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9권 - 6화
사람 키보다 길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창칼처럼 위협적이다. 무성하게 자란 잎사귀들은 시야를 방해한다.
하늘까지 도달할 기세로 솟구친 초거대 거목들.
그 앞에 서는 사람 중에 경외심을 품지 않을 자가 있을까? 압도당하여 숨조차 쉬지 못할 이가 태반이다.
하지만 피아로는 달랐다.
밭일에 몸 담궈 온 그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친숙한 것이었다.
맑은 공기와 대자연의 정기가 그의 정신과 육신을 북돋는다.
“내가 너희들을 멀끔하게 만들어주겠노라!!”
쩌렁쩌렁!
호기롭게 소리치는 피아로의 신영이 나무 사이를 날다람쥐처럼 노닌다. 그의 손에 쥐어진 벨리알의 낫이 허공에 수놓일 때마다 거목들의 나뭇가지들이 후두둑, 후두둑 지상으로 떨어졌다.
한 그루의 거목이 깔끔하게 단장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0분이 안 되었다.
그리드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전설의 농부인 피아로는 식물 전반적으로 이해도가 높았고 덕분에 가지치기 솜씨도 탁월했다. 그의 손길이 나무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당신의 가신 피아로가 가지치기를 완료하였습니다.(1/2,000)]
“잘 한다!”
따앙! 따앙!
구멍이 숭숭 뚫린 휴대용 용광로.
그 위에 철판을 덧대고 망치로 두드리는 그리드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그리드와는 거리가 먼, ‘인싸’들의 상징과도 같은 술자리 어깨춤을 연상시키는 동작이었다.
‘신난다!’
특정 몬스터를 일정량 사냥해야하는 퀘스트의 경우, 퀘스트를 수락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펫이 몬스터를 사냥해도 수량이 누적되게 마련이다.
하여 그리드는 생각해보았다.
가지치기 퀘스트 또한 자신이 굳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을까?
펫, 혹은 가신에게 대신 일을 시켜도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받지 않을까?
그의 생각은 합리적인 것이었고 실제로 적중했다.
전설의 농부를 가신으로 둔 그리드는 본인이 직접 노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가지치기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멋져....”
“인간 남성 중에 저토록 자연과 가깝고 자연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자연과 하나가 된 저 몸놀림을 봐. 우리 엘프족 남성들보다 몇 배는 낫군. 기왕 아이를 낳을 거라면 저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네.”
고결한 엘프인 우리가 한낱 인간에게 반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래서 하이엘프라는 종이 생겼던 거구나, 깨닫는 여성 엘프들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상의를 탈의한 채 나무 사이를 노니는 피아로를 올려보는 그녀들의 눈가가 모두 촉촉하게 젖은 상태였다.
메르세데스는 묘한 자부심을 느꼈다.
‘진정한 영웅의 매력이란 종족마저 초월하는 것이로군요. 과연 피아로 님, 굉장하십니다.’
역시 내가 동경해온 사람답다.
할짝.
길게 뻗은 손가락에 찍은 꿀을 혀로 핥는 메르세데스.
그녀가 그리드 일행 중에서 제일 한가해보였다.
왕이라는 작자가 직접 망치질 중인 이때 왕의 기사인 그녀는 꿀이나 빨고 있다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메르세데스가 제대로 꿀보직에 앉았다고 오해하고도 남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아껴 먹기가 힘들어.’
메디아산 토종꿀.
그리드가 꼭 아껴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던 이 비싼 꿀은 메르세데스가 여태까지 먹어본 그 어떤 명품 꿀들과 비교해도 향기롭고 달콤했다. 심지어 산뜻하기까지 해서 질리지 않고 계속 먹을 수 있었다.
식탐쯤이야 우습게 다스릴 수 있는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조차도 무한정 먹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만들 정도로 맛있는 꿀. 그래,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거부하기 힘든 꿀이다.
“할짝....”
한 번에 왕창 퍼먹고 싶다!
이 강렬한 욕구를 간신히 억누른 메르세데스가 손가락 끝에 조금씩, 조금씩 꿀을 묻혀 혀로 가져가는 모습, 평소보다 묘하게 더 아름답다.
망치질하는 손은 쉬지 않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 곰인지 늑대인지 하는 놈들은 대체 왜 안 나타나는 거야?’
메르세데스가 꿀을 빨기 시작하고 벌써 20분이 지나가는 중이다.
100ml 용량에 무려 50골드.
개미 눈곱만큼 양도 적은 주제에 한화로 6만원에 달하는 값비싼 꿀이 무의미하게 소진되는 것이다.
‘이대로 헛돈 날리는 건 아니겠지?’
따앙! 따앙!
망치질에 박차를 가하는 그리드의 초조함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할짝.... 하아.... 하아.... 저, 전하.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워요.”
핑글핑글.
메르세데스의 눈이 돌았다.
어째선지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그녀가 여태까지 손가락 끝에 조금씩 묻혀 먹던 꿀을 한 손 가득 펐다.
[가신 메르세데스가 상태이상 ‘탐식’에 걸렸습니다.]
“뭐?”
전설의 기사조차도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이상이라고?
과연 터무니없이 비싼 꿀답게 터무니없이 무서운 위력을 자랑하는 메디아산 토종꿀!
“아, 안 돼....! 내 돈....!!”
6만원어치의 꿀이 메르세데스의 위장 속으로 단숨에 들어가려하는 모습, 그리드를 절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라 잃은 표정으로 소리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쿠워어어어어어!!
드디어.
그리드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늑대 같은 곰. 아니, 곰 같은 늑대가 드디어 출현했다.
[달콤한 향기에 도취 된 베어울프가 출몰합니다!]
[흉포한 마수의 울음이 듣는 이들에게 공포심을 선사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흉포한 마수의 울음이 숲 전역에 흩어져있는 동족들의 귀에 포착되었습니다. 5분 내에 베어울프를 사냥하지 못할 시 새로운 베어울프가 출몰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집단 사냥 능력이 탁월한 베어울프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더욱 강해집니다!]
“하!”
안도의 한숨을 토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탐식에 빠졌던 메르세데스가 적의 출현과 동시에 이성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손에 잔뜩 묻은 꿀을 한 번에 입에 넣지 않고 살짝 핥은 그녀가 다른 한 손에 소형방패를 꺼내 들었다.
쩌저저정-!!
늑대처럼 민첩한 몸놀림으로 도약한 베어울프가 곰의 앞발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앞발로 메르세데스를 때렸고, 이를 방패로 막아낸 메르세데스는 두 걸음이나 뒷걸음쳤다.
그리드도, 메르세데스도, 또한 나무 위에서 가지치기 중이던 피아로도 모두 깜짝 놀랐다.
‘저토록 날래면서 힘은 오우거보다 몇 배나 세다고?’
이쯤 되면 보통 몬스터라고 분류하기 어렵다.
5분 내에 베어울프를 사냥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베어울프가 출몰할거라던 시스템 메시지, 그리드는 베어울프를 천천히 사냥하면 꿀을 아낄 수 있겠다며 기뻐했었지만 이제 보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베어울프는 우리 엘프들에게도 위협적인 마물이라고 말했을 텐데?”
베니야루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녀 또한 피아로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끼는 중인지 그리드 일행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주,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힌 그리드가 입에 담기에 조금 민망한, 의문형 스킬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딱! 딱딱딱!!
지하로부터 두 마리의 대두 해골이 등장했다.
템빨골 1과 2였다.
“언데드라고!”
정작 베어울프는 아무런 반응도 없건만 엘프들이 질색한다.
자연을 숭상하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존재 자체만으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언데드는 극도의 혐오 대상이었다.
반사적으로 활을 들고 템빨골들을 겨냥하는 그녀들에게.
“저 아이들은 나쁜 언데드가 아니라 착한 언데드요.”
나무에서 뛰어내려온 피아로가 설명했다.
그의 주장은 딱히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다.
언데드면 언데드지 나쁜 언데드는 뭐고, 착한 언데드는 뭐란 말인가?
전혀 논리적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엘프들은 설득당했다.
말이라는 것, 누가 뱉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었으니까.
못생긴 남자가 학교 후배에게 너, 예쁘다? 라고 말했다가 성추행범으로 고소당하는 사건이 있는 반면, 잘생긴 남자가 학교 후배에게 너, 예쁘다? 라고 말하면 커플로 직결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그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랬군요. 착한 언데드였군요!”
“다시 보니 생긴 것부터가 착하게 생겼어요!”
하하호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피아로와 엘프들이었다.
그야말로 꽃밭에 둘러싸인 피아로 또한 남자는 남자인지, 꽤나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평소보다 태도가 훨씬 더 온화했다.
‘저러다가 엘프랑 결혼하는 거 아니야?’
이미 포비아라는 선례가 있다.
인간과 엘프 간의 혼인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자연을 아낀다는 공통점을 지닌 피아로와 엘프들의 궁합은 누가 봐도 좋았다.
그리드는 상상한다.
엘프와 결혼한 피아로 덕분에 템빨국과 엘프족이 맹우로 거듭나는 미래를....
“....아니, 김칫국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지.”
쩌적! 쩌저저저적!!
베어울프가 휘두르는 앞발을 연달아 방어하는 메르세데스의 소형 방패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국을 떠난 이후, 적기사 시절에 사용하던 장비들은 모조리 반납하고 피아로의 종자일 때 사용하던 장비들을 무장한 메르세데스의 템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리드가 봤을 때 그녀가 사용하는 검과 방패, 그리고 무장한 갑옷과 부츠, 장갑 모든 게 끽해야 200레벨 제한의 아이템들이었다.
기껏 섭외한 아군이 거지라서 돈 들어가게 만들다니, 참으로 치가 떨리는 일이다.
“꺄악!”
템빨골과 함께 소환됐던 랜디가 베어울프를 급습했다가 반격 당하고 멀찍이 날아간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템빨골들은 무사하다는 점이었다. 녀석들의 저급한 공격은 베어울프의 가죽을 전혀 꿰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어울프가 녀석들을 무시했다. 자신을 찌르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실제로 템빨골들이 베어울프에게 입히는 데미지는 1로 고정되어있었다.
베어울프의 방어력이 템빨골들의 공격력을 가뿐히 초월하는 것은 물론이고 레벨까지 압도적으로 높았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메르세데스의 역할이 더욱 더 중요해졌다.
템빨골들이 경험치를 획득할 수준까지 베어울프에게 피해를 누적시키려면 최소 20분은 걸릴 것 같았고, 메르세데스는 그 동안 굳건히 버텨야만 했다. 새롭게 등장할 베어울프들의 협공까지 피해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메르세데스의 방패는 곧 깨지기 직전이다. 방패가 부셔지면 오직 철검 한 자루로 맞서 싸워야하는데 그건 너무 위험하다.
좌시할 수 없었던 그리드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가 꺼낸 아이템, 검성 크라우젤과 함께 설계하고 제작한 공방일체의 신검, <천하를 짓뭉갤 고귀한 백호의 검>이었다.
“메르세데스!!”
도검류 무기를 장착 가능한 각 직업군 랭킹 3위권일 것.
백호 검의 사용 조건이다.
메르세데스는 과연 이 조건을 충족할까?
그리드는 당연히 충족할 거라고 보았다.
전설의 기사라는 직업군은 그녀만의 전유물이었으니, 당연히 직업군 랭킹 1위라고 판정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역시나.
철컥!
메르세데스는 그리드가 던져준 백호검을 자연스럽게 손에 거머쥐었다. 쩌엉!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베어울프의 앞발을 보지도 않고 방패로 막아낸 그녀의 혜안이 백호검을 훑는다.
오싹!
메르세데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백호 검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엿본 여파다.
쩌적! 쩍!!
베어울프의 앞발에 짓눌린 소형 방패는 더 이상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갈라지고 있었다.
급기야 완전히 쪼개지는 방패 틈새로.
쿠워어어어어어!!
포효하는 베어울프의 날카로운 발톱이 파고들었다.
그 발톱이 메르세데스의 얼굴에 닿기 전.
쩌어어어어어엉-!!
사각에서부터 솟구쳐 올라간 백호검이 베어울프의 복부를 강타했다.
순간 방출되는 돌의 기둥이 베어울프의 거대한 몸을. 족히 수백 킬로그램은 나가고도 남을 몸뚱이를 통째로 상공 5미터까지 띄워버렸다.
“이럴 수가....!”
전설 속에서도 엿보지 못할 신검의 위력에 감탄을 넘어서 경악하는 메르세데스.
전율하는 그녀의 귓가로 그리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설의 템빨 기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 메르세데스.”
누군가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지게끔 만들었던 최악의 작명, 메르세데스의 가슴 깊숙이 다가와 박힌다.
‘전설의 템빨 기사....’
템빨왕의 기사이기에 템빨 기사일 터.
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멋진(?) 이명을 선사 받은 메르세데의 그리드에 대한 충성심이 더욱 더 견고해졌다. 이제 진정한 템빨국의 일원이 된 그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