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9권 - 10화
화르륵!
용광로 속 레드아머들의 형태는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반면 대형 도끼는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로사르 주석이 녹는점에 도달한 것이다.
‘조금만 더.’
두 눈을 부릅뜬 그리드가 용광로를 주시했다. 혹, 타이밍을 놓칠까 염려하여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대형 도끼가 완전히 녹아 흘러내리고, 레드아머들의 어깨와 허리 부근도 마찬가지로 일그러지기 시작한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한 그리드가 집게를 들었다.
치익!!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 집게가 붉게 달아오르면서 발생하는 열기가 주변의 꽃과 풀을 시들게 만든다.
“소중한 꽃들을…….”
엘프 몇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래 엘프는 인간의 기술을 싫어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기술 대부분이 자연을 훼손시켰기 때문이다.
1,753번째 나무의 가지를 치고 내려온 피아로가 넌지시 말했다.
“우리들 인간은 그대들과 달리 나약한 종족일세. 그대들처럼 벌거숭이가 되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고, 기술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종족이지. 이 또한 자연의 섭리. 인간을 무조건 미워하기보다는 이해할 수 있게끔 노력해 보시게.”
“헛소리.”
여태껏 피아로에게 호감을 보이던 엘프들이 반발심을 표출했다.
“인간의 기술이 단지 생존을 위해서 발전한 걸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인간의 기술이 발전해 온 이유는 남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것을 불리기 위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잖나? 우리가 인간을 증오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욕심이다. 그들의 욕심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섭리에 거스르는 것이야. 비상식적인 거라고.”
“허허…….”
피아로는 쓴웃음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엘프들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피아로 본인 또한 남의 것을 빼앗고 짓밟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군. 그대들에게 우리를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 또한 욕심이었군.”
“하지만.”
“음……?”
“우리에게 호의적인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곧 도착할 우리의 어린 친구와 당신들……. 극히 일부의 인간만큼은 신뢰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
베니야루는 알고 있다.
그리드와 메르세데스, 그리고 피아로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엘프들을 모조리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저들은 엘프들을 해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엘프들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었으면서 너그럽게 용서했다.
엘프족의 드넓은 땅과 엘프들의 젊음, 그리고 미모를 탐하며 더러운 욕망을 불태우던 먼 옛날의 인간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뭐… 세상에는 많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만나게 될 인간들 중에는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아. 당신 같은 사람들을 만나기까지 우리가 겪어야 할 배신과 고통을 감당할 여력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이미 수백 년 전의 사건들이라고는 하나, 엘프들이 인간에게 입은 상처들은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여전히 쓰리고 아픈 상처들이었다.
이제 와서 인간을 이해하고 싶지도, 인간에게 이해받고 싶지도 않은 것이 엘프족의 입장이었다.
따앙! 따앙! 따앙---!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세계수의 숲.
어색한 침묵 속에 그리드의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맑고 경쾌한 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은 메르세데스와 랜디, 그리고 템빨골들은 여전히 베어울프들과 전투 중이었다.
하지만 처음처럼 치열한 사투는 아니었다. 베어울프의 숫자가 고작 두 마리에 불과한 까닭이다.
밤이 다가오자 베어울프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메르세데스에게 베니야루가 설명했다.
“베어울프는 밤에 약하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잠에 들지. 다시 동이 트기 전까지 새로운 베어울프는 출현하지 않을 거다.”
“다행이네요.”
무려 전설의 기사가 안도한다.
베어울프와의 연속적인 전투는 메르세데스에게도 고역이었던 것이다.
반면 템빨골들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 ⌓ 이런 표정으로 웃으며 베어울프들의 엉덩이를 찌르던 녀석들의 눈초리가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녀석들은 계속되는 싸움을 열망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생물과 달리 스태미나에 제약이 없는 언데드의 강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편.
‘좋아!’
용광로에서 꺼낸 두 벌의 레드아머를 말뚝과 망치로 때리던 그리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황제의 <적기>가 담긴 블랙 미스릴을 로사르 주석과 오우거의 뼈로부터 온전히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치익……! 치이익……!
붉게 점멸하는 검정색 철판.
레드아머의 가슴 안쪽 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그 철판의 원료가 바로 블랙 미스릴이다. 솜씨 좋은 장인이 훌륭한 형태로 가공을 끝내 놓은 상태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철판을 모루 위에 올린 그리드가 본격적인 단조질에 돌입했다.
따앙! 따앙!!
‘레드아머의 고유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장되어 있는 적기를 손상시키지 않아야 해.’
철판을 더욱더 견고하게 단련하는 한편 이상적인 형태를 갖추게끔 단조해야 한다.
이를 악문 그리드의 망치질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됐다.
수십 분, 수 시간이 우습게 흘러갔다.
그 과정에서.
[극도로 집중하여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효과가 발동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이 발동합니다!]
[극도로 집중하여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효과가 발동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이 발동…….]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 레벨이 7로 상승합니다!]
…….
…….
그리드는 열망의 무아검을 제작했을 때와 비견되는 보정 효과를 받았다.
이는 단지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 올린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효과가 아니었다. 운도 따라야 했다.
‘좋아……!’
최고의 시작이다.
환희에 찬 그리드의 집중력이 더욱더 고조되는 그때였다.
[광물 ‘블랙 미스릴’에 당신의 <투기>가 깃듭니다.]
“……!!”
시대의 강자 메르세데스와 피아로, 그리고 베니야루 덕분에 최대치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드의 투기.
적색과 자색의 엄숙한 기운이 블랙 미스릴을 향해서 맹렬히 주입된다.
‘어떤 형태의 기운과도 친화력이 높습니다.’라고 명시되어 있는 블랙 미스릴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제 블랙 미스릴로 만든 철판은 단지 붉게 점멸할 뿐만 아니라 자색으로도 점멸하고 있었다.
‘이거 어쩌면…….’
나의 예상과 기대를 아득히 초월하는 결과물이 탄생하지 않을까?
따앙! 따앙! 따앙……!
망치질이 더욱더 견고해진다.
그리드는 무아지경의 상태에 돌입하고 있었다.
‘저게 인간이라고?’
쉬지 않고 계속되는 그리드의 대장일을 지켜보는 엘프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 지 오래다. 그녀들 모두 그리드의 손 기술과 집중력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베니야루가 받는 충격이 컸다.
‘찰나를 사는 인간 주제에 어찌…….’
수백 년의 생을 살며, 자연과 정령들의 비호까지 받는 엘프들보다 더 높은 경지의 정신적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단 말인가?
12테조차도 넘보지 못할 영역이다.
‘아니, 하이 엘프조차도 어렵지 않을까?’
도대체 저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고작해야 수십 년 동안 어떤 일들을 겪었기에 저만한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걸까?
베니야루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옛 상처에 움츠려, 세계수의 숲이라는 우물 속에 갇혀 지내온 그녀의 입장에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영웅의 삶을 가늠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캬캭! 캬캬캭!!
마지막 남은 2마리 베어울프를 사냥한 이후.
마치 강아지처럼 그리드의 곁으로 쫄래쫄래 다가와 앉아 있던 템빨골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낑낑거리면서 평평한 바위를 주워 오더니, 그 위에 나뭇가지를 올리고 검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 마치 그리드의 단조질을 따라 하는 듯하다.
“사랑스럽네요.”
“허허, 녀석들. 주군을 보고 공부하려는 겐가.
템빨골을 바라보는 메르세데스와 피아로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주인을 보고 배우고자 노력하는 녀석들의 모습이 예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드에게는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만약 이때 그리드가 무아지경에 돌입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곁에 나란히 선 템빨골들이 대장일을 따라 하고 있음을 인지했다면 당장 멈추라고 소리칠 수 있었을 터인데…….
이거 이러다가 템빨골의 2차 전직 직업군에서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보게 생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캬캭!! 캬캬캭!!
크캬캬캬캭!!
망치질을 따라 하는 템빨골들의 자세가 점차 그리드를 닮아 가는가 싶더니.
…….
쉴 새 없이 떠들던 템빨골들이 웬일로 침묵했다.
대장일에 익숙해졌으니 이제는 그리드의 ‘집중하는 모습’ 그 자체를 보고 배우는 것이었다.
[템빨골 1이 <해골의 인내심>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템빨골 2가 <해골의 인내심>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알림창이 그리드의 시야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따앙! 따앙!
‘좋아. 조금만, 조금만 더……!’
투기가 깃든 블랙 미스릴을 단련하는 일에 정신이 팔린 그리드는 눈치채지 못했다.
베니야루의 곁으로 한 명의 엘프가 다가와 속삭였다.
“키르가 마을에 도착하였답니다.”
“드디어……!”
세계수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흥분한 베니야루가 피아로에게 말했다.
“우리는 잠시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당신들도 함께 가겠나? 휴식을 취할 공간쯤은 마련해 주도록 하지.”
“우리는 이곳에 남겠네.”
“왜지? 밤이 깊었다. 베어울프보다 더 위협적인 고대종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 제아무리 당신들이라도 위험할 수 있다.”
“주군의 작업을 방해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이곳에 남아 주군의 곁을 지키겠네.”
“…저자의 작업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만?”
“아니, 몇 날 며칠이 걸릴 수도 있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백 년, 천 년 계속될지라도 곁을 지킬 터인데.
대수롭지 않게 말한 피아로가 메르세데스에게 눈짓했다.
“한숨 붙이게.”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새벽에 교대해 드리죠.”
피아로와 함께 불침번을 서는 날이 다시 찾아올 줄이야…….
종자 시절을 떠올리는 메르세데스의 마음이 다소 들뜬다.
이날.
엘프들이 떠난 후에도, 노에와 랜디가 잠든 후에도, 피아로와 메르세데스가 불침번을 교대한 뒤에도 그리드의 작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엘프족의 마을.
“오오……!”
세계를 지탱하는 태초의 나무, 세계수 아래 모인 엘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키르가 ‘세계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성수’라고 주장한 맑은 물을 세계수에 뿌리고 약 5분 정도가 지나자 세계수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까닭이다.
뭐, 애초에 세계수가 병든 상태였다고 표현하기도 웃기다. 고작 몇 개의 잎사귀가 누렇게 떴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몇 개의 잎사귀조차 다시 푸르러졌으니 키르가 주장하는 ‘성수’의 위력은 진짜처럼 보였다.
“레베카 여신의 성수인가?”
엘프는 딱히 신을 숭상하지 않는다. 그들이 위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는 세계수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빛의 여신 레베카에 대해서는 나름의 호감을 지녔다.
질문하는 엘프들에게 키르가 설명했다. 그의 청량한 목소리와 사람 좋은 미소가 엘프들에게 신뢰를 심어 주었다.
상인과 대화하면 홀린다.
이 유명한 Satisfy의 법칙 중 하나가 철저히 발현되고 있었다.
“맞습니다. 제가 교황청까지 달려가 평생을 모아 온 돈을 헌금으로 바치고 구해 온 성수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여러분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
엘프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됨을 느낀 키르.
남성형 엘프들은 오늘도 없는 건가? 어째서 저번부터 남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
이와 같은 의문은 잠시 접어 둔 그가 마차에 가득 실어 온 항아리들을 엘프들 앞에 꺼냈다.
“아직 성수는 많이 남았습니다. 복용하시면 건강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이니 부디 사양 말고 저와 함께 축배를 나눠 주십시오. 세계수의 회복을 함께 축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소. 건배합시다.”
엘프의 건강은 인간이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 동안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는 종족이 바로 엘프였으니까.
한데 굳이 여신의 성수를 복용해야 할 이유는 또 뭘까?
몇 명의 엘프들은 의문을 품었지만 이를 표출할 틈이 없었다.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키르 탓에 엘프들은 어느새 모두 손에 잔을 들고 있었다.
“세계수의 영원한 건강을 위하여.”
선창한 키르가 꿀꺽 성수를 들이켰고, 대부분의 엘프가 이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중독되어 끔찍한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상인 키르가 야탄의 종들과 거래하여 대량으로 확보한 야탄의 정수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큭큭! 큭큭큭!! 크하하하하핫!!! 세상 물정 모르는 멍청한 늙은이들 속이기만큼 쉬운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상냥한 미소는 온데간데없다.
키르의 사악한 웃음소리와 그의 부하들에게 붙잡히는 엘프들의 절규가 마을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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