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9권 - 4화
게임을 할 때 가장 열 받는 경우가 무엇인지, 우리 모두 함께 생각해보자.
강화에 실패했을 때.
아무리 몹을 잡아도 레벨이 안 오를 때. 죽어서 경험치 떨어졌을 때.
레이드에 실패했을 때. 레이드에 성공했어도 득템 못했을 때.
개고생 해가면서 클리어한 퀘스트 보상이 허접할 때.
내가 선택한 직업이 알고 보니 쓰레기였을 때.
헐값에 팔아넘긴 아이템의 가격이 며칠 뒤에 폭등했을 때.
남이 득템하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늘 우리 곁에 있는 이 게임이라는 문화는, 우리를 즐겁게 해줄 때가 있는 반면 극심한 박탈감과 스트레스를 안겨줄 때도 많은 것이다.
“아....”
플레이어의 정점이 된 그리드 또한 남들과 똑같았다.
게임 덕분에 부와 명예를 거머쥔 그 또한 여전히 게임에서 느끼는 박탈감과 스트레스가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엘프족.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와 단절된 채 살아온 이종족.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던 저 녀석들이 왜, 하필이면 지금.
“...왜 하필 지금 나타나서 백린목 날려먹게 만드는 거냐고!!”
푹-!
푹푹푹!!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내지르는 그리드의 머리와 뺨을 스친 화살들이 휴대용 용광로에 박힌다.
[휴대용 용광로가 타격을 입었습니다.]
[휴대용 용광로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수리가 필요합니다.]
“아오!!”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한 용광로 속에는 여전히 백린목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대륙에서 어렵게 공수해온 나무가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중이다.
‘이제 80개도 안 남았는데!’
원하는 화력을 얻기까지 최소 3~4개의 백린목이 필요했던 점을 감안해 봤을 때, 백린목의 한정적인 수량은 그리드에게 상당한 압박감을 주었다.
양반이라는 위험요소 때문에 함부로 동대륙을 넘나들 수 없게 된 현재 그리드의 입장에서 백린목은 정말로 귀중한 자원이었다.
한데 갑자기 출현한 엘프들 때문에 백린목 4개를 헛되이 날려버린 것이다. 열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예쁘면 다냐!!”
엘프의 나라에서는 김태이랑 김이선이 감자를 캐고 있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기는 했다.
눈앞에 나타난 엘프 중 미인 아닌 엘프가 없었다.
유라, 지슈카, 아이린, 그리고 수애와 메르세데스 등.
당대 최고의 미녀들과 함께하느라 눈이 높아진 그리드가 봤을 때도 엘프들의 미모는 완벽했다. 당장 곁에 있는 메르세데스와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예쁘면 뭐하는가?
어차피 내꺼도 아닌데!
“심지어 가슴도 작은 주제.... 윽!”
푹-!
[8,98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하!!”
“갓 핸드!!”
소리 없이 날아오는 화살이다.
높은 민첩성과 통찰력 덕분에 운 좋게 화살의 궤도를 파악하더라도 그 후가 문제다.
첫 번째 화살 바로 뒤에 딸려오는 애깃살은 아예 인지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거 영화에 나왔던 궁술 같은데.’
큰 화살을 먼저 쏜 후 애깃살을 쏘면, 가볍고 작은 애깃살이 큰 화살의 바로 뒤를 바짝 쫓아 표적을 2중으로 명중시킨다고 했던가?
예부터 궁술은 한반도가 최고라고 하더니, 게임에서도 수준 높은 궁술을 묘사할 때면 결국 한반도식 궁술로 귀결된다.
한국인 플레이어라면 이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법도 했으나.
‘개뿔!’
그리드는 그런 거 없었다.
“파그마의 검무!”
탕-!
타타타탕!!
메르세데스와 갓 핸드의 비호를 받으며 검무를 펼치는 그리드.
푹-!
갓 핸드 틈새로 날아온 화살에 허벅지를 꿰뚫리고 움찔, 걸음을 멈추는 그의 스킬 캐스팅이 취소된다.
파그마의 검무의 치명적인 단점에 발목을 붙잡히는 순간이었다.
‘제길! 화살이 너무 빨라!’
위력과 속도, 그리고 은밀성까지 더해서 모두 최상위다. 엘프들의 궁술은 전설의 궁수 포비아의 데스나이트를 연상시킬 정도였고, 이는 즉 엘프 한 명, 한 명의 솜씨가 랭커급 플레이어 이상이라는 뜻이 됐다.
슈슈슈슈슉!!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는 화살 비.
쩌정-! 쩌저저저저정!!
누적되는 데미지를 견디지 못한 갓 핸드가 경직 상태에 빠진다.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듯한 그리드였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