화로 약 480억이다.

게임에 이만한 거액을 쏟아 붓다니?

평범한 사람들은 키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키르의 입장에서 이번 지출은 명백한 투자였다. 그것도 성공한 투자!

종족 하나를 통째로 손아귀에 넣는데 쓴 돈이 4천만 골드라고 생각해보면 도리어 엄청 싼 것이었다.

‘오늘 잡은 엘프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기만 해도 4천만 골드의 배는 뽑아낼 테지.’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키르가 얻게 된 진짜 이익은 엘프 노예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세계수의 재배권이다.

세계수의 열매와 가지, 그리고 잎사귀와 껍질을 지속적으로 채집하여 판매할 경우 키르가 거둘 수익은 국가 단위 수익과 맞먹을 것으로 추정됐다.

‘아버지, 지켜보고 계십니까? 당신의 아들은 사람 착해 이용이나 당하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당신과 달리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당신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

그 비참한 장례식에서 올렸던 맹세를 이루기까지, 이제 단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후.”

심호흡하는 키르의 표정이 비장했다.

행군의 속도를 높이고자 말을 재촉한 그가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스팟.

바로 눈앞에 희미한 적색 빛의 기둥이 생성됐다.

플레이어가 로그인할 때 발생하는 이펙트였다.

“?”

우리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세계수의 숲을 발견한 상태였다고?

키르 일당 모두가 당황했다. 하지만 딱히 경계하진 않았다.

문득 뇌리를 스친 것이다.

멍청한 엘프들이 자신들을 환영한답시고 숲의 결계를 없앴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

이제 이 세계수의 숲은 개나 소나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특별한 사람만이 방문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고작 1명이다. 딱히 경계할 이유가 없다.

“가자.”

키르와 그의 일당은 지금 막 로그인하는 플레이어를 무시하고 지나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그리드>

“....?!”

로그인을 완료하고 모습을 드러낸 플레이어, 그냥 지나치기는 불가능한 거물 중의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짝퉁이 아니었다.

저 생김새, 진짜다.

“무슨 상황이야?”

로그인하자마자 수천 명의 인파를 마주한 그리드.

당황해서 뒷걸음치던 그의 두 눈이 점차 가늘어진다.

정체불명의 플레이어들에게 포박 당한 수천 명의 엘프들을 목격한 까닭이었다.

허겁지겁, 말에서 내린 키르가 그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이거 그리드 님 아니십니까? 우연이나마 이렇게 실제로 만나 뵙게 되어 정말로 큰 영광입니다. 저는 상인 랭킹 1위 키르라고 합니다.”

절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좋은 미소다. 하지만 그리드는 키르의 악수에 응하지 않았다.

상인 랭킹 3위 뮤토에게 들었던 키르의 인물상을 떠올린 그가 엘프들을 한 번 쭉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베니야루, 들리면 거수해봐.”

“그리드 님?”

키르가 그리드의 시야를 가로막고 선다. 그 탓에 엘프들을 살필 수 없게 된 그리드의 눈썹이 씰룩였다.

“비키지 그래?”

싸가지 없는 태도!

키르의 눈썹도 씰룩였다. 하지만 그는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초면인 상대에게 태도가 썩 별로군요. 일국의 왕이자 플레이어의 지존이신 당신께서 기본 적인 예의조차 모르셔서야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하.”

이제 그리드는 바보가 아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채고 있었다.

상처 입은 몸을 떨고 있는 저 수천 명의 여성 엘프들이 앞으로 어떤 끔찍한 취급을 당하게 될지 뻔히 예상했다.

표정을 굳히는 그에게 키르가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그냥 지나치시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키르 또한 지존이라는 자리를 넘보는 랭커다. 현 지존인 그리드에 대한 그의 경쟁심은 그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하여, 자신도 모르게 도발적인 언사를 뱉고 말았다.

그리드가 꿈틀했다.

“서로에게 좋아? 너한테만 좋은 게 아니라?”

조소하며, 키르를 밀쳐낸 그리드가 높은 통찰력 스탯을 이용해서 엘프들을 살폈다.

끝내.

“.....”

상처투성이의 베니야루를 발견한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른 그리드가 질문했다.

“도와줄까?”

“.....왜....?”

온갖 의문이 함축 된 반문.

떨리는 베니야루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한 그리드가, 그녀와 만난 이후 최초로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내가 스틱세이라는 하이엘프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거든. 그에게 은혜를 갚는 의미로 너희들을 돕고 싶어.”

순간.

“너무 멋대로 행동하는 거 아닙니까?”

이제 미소를 완전히 거둔 키르가 살기를 피어 올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더럽게 까부네! 국대전에서 크라우젤 한 번 이기더니 겁 대가리를 상실했냐?”

“애초에 네가 뭔데 남 일에 개입하고 지랄이야?”

쌍욕을 지껄인 키르의 동료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쥐었다.

그리드는 여전히 베니야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

베니야루의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한다.

두 번 다시는 인간을 믿지 않겠다던 다짐을 어기자마자 겪게 된 절망의 돌파구로서 또 한 번 인간을 믿어도 되는 건지, 그녀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스틱세이라는 이름을 꺼냈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진즉에 자신을 해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치지 않았었다.

결국.

“....도와줘.”

베니야루가 소리쳤다.

“우리를....! 우리를 도와줘!!!”

그녀의 간절한 외침, 그리드의 가슴에 확실하게 박힌다.

“응. 이래 보여도 정의의 사도이기도 하고 말이야.”

“....?!”

콰작!!

어느새 날아온 주먹이지?

<꺾을 수 없는 정의>에 얻어맞는 키르 상단원들의 면상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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