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8권 - 22화
제국을 지탱한다고 하여 ‘기둥’이라 칭송받는 자들.
당대에는 무려 다섯이나 됐지만, 사실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국인들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보여준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당대의 기둥들은 단지 강한 무력만을 위시할 뿐, 어떤 특별한 위업은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뭐, 황제의 곁을 지킴으로써 황권을 강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제국의 균형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점은 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다.
반면 전대 기둥이었던 피아로와 아스모펠은 어떤가?
그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적군을 쓰러뜨렸고, 셀 수 없이 많은 백성을 지켰다. 평소의 행실이 백성들과 귀족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제국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구원하였고, 급기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제국신민들의 용기가 되었다.
그처럼 대단한 인물이.
“.....농부라니.”
농담하지 말라.
메르세데스는 이처럼 짧은 한 마디를, 그 간절한 바람을, 희망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녀의 혜안이 일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새로운 논밭을 만들어버린 피아로의 농력(農力).
그 어떤 속임수도 아닌 진짜라는 사실을 말이다.
“왜....”
꾸욱!
떨리는 입술을 깨무는 메르세데스의 낯빛이 창백하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악몽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이다.
끔찍한.
“왜 하필 농부인 거죠?”
농부라는 직업은 천민의 전유물이다.
백성들을 아끼고 보살펴온 메르세데스라고는 하나, 결국 그녀 또한 귀족인 바.
그녀는 사람에게도, 직업에도 귀천이 있다고 배워왔고 당연히 그렇게 인식했다.
누구보다 고귀한. 자신이 철이 들기도 전부터 동경해온 피아로가 천한 농부가 된 것을 그녀는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피아로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피아로 또한 귀족 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피아로는 깨달은 상태다.
“검호보다 농부가 더 좋았으니까.”
촤르륵.
쇠스랑을 거둔 피아로가 도리깨를 꺼내 쥐었다. 곡식을 탈곡할 때나 쓰는 천한 도구였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네. 만약, 굳이 귀천을 논해야한다면 검호보다, 혹은 검성보다 농부가 훨씬 더 고귀하지. 농부가 없으면 일용할 식량도 없네. 맛있는 음식도 없어. 인류가 이만큼 발전할 수도, 이만큼 행복했을 수도 없지.”
“.....”
사냥꾼이 없으면 고기를 먹을 수도, 가죽을 얻을 수도 없다는 궤변이나 다름이 없다.
피아로의 극단적인 발언으로부터 거부감을 느낀 메르세데스는 의무감을 느꼈다.
지난 12년.
지옥 같은 삶을 살아온 여파로 ‘망가진’ 피아로가 이성을 되찾을 수 있게끔 도와야한다는 의무감이었다.
“문답무용이 필요한 시점이로군요.”
촤아아아악!!
넝마가 되었던 은빛의 날개가 다시 찬란하게 빛난다.
쿠오오오오오-!
메르세데스의 두 자루 검이 백열하기 시작했다.
눈이 부시다 못해 아플 지경으로 새하얀 광채가 밤의 어둠은 물론이고 달빛까지 집어삼킨다.
“피아로! 정신 차리시기를!”
츠카카칵!!
메르세데스의 공격이 종전과 비할 바 없이 매서웠다.
은하수처럼 수놓이는 백광의 공격이 피아로의 몸에 수많은 상처를 만들어냈다.
흙투성이의 얇은 천 옷을 걸치고 있을 뿐인 피아로는 메르세데스의 날카로운 공격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터엉-!
메르세데스가 무기를 스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베고, 거리를 벌려 반격을 피한 후 단궁을 쏘는 식으로 그녀는 피아로가 쉴 틈도 주지 않고 피해를 누적시켰다.
물론 피아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급성장을 이용, 식물의 장벽을 만들어 원거리 공격을 원천 차단한 그가 추수에 돌입했다.
쌀과 밀, 그리고 감자와 배추가 허공에 나부낀다.
“....!”
메르세데스가 몸을 움츠렸다.
곡식들과 채소들이 또 갑자기 폭발할까봐 위축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폭발이 없었다.
그녀의 몸을 강타하는 것은 도리깨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