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9권 - 11화
안개 자욱한 회색의 새벽.
따앙.... 따앙.... 따앙....
고요한 숲에 아련한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새벽의 한기가 무색하게도 땀투성이인 그리드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메르세데스는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상념을 털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어째서 그리드가 로렉스의 도끼를 가지고 있던 걸까?
저 갑옷은 또 어떤 이의 것일까?
전날, 그리드가 용광로에 집어넣었던 레드 아머들과 대형 도끼를 똑똑히 목격한 메르세데스는 온갖 상상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심경이 복잡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알고 있다.
머릿속을 휘젓는 이 의문과 불안들,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들이 전부 진실일지언정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었으니까.
그래.
제국과 발할라의 전쟁 당시 적기사들을 학살한 무패왕의 후예가 설령 그리드일지라도, 그녀는 이에 대해서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제국은 템빨국의 잠재적인 적이었어.’
제국은 템빨국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최대의 난적이 될 여지가 컸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드가 암암리에 활동하며 제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더라도 비난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리고 설령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을 벌였을지라도, 이제 메르세데스는 그리드의 기사였다. 그녀는 그리드의 과거를 책잡기보다 이해하고 비호해야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로렉스가 그리드님과 피아로님의 관계를 알았더라면....’
만약 그랬다면 로렉스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쯤, 어쩌면 메르세데스와 함께 나란히 그리드를 섬기고 있었으리라.
물론 아무런 의미 없는 결과론에 불과하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미련을 가질만한 문제가 아니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고자 노력하는 메르세데스의 귓가로.
시식. 시시시식....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척이었다.
‘뭐?’
상념이 너무 깊었던 탓일까?
기껏 불침번을 서면서 누군가의 접근을 허락하다니,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할 일이다.
휘릭!
흠칫 놀란 메르세데스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허리를 회전시켰다. 그녀의 손에는 당연히 검이 쥐어져있었다.
챙강-!
단단한 무엇인가가 메르세데스의 검을 가로막는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메르세데스의 청각을 괴롭혔다.
소란을 감지한 피아로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더니 드물게 깜짝 놀랐다. 집채만큼 거대한 곱등이가 메르세데스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고대종.
태초부터 존재하였던 생물들.
인간들의 사회가 발달하고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서 점차 살 곳을 잃게 된 녀석들, 인류의 역사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였으나 세계수의 숲에서만큼은 이렇듯 살아 숨 쉬고 있다.
쩌정! 쩌저저저정!!
“윽....!”
메르세데스가 수세에 몰렸다.
총 8개의 다리를 지녔고, 그중 비교적 짧은 앞다리 2개와 칼보다 더 날카로운 옆다리 4개를 무기와 방패로 삼는 곱등이의 전투패턴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수만, 수억 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생물의 유전자에 각인 된 사냥 본능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차원적이었다.
쿠와아아앙!!
결국 은익까지 펼친 메르세데스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곱등이의 측면으로 이동했다. 곱등이의 앞다리 공격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꿈틀!
다리보다 길고 탄력적인 곱등이의 더듬이가 메르세데스의 이동을 실시간으로 감지했다.
퍼억!!
쿠당탕탕!!
곱등이가 들어 올린 옆다리에 직격당한 메르세데스가 피를 토하며 멀찍이 날아가 뒹군다.
“크....윽!”
고귀한 기사가 고작 곤충에게 이런 낭패를?
메르세데스는 이런 오만을 품지 않았다.
자이언트 곱등이는 단순히 곤충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외피는 비룡의 비늘보다 더 단단했고, 완력은 낮에 상대했던 베어울프들보다 더 뛰어났으며, 공격의 변칙성은 가늠하기 어려워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고수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생각이 없고 그저 본능에 몸을 맡겨 행동하는 녀석을 상대하다보니 혜안 자체가 발동하질 않았다.
콰드득!!
지면이 움푹 패여 든다.
자이언트 곱등이가 뒷다리를 굽히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이어서.
쿠자자자작!!
곱등이가 굽혔던 뒷다리를 펼치자 그 자리의 지면이 붕괴했다. 이 시점에 이미 곱등이는 하늘의 별이 된 듯이 높게 뛰어오른 상태였다.
“메르세데스! 정신 차려라!!”
이 무슨 대단한 도약력이란 말인가?
순식간에 하늘 높이 치솟는 곱등이를 보고 넋을 잃는 메르세데스의 귓가로 피아로의 외침이 꽂힌다.
“급성장!!”
콰자자자자자작!!
피아로가 반나절 내내 가지를 친 덕분에 멀끔해졌던 거목들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기껏 힘들게 잘라놨던 가지들이 다시금 자라났고 잎사귀도 무성해졌다.
시익! 시익!!
갑자기 울창하게 자라난 거목들 탓에 지상에 착지하지 못하고 거목들 사이에 걸린 곱등이가 몸부림친다.
후두둑! 콰자작! 요란하게 흔들리는 거목들이 곱등이의 앞다리와 옆다리에 잘려나가고 뒷다리에 짓밟혀 무너졌다.
이틈에 정신을 수습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메르세데스가 검 끝에 검기를 집중시켰다.
어둠을 물리치는 백광이 그녀의 검을 뒤덮는다.
피아로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절구질>을 전개하고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앙앙!!
하늘에서 떨어진 강기의 집약체가 곱등이의 거대한 몸을 통째로 짓뭉갬과 동시에.
“서약의 검!!”
은익을 펄친 채 돌진한 메르세데스가 곱등이의 터질 듯이 볼록 솟은 배에 몇 번이고 검을 찔러 넣었다.
대악마를 멸한 경험이 있는 두 전설들의 협공은 천지를 격동시킬만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콰자작!!
“읏....!”
“허!”
자이언트 곱등이를 해치울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다.
밤에만 활동할 수 있다는 약점을 지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해온 자이언트 곱등이의 강함은 지옥의 군주들과도 비견되는 수준인 것이다.
시익! 시이이익!!
“저런....”
메르세데스가 잠시 넋을 잃었다.
몸부림치는 곱등이 탓에 모조리 잘려나간 거목들 너머로 뼈만 남은 베어울프의 시체 수십 구를 목격한 까닭이다.
곱등이가 포식한 흔적이었다.
심지어 녀석은 이제 ‘인간’이라는 작고 탐스러운 생물을 디저트로 삼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순수한 욕구를 엿본 순간, 메르세데스의 혜안이 조금씩 녀석의 움직임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피아로 또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방법을 궁리한 눈치였다.
“완전히 구속하는 편이 좋겠어. 아무래도 대규모로 밭을 개간해야겠네. 내가 농사일 하는 동안 그대가 시간을 벌어주시게.”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메르세데스가 껑충, 크게 도약했다가 내려오는 곱등이의 앞다리 공격을 회피했다.
쿠우웅-!!
곱등이의 앞다리가 애꿎은 지면에 꽂히자 또 한 번 지진이 발생했다.
흔들흔들!
모루 위에 놓은 갑옷을 단조질 중인 그리드의 신영과, 그가 등지고 선 휴대용 용광로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오로지 대장일에만 집중했다.
곱등이가 출현한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의 동요도 표출하지 않고 있었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이 표현에 과장이 없다는 점이다.
무아의 경지에 돌입한 그리드는 자신만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세계에 실체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망치, 그리고 모루와 불, 금속이 전부였다.
‘느껴진다.’
이상적인 형태로 단련되어 잠재 된 힘을 모조리 끌어올린 오우거의 뼈가, 투기에 호응하여 격동하는 블랙 미스릴이,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어 꿈틀거리는 오우거의 뼈와 블랙 미스릴을 진정시키는 로사르 주석의 조화가.
따앙! 따앙! 따앙!!
끝없이 상승하는 그리드의 집중력에 따라서 망치질 또한 더욱 더 섬세해진다.
계속해서 발생하는 <대장장이의 인내심>효과와 <대장장이의 숨결>효과가 그리드를, 금속들을 한없이 견고하게 만든다.
급기야.
‘지금!’
그리드는 끝을 보았다.
[아이템 제작을 완료하였습니다!]
[대장장이의 신이 무척 놀랍니다. 자신의 기술이 인간에게 또 다시 따라잡혔다며 발을 구릅니다.]
[대장장이 신의 초조함을 엿본 다른 신들이 비웃지 못하고 참습니다.]
[대장장이 신과의 호감도가 1 하락했습니다.]
[대장장이 신과의 호감도가 -10이 될 경우, 제작하는 아이템(전설 등급 이상)에 저주가 적용됩니다.]
[현재 대장장이 신과의 호감도 –2.]
고오오오오....
빛의 굴절에 따라서 자색으로도, 적색으로도 보이는 풀 플레이트 아머가 완성됐다.
그 이름, <영웅왕의 갑옷>이다.
***
활활!!
메르세데스가 몸에 두른 은색의 검기가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상식 범주에는 넣을 수 없는 고대의 포식자 앞에 선 그녀는 힘을 안배할 여력이 없었다. 오로지 전력으로 맞섰다.
까앙! 까가가가강!!
태산마저 뭉갤 듯한 힘이 담긴 뒷다리의 초월적인 도약력.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앞다리의 빠르고 변칙적인 공격력.
사각을 없애는 더듬이와 옆다리들.
마치 전투를 위해 탄생한 생명체 같은 자이언트 곱등이와 비교했을 때 메르세데스는 초라한 한 명의 병사에 불과했고, 자이언트 곱등이는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전력 차이가 컸다.
쉬지 않고 쇄도하는 곱등이의 다리들을 <백호 자세>로 맞서는 메르세데스의 온 몸이 상처투성이다.
피아로는 여전히 밭을 갈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게!’
저 곱등이를 제압하려면 완벽한 구속이 필요하다.
판단한 피아로는 무상농법의 모든 절기를 동원하여 밭을 대규모로 개간하는 중이었고 이에 큰 시간이 소요됐다.
메르세데스가 앞으로 3분만 더. 아니, 2분만 더 버텨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메르세데스의 입장에서는 영겁과도 같은 2분이었다.
푸욱-!!
좌우에 2개씩 달린 옆다리를 여태껏 방어 용도로 활용해왔던 곱등이가 갑자기 공격 용도로 활용하자 백호 자세가 무너졌다. 완벽하게 허를 찔린 메르세데스의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드가 새로운 갑옷을 제작하느라 수리해주지 못했던 그녀의 가죽갑옷은 진즉부터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옷이 아니라 넝마였다.
비틀!
흔들리는 메르세데스의 신영.
이를 노린 곱등이의 좌우 4개 옆다리와 2개의 앞다리가 비처럼 쏟아진다.
쩌정! 쩌저저저저정!!
콰자자자자작....!!
메르세데스의 몸을 감싸는 은익 표면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곱등이의 다리 끝에 달린 수십 개의 날카로운 고리들이 은익의 표면을 부수고, 찢었다.
메르세데스는 이를 악 물고 견뎌보았으나, 마음속에 깃드는 절망감만은 떨쳐내지 못했다.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가요.’
영웅을 숭배하며 평생을 단련해왔다.
대륙 최강의 기사라고 칭송 받았고, 종국에는 전설로 남을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끝은 이토록 허망하다.
인류의 전설은 고대의 망령에게 있어서 한입 거리도 아니었다.
지나온 세월이, 마음속에 품어왔던 결의가, 미래를 향한 기대가 모두 부질없게 느껴진다.
‘죄송합니다.’
콰작....!
결국 유리처럼 무너져 내리는 은익.
반짝이는 검기의 잔재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메르세데스는 <백호의 검>을 품에 끌어안은 상태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가 스스로 정한 마지막 임무는 주인의 보물을 지키는 것이었다.
고오오오오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고자, 진원진기마저 끌어올려 검기를 몸에 두르는 메르세데스의 투명한 청발이 차츰 하얗게 샌다.
달빛처럼 반짝이는 백발.
최후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쐐애액!!
메르세데스의 작은 얼굴에 곱등이의 앞다리가 날아드는 그때였다.
“X망겜 같으니라고.”
메르세데스 생애에 처음 듣는, 저급하고 거친 욕설이 허공에 울렸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제는 웬 벌레 새끼가 대악마만큼 세네?”
그리드였다.
물리적인 공격에 강한 면모를 발휘하는 <란스티어의 망토>를 펄럭이며 등장한 그가 곱등이의 공격을 회(回)로 반격한 후 메르세데스에게 갑옷을 건넸다.
“입어. 이제부터 너의 진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야.”
그리드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눈앞에 있는 자이언트 곱등이의 이름, 금색으로 번쩍이고 있었으니까!
막대한 보상을 기대해도 좋을 터였다!
“노에! 랜디! 그, 그리고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냥!”
캬캭! 캬캬캭!!
피아로가 한창 개간 중인 논밭 위로 그리드 군단이 총출동한다.
같은 시각, S.A그룹 본사 운영팀.
“아무래도 잡을 거 같은데요?”
“....미쳤어. 진짜 미쳤어.”
수십 대의 모니터를 실시간으로 관찰 중인 운영팀원들과 운영팀장 윤나희는 혀를 내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자이언트 곱등이.
이종족 에피소드의 발단과 함께 엘프족의 개체수를 줄이는 역할을 수행했어야할 재앙급 몬스터다.
한데 템빨왕 그리드와 상왕 키르라는 변수 탓에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레이드 당하게 생겼다. 메르세데스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아무리 전설의 기사라도 그렇지 홀로 저만큼이나 곱등이를 애먹일 줄이야....
‘이 상황에서 그리드와 키르가 조우하기라도 했다가는....’
그리드의 성격상 엘프들을 구출하고 엘프족의 숫자를 그대로 유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경우 다크엘프 에피소드가 소실 될 가능성이 높다.
‘생존한 12테들이 야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힘의 균형을 맞출 예정이었는데....’
도대체 몇 번 째인가?
예정 된 스토리가 플레이어에 의해서 변경 된 횟수, 이제는 정확히 기억하기도 어렵다.
“괜찮을까요?”
걱정하는 운영팀원에게 윤나희가 너털웃음 흘렸다.
“회장님 말씀 잊었어? Satisfy는 플레이어가 만드는 세상이고 역사야. 우리가 염려할 부분이 아니라고.”
그래, 잠자코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 긴 역사가 끝나갈 무렵에 최후의 승자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 과연 누가 될지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