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65화 (660/1,794)

템빨 39권 - 2화

“제 갑옷 말씀이십니까?”

기사단 창설 이후.

그리드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메르세데스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전하께서 친히 제 갑옷을 만들어 주시겠다고요?”

“응.”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그리드의 태도에 메르세데스는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말도 안 됩니다. 신하를 위해서 노동하는 국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메르세데스 또한 그리드의 근본이 대장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상식을 논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왕이 신하를 위해서 수고를 한단 말인가? 왕의 도량은 왕의 편의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

“재고해 주십시오.”

부탁하는 메르세데스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결국에는 나를 위한 일이야. 네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내가 더 강해지는 셈이잖아.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

메르세데스의 주력 갑옷은 헤비아머다. 가죽 갑옷을 입은 현재 그녀의 능력치는 온전치 못하다고 표현함이 옳았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밭에서 피아로와 호각을 겨뤘다. 정말로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리드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가자. 네 갑옷 말고도 만들어야 할 무구가 많아.”

“…알겠습니다.”

결국, 그리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메르세데스가 깊이 고개 숙이며 답했다.

그리드에 대한 그녀의 호감도가 나날이 오르고 있었다.

***

“네가 이런 시궁창 같은 곳에서 죽게 되면 너희 부모님의 마음이 과연 성할 수 있을까?”

“놈……! 자꾸만 남의 부모님을 언급하지 마라!!”

“네 부모님이 진심으로 가여워서 하는 소리다. 기껏 배 아파 낳은 자식 놈이 범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갇힌 채 생을 마감하게 생겼으니 얼마나 슬프시겠느냐?”

“…….”

라인하르트 지하 감옥에 끔찍한 중범죄자가 갇혀 있었다.

레이도른.

템빨국 건국식 당일 그리드를 암살하려 했던 사상 최악의 범죄자다.

놈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볼 것.

웅변가 랭킹 1위 후로이가 맡은 중책이었고, 후로이의 하루 일과는 레이도른을 심문하는 일로 시작했다.

“부모님이 보고 싶으면 어서 말해! 감히 어떤 엄마 없는 놈이 그리드 전하를 암살하라고 네게 지시한 것이냐!!”

“큭! 큭큭!! 이 멍청한 놈. 도대체 몇 번이나 대답해 줘야 알아듣는 거냐? 내 독단이었다. 그 누구도 내게 지시를 내리지 않았어.”

“일국의 왕을… 그것도 건국식 당일에 암살하려 한 것이 순전히 개인의 독단이었다고? 그 뻔한 거짓말을 과연 누가 믿을까? 너희 부모님도 안 믿을 거다!”

“이 새끼가!!”

애써 여유 있는 모습을 되찾는가 싶던 레이도른이 다시 쌍심지를 켰다.

“자꾸 우리 부모님 이야기 꺼내지 말라니까!!”

“왜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화를 내는 거지? 내가 너희 부모님을 욕하기라도 했나?”

맞다.

후로이는 레이도른의 부모님을 함부로 욕하지 않았다. 그저 자주 언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레이도른은 후로이가 부모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울컥울컥 화가 솟구쳤다.

후로이의 웅변 스킬 <도발>의 힘이다.

후로이는 레이도른의 부모님을 언급할 때마다 도발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굳이 그러는 이유?

후로이의 개인적인 인성과 관련된 것이지, 딱히 특별한 효율이 있어서는 아니다.

“흐음…….”

족쇄에 묶인 채 으르렁거리는 레이도른을 마주 보고 앉은 후로이.

벌써 반년 이상 감옥에 갇힌 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입을 열지 않는 레이도른의 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내가 이 짓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쯧.”

중얼거리며 혀를 차는 후로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레이도른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떤 끔찍한 고문을 준비했기에……?’

꿀꺽.

마른침 삼키는 레이도른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하지만 마음은 더욱더 굳건해진다.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

자신의 정체가 적기사, 그것도 솔로 넘버 나이트라는 사실, 레이도른은 결코 발설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발설할 수가 없었다.

그의 그리드 암살 시도는 순전히 독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위에서는 어떠한 명령도 없었다.

그저 레이도른 개인이 보기에 그리드가 괘씸했고, 훗날 화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암살을 시도했을 뿐이다.

한데 이제 와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가는 괜한 외교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제국에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레이도른이 직접 체험한 그리드의 무력은 제국에도 위협이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내 차라리 죽으리라!’

입을 굳건히 다문 채 다짐하는 레이도른.

두근! 두근!

그의 심장박동 수가 빨라진다.

점점 더 커지는 공포 속에.

“그것을 가져와라.”

후로이가 간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헐레벌떡 뛰어간 간수들이 작은 상자를 들고 왔다.

꿀꺽!

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혹시 눈알을 파내는 도구라도 들은 건 아닐까?

레이도른의 상상력이 부정적인 쪽으로 극대화된다.

급기야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그의 앞에서 후로이가 상자를 개봉했다.

상자 속에는…….

삐약! 삐약!

병아리 한 마리가 있었다.

작고 노란, 귀여운 병아리였다.

“……?”

레이도른이 당황했다.

아니, 모진 고문 도구가 들어 있을 줄 알았던 상자에서 웬 병아리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그의 곁으로 아장아장, 병아리가 기어왔다.

삐약삐약!

작고 검은 눈동자로 레이도른을 올려다보는 병아리.

녀석은 레이도른을 자신의 어미로 착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 모진 고문만 당하다가 오래간만에 귀여운 생물을 마주한 레이도른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뽀송뽀송한 병아리의 털을 만져 보고 싶다는 욕구마저 느꼈다.

그의 귓가로 후로이의 차가운 음성이 꽂힌다.

“급한 일이 생겼다. 내가 이곳을 다시 찾는 일은 아마 한동안 없을 테지. 며칠 동안의 평화를 잘 즐기도록 해라.”

“네놈, 무슨 수작이냐? 이 병아리는 무슨 뜻이지?”

“딱히?”

대답하지 않은 후로이가 간수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삐약삐약!

병아리와 단둘이 된 레이도른은 오래간만에 평화를 느꼈다. 마음이 한없이 따스해졌다.

한편, 감옥을 나선 후로이는 간수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저 병아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째서 저런 사악한 범죄자에게 마음을 치유할 시간을 주시는 겁니까?”

“후우…….”

담배라도 있으면 피우고 싶다.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 후로이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저 병아리가 영계가 되면 잡아먹을 거다.”

“예……?”

“레이도른이 지켜보는 앞에서.”

“…….”

“놈과 깊은 유대를 나눈 영계를……!”

“…….”

“…나는 각종 야채를 넣고 삶아 먹을 거다.”

“그, 그럴 수가……!”

“악마보다 더하십니다!!”

간수들의 오금이 저렸다.

후로이가 계획한 정신 고문 방법이 너무나도 참혹하여 소름이 돋았다.

물론 후로이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를 악마로 만든 건 그놈이다…….”

“아아아…….”

쿠르릉! 쾅쾅!! 하는 천둥소리 효과음만 있었으면 완벽했을 장면이지만, 오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

“어디로 가시는 거죠?”

그리드의 곁을 따르던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대장간으로 향할 줄 알았던 그리드가 성 밖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성 밖에 따로 대장간을 마련해 놓으신 걸까?’

의아해하는 메르세데스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나는 오늘부터 대장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거야.”

그리드는 아이템 하나를 제작할 때마다 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몇 날 며칠 동안 집중력을 유지한 채 작업을 진행했다.

덕분에 결과물이 좋게 뜨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방법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사냥할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 몇 달 동안 그리드의 랭킹은 쭉쭉 떨어진 상태였다. 머잖아 10위권 밖까지 밀려날 수준이었다.

비전투 직업군의 한계다.

오로지 사냥에만 열중할 수 있는 전투 특화 직업군과 달리, 대장일을 겸해야만 하는 그리드에게는 레벨 업에 치중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이에 대해서 그리드는 고심해 봤다.

그리고 떠올린 것이 바로 휴대용 용광로다.

백린목 덕분에 언제, 어디서도 원하는 화력을 얻을 수 있게 된 용광로.

“앞으로 나는 사냥터에서 아이템을 제작하겠다.”

과거에도 도전해 보기는 했다.

사냥터 한복판에서 아이템을 제작하고 노에와 랜디, 그리고 갓 핸드에게 사냥을 시켜서 아이템 제작과 경험치 획득을 동시에 노렸었다.

하지만 썩 효과적이지 못했다.

당시에는 백린목이라는 장작이 없어서 휴대용 용광로가 발휘할 수 있는 화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준 낮은 아이템밖에 제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씨익!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지도를 펼쳤다.

그의 목적지는 크라우젤이 알려 준 새로운 사냥터였다.

결계의 숲.

알 수 없는 결계 탓에 깊은 곳까지는 출입이 불가능한 숲이라고 한다.

“유난히 달콤한 과일 향이 맴도는 숲이라는데…….”

그곳에서 ‘메디아산 토종꿀’을 꺼내 놓으면 <베어울프>라는 이름의 몬스터가 출몰한다고 한다.

무척 강력하고 체력이 높아 사냥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거의 필드 보스급의 경험치를 뱉는 녀석이라고 크라우젤이 일러 주었다.

“믿을 만한 정보인가요? 그 크라우젤이라는 자는 베어울프 소환 방법을 어떻게 알아낸 거죠?”

“휴식 중에 빵에 꿀 발라 먹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더라고.”

앞으로도 한동안 혼자서 독식할 수 있었던 그 귀중한 정보를, 크라우젤은 그리드에게 백호검에 대한 보답으로 넘겨준 것이다.

“하여튼 착한 친구라니까.”

크라우젤을 생각할 때면 늘 뿌듯해지는 그리드였다.

인자한 미소를 그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메르세데스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베어울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곰의 파괴력과 늑대의 민첩성을 겸비한 몬스터죠. 전하께서 예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할 겁니다.”

그런 녀석을 갑옷 만들면서 사냥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확신하며 걱정하는 메르세데스에게 그리드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곁에는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경험치가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베어울프를 전하께서 직접 사냥하시지 않고 제가 사냥하게 되면 전하께서는 성장하실 수 없을 텐데요?”

“아니, 네가 사냥하지는 말고. 양념만 해 줘.”

“양념… 말씀이십니까?”

왜 갑자기 요리 용어가?

이해하지 못하는 메르세데스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베어울프가 나타나면 네가 일단 녀석을 실컷 두드려 패. 그럼 녀석이 화가 나서 너만 노릴 거 아니야?”

“네, 그렇겠죠.”

“그때부터 넌 탱킹만 하는 거야. 네가 견디는 동안 내 펫들과 갓 핸드, 그리고 템빨골들이 녀석을 마무리하는 거지. 그럼 난 가만히 앉아서 갑옷을 제작하고 있어도 저절로 경험치를 얻을 수 있어. 펫들과 템빨골들도 성장할 거고.”

“알겠습니다. 이해했어요.”

힘차게 대답하는 메르세데스.

현 시점 최강의 인물인 그녀가 첫 번째로 맡게 된 임무는 어뷰징이었다.

전설의 기사가 버스 기사가 된 것이다.

그녀가 운전하는 버스의 탑승객은 오로지 그리드 한 사람이었다.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