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8권 - 21화
푹! 푹푹!!
달빛을 등지고 앉은 피아로가 열심히 호미질 중이다.
뱀파이어 도시에서 놀이라는 실험체.... 아니, 동료의 도움을 받아서 개발한 ‘피 감자’를 심으려면 오늘처럼 만월이 뜬 밤이 적합했다.
“역시 밭일은 즐겁구나.”
매번 느끼지만 운동량이 장난 아니다. 단단한 땅을 파고, 그 안에 씨앗을 심고, 다시 흙을 덮고. 이 일련의 작업을 반복하면 할수록 근육이 효율적으로 단련됐고 체력이 크게 붙는다.
“맑은 공기 덕분에 건강을 챙기기도 좋아.”
폐부 깊숙이 빨려 들어오는 밤의 맑은 공기가 상쾌하다. 과장 좀 보태자면,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수명이 하루씩 연장 되는 기분이다.
뱀파이어의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뱀파이어의 도시는 지하 아래 위치했기 때문에 공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고, 햇볕도 들지 않아 장기간 체류는 고역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다시 가야지....”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다.
놀의 피는 어마어마한 영양분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사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놀의 도움을 받으면 지금 심고 있는 피 감자처럼 새로운 품종을 개량할 수도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그리드 전하께서 원하시는 황금 호두 재배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었다.
‘내일 당장 전하께 인사를 올리고 떠나야겠어.’
한동안 뱀파이어의 도시에 체류하던 피아로가 라인하르트에 돌아온 이유는 그리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제국으로 떠난 그리드의 부름을 언제라도 받들 수 있게끔 그는 라인하르트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대기했다.
하지만 오늘, 그리드가 무사히 귀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피아로 입장에서는 더 이상 라인하르트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고 싶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 지금 찾아뵙는 것은 실례다.
최근 피 감자를 심느라 밤낮이 바뀐 탓에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음?”
빨리 아침이 밝아오면 좋겠구나, 생각하며 밭일에 열중하던 피아로가 손을 멈췄다.
수백 미터 거리 바깥의 대기가 격동하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찌르르. 찌르르레레.
“.....”
여전히 밤의 적막은 계속되고 있었다. 고요한 논밭에 울리는 소리라고는 밤찌르래미들의 울음소리가 전부다.
하지만 피아로는 확실하게 느꼈다.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다.
착각?
아니다.
태양과 땅, 그리고 물과 바람의 힘을 빌려서 농사일을 해온 피아로는 대자연과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룬 바, 그의 예민한 감각은 대기의 변화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그 자리에!”
역시나.
저 멀리서 웬 여성의 외침이 들려왔다. 발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달려오기에 은밀하게 접근하려는 의도인 줄 알았으나, 큰 소리 치는 것을 보아 그런 의도는 아닌 듯하다.
‘무의식중에 기척을 감추는 경지라....’
상당한 고수다.
피아로가 감탄함과 동시에.
“멈추세요!!
여성의 외침이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허?”
피아로가 깜짝 놀랐다.
여성의 이동속도가 본인의 자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지금에서야 수십 미터 밖, 그녀가 지나온 자리의 대기가 진동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거 의외의 손님이로군.”
여성의 얼굴을 확인한 피아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피, 피아로 님?!”
땅굴범(?)의 정체를 뒤늦게 파악한 메르세데스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고작 한 달 못 본 사이에 큰 성장을 이루었구나!”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단련한 것인가!
흥분해서 소리치는 피아로의 호승심이 불타오른다. 그는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메르세데스가 있는가, 하는 사소한(?) 의문은 품지 않았다.
강자와의 결투를 꿈꾸며 호미를 휘두를 뿐이다.
“무슨....!”
메르세데스가 당황했다.
옛 영웅과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재회한 것으로 모자라서, 기쁨은커녕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다짜고짜 공격을 당하다니? 그것도 또 호미로!
쩌정-!
칼을 들어 방어하는 메르세데스의 손끝이 찌릿찌릿 저린다.
‘전과 비교가 안 돼?’
약 한 달 전, 명령을 받아 그리드를 습격했던 그날.
메르세데스는 이미 피아로의 전투력을 체감했다.
검이 아닌 호미와 낫을 휘두르는 그의 공격력은 놀랍게도 자신과 막상막하였다.
하지만 이제 메르세데스는 전설로 승격했다. 피아로가 진심전력이 되어서 검을 뽑아 쥐지 않는 이상, 메르세데스는 피아로의 호미질쯤 가볍게 압도해야 정상이었다.
한데 불가능했다.
왜?
이곳이 논밭이기 때문이다.
논밭은 피아로의 필드였다.
대자연의 기운이 피아로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
지옥에서 강력해지는 데빌슬레이어 유라와 똑같은 이치였다.
대장간에서 싸운다고 해서 딱히 강해지지 않는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밖에 없던 부분이다.
쩌정!
쩌저저저정!!
“큭....!”
호미의 짧은 리치를 적극적으로 활용, 신속한 단타를 연속적으로 날리는 피아로의 공격력은 한 달 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위협적이었다.
빠르고 강력하여 메르세데스는 방어하기 급급했다.
“역시 피아로 님....! 그 짧은 시간 동안 더욱 더 강해지셨군요!”
이제는 전설이 된 나를 여전히 농기구로 농락할 줄이야!
감탄하는 동시에 자괴감을 느끼는 메르세데스 또한 피아로가 자신을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았다.
강자에게 집착하는 피아로의 성향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쩌엉!!
한 자루의 검을 더 꺼낸 메르세데스.
피아로의 호미를 방어함과 동시에 반격한 그녀가 소리친다.
“드디어 검성의 경지를 눈앞에 두신 겁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드리죠!”
옛 영웅께서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실 수 있도록, 나 또한 전심전력으로 결투에 응하리라.
쿠와아아아아앙-!
은빛의 검기가 메르세데스의 등 뒤로 분출됐다.
천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날개의 형상을 갖춘 검기였다.
은익이다.
날개를 펼친 메르세데스는 모든 능력치가 큰 폭으로 상승할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비행까지 가능했다. 또한, 날개 주변으로 끊임없이 검기를 방출함으로써 적으로 인식한 대상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입혔다.
콰자자작!!
종전과 비할 바 없이 큰 힘이 실린 메르세데스의 일검과 피아로의 호미가 충돌하자.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풍처럼 강렬한 기파가 발생하며 일대의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휘몰아치는 곡식들 사이로.
“이제 저는 당신의 기억 속 어린 소녀가 아닙니다. 그만 검을 드세요.”
메르세데스가 종용했다.
하지만 피어로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호미를 거두고 검을 뽑기는커녕 낫을 꺼내더니 이제는 호미와 낫으로 반격을 날렸다.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굳는다.
“....후회하셔도 저는 모릅니다.”
메르세데스는 자신이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피아로에게 주지시켜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단지 인정받고 싶다는 치기가 아니다.
앞으로 함께하게 될 동료에게 자신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었기에.
“명예의 검.”
쩌정-!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정!!
놀라운 신기가 펼쳐졌다.
메르세데스의 두 자루 검이 오로지 한 점만을 찌르고 들어갔다.
날개를 펄럭이며 돌진, 피아로를 뒷걸음치게 만드는 그녀의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공격이 피아로에게 방어를 강요한다.
‘허!’
보통 사람은 눈으로 쫓지도 못할 찌르기를 방어하는 피아로의 두 눈에 이채가 실린다.
그리드 전하께서 직접 제작해준 호미와 낫.
무려 대악마 벨리알의 부산물로 제작 된 그것들의 표면에 미세하나마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호미와 낫의 품질이 떨어져서도, 메르세데스의 두 자루 검이 그리드의 작품보다 명작이여서도 아니었다.
단지 농기구의 한계다.
제작함에 있어서 일반적인 병장기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의 금속이 들어가는 농기구는 태생적으로 내구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메르세데스는 그 부분을 이미 간파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공략당할 줄은 몰랐군.’
과연 놀라운 혜안이다.
감탄한 피아로가 교차시켜놓고 있는 호미와 낫을 비틀었다.
그러자.
까가강-!
“....!”
때마침 피아로의 호미와 충돌하던 메르세데스의 검이 옆으로 빗겨나갔다.
피아로는 이로써 메르세데스의 보폭이 꼬이고 균형을 잃을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쩌저정-!
“허!”
초월적인 운동신경을 이용한 메르세데스는 균형을 유지했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검을 따라서 기울어진 상체를 그대로 회전시키며 반대편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공격에 피아로의 가슴이 살짝 베였다.
“이제 그만 검을 드세요. 부탁입니다.”
“이 호미와 낫이야말로 내 최고의 병기이거늘, 내가 왜 검을 들어야하는가?”
“끝까지 고집을....!”
지난 12년.
피아로는 끔찍한 고통을 견디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아집을 갖게 된 게 아닐까?
메르세데스는 의문을 품었고, 이내 확신했다.
‘분명해. 피아로 님께서는 도리어 퇴보하신 거야.’
하긴, 어찌 진보할 수 있었겠는가.
단지 견디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을 삶을 살아온 그가 심신을 단련할 여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피아로의 사고가 편협해지고 이에 따라서 시야가 좁아졌다고 판단한 메르세데스.
“기사의 결의.”
은빛의 검기를 가슴에 품는다.
그녀의 몸과 마음이 더욱 더 강인해졌다.
그녀는 의무를 느끼고 있었다.
피아로에게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뼈아픈 현실을 상기시키고 더욱 더 발전할 계기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의무였다.
‘피아로 님께서는 반드시 검성이 되셔야하니까.’
크라우젤이라던가?
듣도 보도 못한 자가 어느 날 갑자기 검성이라고 칭송 받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바꿔 놔야한다.
메르세데스가 결의를 다지는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