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9권 - 5화
에트날 전쟁 당시 급상승한 악마력을 기반으로 강화 된 흑화.
피 나는 노력 끝에 획득했던 칭호, <신이 주시하는 자>의 효과로 창안할 수 있었던 연살파극.
엘프족이 등장한 시점부터 축적되기 시작한 투기.
끝으로.
쿠르릉! 콰쾅!! 쾅!!
쏴아아아아아----
대악마 아스타로트의 힘.
“으으윽!”
털썩!
쏟아지는 폭우 속에, 떨어지는 마기의 벼락들을 배경으로 삼은 베니야루가 주저앉는다.
흐트러진 백발 사이로 엿보이는 그녀의 동공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직접 겪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12테.
고결한 엘프족 12가문의 가주 중 하나인 자신이 인간 앞에 무릎을 꿇다니?
감싸고, 보호한다는 뜻을 지닌 ‘테’의 칭호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넘긴 게냐?”
강한 적의를 품은 베니야루의 시선이 그리드를 노려본다.
그녀가 문제 삼는 부분은 그리드 본인이 내뿜는 마기가 아니었다. 흑마술, 혹은 아티팩트의 영향 등으로 인해서 마기를 다루는 인간이야 예부터 셀 수 없이 많았으므로 특이한 모습이 아닌 것이다.
단, 이 필드는 달랐다.
마기의 벼락을 동반한 폭풍우를 불러일으키는 마법이라고?
이는 마치 지옥의 군주들을 연상시키는 힘이 아닌가!
“알량한 인간 놈....! 우리 엘프들의 영토를 침범하고자 기어이 악마와 손을 잡다니!! 너희들의 욕심에 한도란 없는 것이냐!!”
쩌렁쩌렁!!
마나가 담긴 베니야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폭풍우를 꿰뚫는다. 만약 그리드가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마나의 흐름에 방해를 받아 온갖 상태이상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제자리에 굳건히 섰다.
“거참. 왜 그렇게 배배 꼬였어?”
쏴아아아아....
비가 그친다.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던 하늘이 맑게 개었다.
마나의 과소비를 감당하지 못한 그리드가 <전격 마기의 폭풍>의 전개를 멈춘 것이다.
하지만 베니야루는 다르게 오해했다.
‘힘을 거두다니? 우리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가?’
좋은 소식은 아니다.
베니야루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드리웠다.
“이놈....! 우리를 노예상에게 팔아넘길 작정이로구나....!”
“.....”
인간을 향한 편협한 시각.
부정적인 방향으로 편향 된 사고.
강한 무력을 지닌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끔 겁쟁이 같기도 하다.
바들바들 몸을 떠는 베니야루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에 측은지심이 서렸다.
자신의 생각을 진실인 양 믿는 그녀를, 그리드는 답답해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도리어 동정했다.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네 성격이 꼬인 이유는 너 자신만의 문제가 아닐 테지. 인간들에게 큰 상처를 입었나보구나.”
“.....”
더없이 상냥한 음성에 베니야루가 동요한다.
잠시 멍해졌던 그녀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더니 다시금 적의를 불태웠다.
“우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지 마라. 상냥한 표정도, 달콤한 속삭임도 필요 없다. 네가 우리를 기만하려고 노력해봤자 우리는 결코 속지 않아!”
“....거참.”
엘프는 대화가 불가능에 가까운 종족이었다. 벽창호 그 자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름다운 엘프와의 만남을 꿈꾸고 있을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실망시킬만한 실체다.
하지만 그리드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엘프와의 만남을 꿈꿔서가 아니었으니까.
“뭐, 긴 말 말자. 그냥 내 입장을 밝힐 테니까 듣기만 해.”
꿀꺽!
그리드가 강압적으로 말하자 베니야루를 비롯한 엘프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나뭇잎을 엮어 만든 옷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그녀들의 여린 육신이 바들바들 떨린다.
단 둘이서 자신들을 제압해버린 저 인간 놈들이 과연 어떤 끔찍한 선고를 내릴지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녀들에게.
“우선 내 소개부터하마. 나는 템빨왕 그리드. 전설 파그마의 후예이며, 인간들 나라의 왕이다. 악마와 계약했다는 건 오해야. 내가 쓰는 악마의 힘은 대악마를 처치한 대가로 얻은 것이거든.”
“....!”
그리드는 말해나갔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베어울프를 사냥하기 위함이었어. 나는 이곳이 너희들의 영토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내 행동이 너희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면 미안하게 생각해.”
“.....”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너희들과 적대하고 싶지 않아. 내게는 일국의 왕으로서 타종족과의 교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야할 의무가 있거든. 그러니까 나에 대한 의심과 경계심을 거둬줘. 그리고 여기서 당분간 머물면서 사냥하는 걸 좀 허락해주라.”
자신의 정체와 입장, 그리고 바람을 침착하게 풀어나가는 그리드의 시선은 자꾸만 애꿎은 하늘로 향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엘프들의 옷차림이 영 야했던 까닭이다.
나뭇잎 몇 장으로 중요 부위들만 가린 그녀들은 거의 반나체나 다름이 없었고, 그리드에게는 그녀들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담력이 없었다. 처음 만난 엘프족에게 변태로 오해 받고 왜곡 된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언젠가 화가 되어서 돌아올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의 그 단호하면서도 순진한 모습이 베니야루를 비롯한 엘프들의 경계심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전설.... 그렇군. 당신이 전설이라면 그 초월적인 무력도 납득이 가는군. 저 여자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전설인가?”
베니야루의 시선이 메르세데스에게 향한다.
메르세데스는 여전히 베니야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살수를 쓴 그녀를 기필코 용서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메르세데스를 진정시키고자, 그녀의 손을 붙잡아 곁에 세운 그리드가 설명했다.
“응, 맞아. 그녀 또한 전설이야.”
“그래서....”
결국, 베니야루는 자신의 패배를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가 언급하는 파그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그녀였지만, 포비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포비아.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이.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 가엾은 아이 또한 전설이 된 후에는 초월적인 힘을 지니게 되지 않았던가.
“....내가 알고 있는 전설은 숭고한 존재였다. 당신들이라면 신용해도 좋을 테지. 좋다. 당신을 평범한 인간으로 보지 않겠다. 당신의 말을 믿겠다. 12테의 권한으로 당신들이 당분간 이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마. 베어울프는 우리들 엘프에게도 위협적인 마물이니 사냥해준다면 나쁠 것도 없지.”
“고마워.”
“단, 이 이상 깊숙이 숲에 들어오지는 마라. 당신들의 행동 범위는 여기까지로 제한하겠다.”
“응.”
흔쾌히 대답하는 그리드.
이에 메르세데스가 당황했다.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그리드의 커다란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다급히 속삭인다.
“전하, 엘프들의 사회를 엿보고 그들과의 향후 관계를 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실 생각이세요?”
엘프들의 궁술은 역사에 기록 된 것보다 더욱 더 굉장했다. 정령술 또한 기대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메르세데스는 템빨국과 엘프족이 반드시 좋은 관계를 맺어야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어. 하지만 저쪽의 태도를 봐. 섣불리 접근을 시도했다가는 도리어 경계심만 키울 게 뻔해. 조급해하지 말자. 기회는 언젠가 또 있겠지.”
서두르는 일치고 좋게 풀리는 경우가 없다.
무수한 경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는 인내를 배워가는 중이다.
“엘프족 영내에 머무는 걸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거라고 생각해.”
“네, 알겠습니다.”
이미 왕께서 정하신 일이다.
메르세데스는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그럼 이제 작업을 시작해보자.”
흡족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망가진 용광로와 망치를 꺼냈다.
우선 수리작업부터 시작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숲의 어둠이 그를 방해했다. 시야가 너무 어두워서 이대로는 섬세한 작업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나무들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서 햇볕이 잘 안 드네....”
망치를 잠시 내려놓은 그리드가 숲을 살피기 시작했다.
온갖 수풀과 나무가 하염없이 자라난 상태였다.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답게 나무와 수풀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방치한 여파다.
“흠....”
빌딩을 세우고 펜트하우스에서 살게 된 이후, 정원에 작은 단풍나무와 감나무, 그리고 매화나무 몇 그루를 심게 된 그리드이다.
소일거리로 가지치기를 해본 그는 숲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한 그루 거목 앞에 선 그가 겉이 헐어있는 나무껍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로 나무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가지치기 정도는 해줘야지. 무분별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서로 얽히고설켜서 기형적인 모양을 갖게 됐잖아. 햇볕을 못 받으니까 뿌리부근에 자란 이끼한테 영양분을 빼앗기고 병충해에도 취약해져서 병 들었고.”
“....?”
갑자기 설교를 시작하는 그리드의 태도에 베니야루와 엘프들이 당황한다.
그녀들은 그리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지치기? 병충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숲을 보다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이 말이지.”
“그게 무슨 궤변이냐? 자연이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야말로 완전해지는 것이다.”
“인간 주제에 아는 척 떠들지 마라!”
엘프들이 반발을 일으킨다.
하지만 정작 베니야루는 달랐다.
그녀는 그리드로부터 옛 친구의 모습을 엿보고 있었다.
‘포비아와 똑같은 말을 하다니....’
인간 부모 아래서 인간의 지식을 배워왔던 포비아의 주장, 모든 엘프들에게 비웃음을 샀었다. 역시 반쪽짜리는 한심하다며 조롱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베니야루였다.
꾸욱....
베니야루가 주먹을 말아 쥔다.
그녀는 그리드를 믿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포비아에 대한 속죄이기도 했다.
하여 청한다.
“당신.... 템빨왕 그리드여.”
“?”
“숲의 관리를 해줄 수 없겠는가?”
“엉?”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는 그리드!
그에게 베니야루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지치기라는 것을 부탁하고 싶다.”
“....!!”
도도하기로 유명한 엘프가 인간에게 고개까지 숙여가면서 부탁을 하다니?
심지어 상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을 해치려던 엘프가 아닌가!
메르세데스의 찢어져라 커진 두 눈이 그리드에게 향한다. 그녀는 그리드의 수완에 감탄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의도하신 거군요!’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식물에 무지한 메르세데스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이 돌아가는 정황 상 그리드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초롱초롱!
메르세데스의 반짝이는 시선을 느낀 그리드가 삐질, 식은땀을 흘린다.
‘아니, 뭐냐....’
<엘프의 숲 가꾸기>
난이도:A
엘프족을 수호하는 12가문의 가주 중 하나인 베니야루가 당신에게 간절히 청합니다.
그녀의 부탁을 받아 숲을 아름답게 가꿔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거목 2,000그루 가지치기(0/2,000)
퀘스트 클리어 보상:엘프족 전체와 호감도 20. 세계수의 잎사귀(20), 세계수의 열매(5).
퀘스트 실패 시:엘프족과의 관계가 적대가 됨.
“....나 정원사 아니야.”
그래, 대장장이다.
근데 왜 정원사나 받아야할 것 같은 퀘스트를 받게 된 걸까?
심지어 그리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장비 제작과 레벨 업을 위해서였다. 나뭇가지를, 그것도 2,000그루나 되는 나무의 가지를 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한 그루 가지 치는 일도 얼마나 힘든데.’
이 퀘스트, 거절해야한다.
그리드의 이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퀘스트 보상이 탐난다는 점이 문제였다.
스틱세이 에피소드에서 알게 됐던 세계수의 잎사귀는 거의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보다 귀해 보이는 세계수의 열매는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 격렬하게 궁금했다. 또한 엘프족 전체와의 호감도도 필시 주요하게 작용할 여지가 컸다.
‘어쩌지?’
퀘스트를 거절하지도, 수락하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그리드.
이내 그의 뇌리로 한 명의 인물이 스쳐지나간다.
‘피아로!’
곡식에 정통한 전설의 농부!
어쩌면 그는, 나무를 비롯한 다른 식물들의 관리에도 일가견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그리드가 즉시 기사 소환을 사용했다.
전설의 농부와 엘프족.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공통점을 지닌 그들이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엘프....인가.”
혹 전하께 위험이라도 닥친 겐가?
근심하며, 즉시 부름에 응한 피아로.
양손에 호미와 낫을 거머쥐고 있는 그와 마주보고 선 엘프들이 킁킁, 냄새를 맡더니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멋진 남성....”
“.....”
피아로의 몸에 배어있는 흙냄새가 엘프들의 여심을 저격하는 것이다.
그리드에게는 천만 다행인 일이었다.
“좋아. 이제부터 나는 갑옷을 만들 테니까 메르세데스는 꿀을 먹어. 그리고 피아로는 엘프들하고 사이좋게 나뭇가지를 치도록.”
그리드의 취급이 잘못 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부하는 부리라고 있는 거니까.
단지, 그리드의 부하가 전설의 농부와 전설의 기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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