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8권 - 20화
전설의 기사의 탄생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새로운 전설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그녀의 파급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앞으로 Satisfy의 판도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등.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이 심도 깊은 분석 방송을 내놓았고, 이 방송들은 모두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새로운 전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뜨겁다는 증거였다.
한편 템빨단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템빨단원들이 내부적으로 토론한 결과, 전설의 기사는 제국에서 탄생했을 가능성이 무척 높았기 때문이다.
대륙 최고의 기사들이 모인 적기사단.
그중에서도 첫 번째 기사이며 여성인 메르세데스가 전설이 되었으리라.
비교적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템빨단원들은 난처함을 느꼈다.
메르세데스가 누군가?
그리드와 처음 대면하였을 당시, 그리드를 자신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던 강경한 인물이다. 더욱더 강력한 힘을 손에 쥐게 된 그녀가 앞으로 템빨국을 어디까지 압박하게 될지, 템빨단원들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한데 바로 이 타이밍에.
“모두 인사해. 앞으로 우리와 함께하게 될 전설의 기사다.”
그리드가 메르세데스를 동료랍시고 데려온 것이다.
“……????”
“…실화냐.”
템빨단원들이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드가 NPC들과의 호감도를 쉽게 쌓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전설이라는 대어를 낚아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특히 메르세데스는 제국의 기사가 아닌가?
흔들림 없는 충성심으로 유명한 그녀를 그리드는 대체 무슨 수로 꿰어 온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납득이 안 된다.
짝! 짝짝!
침묵 속에서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반트너가 자신의 대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는 소리였다.
잠시 후.
마치 삶은 문어처럼 붉게 달아오른 대머리를 긁적인 반트너가 중얼거렸다.
“꿈이 아닌데?”
맞다.
현실이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던 모두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말이지.”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까.
설명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생각을 정리하는 그리드가 잠시 뜸을 들이는 그때였다.
“전하, 소개가 잘못되었습니다.”
입을 연 메르세데스가 그리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는 전설의 기사이기에 앞서서 당신의 기사입니다.”
옛 영웅들과 함께 영원히 당신을 섬기리라.
찬란한 태양 아래 서약하는 메르세데스의 고귀한 모습이 모두에게 전율을 선사한다.
그리드에게는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를 가신으로 영입하였습니다. 그녀가 소속된 도시의 성벽 내구력이 50퍼센트 상승하고, 공성 병기의 위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공성전 진입 시에는 그녀와 같은 소속의 기사와 병사들의 공격력과 방어력, 그리고 생명력 최대치가 10퍼센트씩 상승합니다.]
***
메르세데스와 피아로의 과거.
대악마 아스타로트의 출현과 메르세데스의 위기.
메르세데스를 구원한 그리드와 아스타로트 레이드.
그리드에게 일련의 과정을 설명받은 템빨단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데요?”
“맞아. 황제가 메르세데스를 놓아준 이유가 설명 안 되잖아? 커다란 공을 세우고 전설로 승격한 메르세데스를 황제가 놓아준 이유가 뭔데?”
“수상하다, 수상해.”
“혹시 황제는 그녀를 세작으로 보낸 거 아닐까요?”
“아.”
분위기가 소란스럽다.
자신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리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오는 길에 메르세데스에게 들은 이야긴데.”
그리드가 다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제와 피아로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드디어 분위기가 진정됐다.
“그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군요…….”
“황제는 피아로 님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 일에 대한 속죄로써 메르세데스를 보낸 거였군.”
“응.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벗어 내고 싶었나 봐. 피아로의 말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진심일 테고.”
“…대륙 최고의 권력자라고 해도 결국에는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네. 쩝! 괜히 찝찝해지는구만.”
사하란 제국은 템빨국의 주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황제에게 적의를 불태워 왔던 템빨단원들의 기세가 단박에 꺾였다. 황제 또한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니 왠지 모를 정감마저 느꼈다. 본인의 속죄를 위해서라지만, 뻔히 적이 될 템빨국에 메르세데스를 보낸 의리에 감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드가 경고했다.
“정신들 똑바로 차려. 메르세데스를 보냄으로써 황제는 속죄를 끝냈어. 마음의 그늘을 거둔 그는 이전보다 더 큰 난적이 될 거야.”
그리드는 황제를 직접 대면해 봤기 때문에 알고 있다.
황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개인일 때의 쥬앙데르크와 황제일 때의 쥬앙데르크는 엄연히 달랐다.
라우엘이 추측했다.
“이제 당분간 황제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겠군요.”
샹들리에 사건과 대악마 사건이 연달아 터진 제국은 교통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리 과정에서 번지게 될 파벌 다툼이 피바람을 불러올 터였다.
라우엘이 제안했다.
“이 틈에 우리도 전력을 재정비하도록 하죠.”
그리드의 복수극은 일단락됐다.
황궁을 떠난 임모탈의 행방을 다시 찾아내기까지 그리드에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메르세데스를 단장으로 삼은 새로운 기사단을 창설하는 한편 템빨단원들의 아이템을 새롭게 제작해 주는 일이었다.
국가대항전에서 메달을 획득한 템빨단원들이 한둘이 아닌 지금, 템빨국은 급격한 전력 발전을 노려볼 수 있었다.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시작해 볼까.”
개노가다를…….
그리드는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의지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
“피로하시지는 않습니까?”
대전 앞.
회의를 끝내고 나온 그리드를 메르세데스가 맞이했다.
그리드는 외모의 힘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긴 여정에 지친 몸과 마음이 메르세데스의 아름다운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속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들떴다.
“덕분에 조금 더 일해도 되겠는데?”
“……?”
말뜻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저도 모르게 웃은 그리드가 메르세데스의 상세 정보를 불러왔다.
이름:메르세데스
나이:27세 성별:여
직업:전설의 기사
*모든 종류의 무기와 방어구를 제약 없이 착용할 수 있습니다. 단, 마법 무기는 제외됩니다.
*방패와 헤비아머 장착 시 숨겨진 기능을 이끌어 냅니다.
*자신만의 기사도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창조 횟수는 <완전한 웨폰 마스터리> 스킬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추가됩니다.
칭호:혜안의 주인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봅니다.
*정신계 마법과 모든 종류의 함정을 무력화시킵니다. 대상의 스킬과 능력치를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이때 대상의 방어력과 공격력을 최대 30퍼센트까지 하락시킵니다.
칭호:전설이 된 자
…….
칭호:귀감이 되는 자
*통솔하는 기사와 병사들의 성장 속도를 30퍼센트 상승시키며 충성도를 최대치로 유지시킵니다.
*전쟁에서 보직을 <장군>으로 임명 시 아군의 사기가 쉽게 저하되지 않습니다. 명령 전달 속도가 50퍼센트 상승합니다.
레벨:457
근력:3,231 체력:2,588
민첩:2,910 지력:1,530
통솔력:2,512
스킬:[제국 병법(A+)] [베인츠식 검술(S)] [전쟁을 읽는 눈(SS)] [숭고한 용맹(SS)] [기사의 결의(SS)] [방패 막기(SS)] [완전한 웨폰 마스터리(???)] [불완전한 예지(???)] [고귀한 기사도(???)] [은익(???)]
사하란 제국의 명문 무가 혈통으로 독보적인 혜안을 지녔습니다. 발전을 거듭할수록, 그녀의 혜안은 미래를 예지하는 수준까지 성장할 것입니다.
*현재 이 인물은 플레이어 <그리드>에게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리드>를 제외한 플레이어는 호감도를 쌓을 수 없습니다.
최강.
이외에 그녀를 표현할 단어가 또 있을까?
그리드가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메르세데스와 호감도를 쌓을 수 있는 플레이어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하다는 점에 있었다.
최고의 여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왕도는 둘러봤어?”
“네. 천국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천국?”
“불행을 모르는 사람들만 모인 도시 같아요. 최하층민들 사이에서도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더군요. 피아로 님과 아스모펠 님이 계시는 도시답게 성벽과 군사 도구의 방비 또한 완벽하고요.”
풍요롭고 안전한 도시.
메르세데스가 라인하르트를 보고 느낀 감상이다.
수개월 전, 적이었던 그리드에게 황명을 전달하고자 찾았을 때도 감상은 같았다.
대륙 곳곳으로 출정을 다녔던 메르세데스는 여태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도시를 방문해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라인하르트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도시였다.
“그렇게 말해 주니 뿌듯하네. 피아로는 만났고?”
“아니요. 도시 내에 있는 모든 군사시설을 뒤져 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시더군요. 외출 중이신 듯합니다.”
“군사시설? 피아로를 왜 거기서 찾아?”
“……?”
“아…….”
논밭에서 찾아야지, 라는 말을 이으려던 그리드가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자신 또한 피아로를 농부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는 서글펐다.
‘원래는 군사시설에 있어야 정상인 사람이었지…….’
검호 시절의 피아로를 떠올리면 여전히 아쉽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강하기는 하지만.’
피아로의 절구질과 필멸은 대악마조차도 멸했던 필승의 카드다. 특히 자연과 하나가 되는 <자연경>을 사용했을 때 그가 발휘하는 파괴력은 초월적이었다. 피아로는 지금도 충분히 강했고, 지존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 것은, 피아로의 주력 스킬 중 태반이 농업 관련 스킬로 분배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그 생산 스킬 전부가 전투 관련으로 특화되었다면 피아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했을 것이다.
“전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메르세데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에 물든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그리드의 무거워진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미소 지은 그리드가 메르세데스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피아로를 만나러 가자.”
움찔, 경기를 일으키는 메르세데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리드는 눈치채지 못했다.
***
“이곳에 피아로 님이 계신다고요?”
그리드의 손에 이끌려서 논밭에 도착한 메르세데스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당대 최초로 검호의 경지를 이룩했던 인물.
이제 슬슬 검성의 경지를 엿보고 있을 그가 어째서 논밭에 있단 말인가? 24시간 동안 검술만 연마해도 시간이 모자라다고 느낄 그가, 왜?
‘…피아로 님께도 휴식이 필요할 때가 있는 거겠지.’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밤하늘을 가득 메운 거대한 보름달이 오늘따라 크다.
백광으로 물든 논밭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찌르르, 찌르찌르.
밤찌르래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리드의 곁을 따라 걷는 메르세데스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요한 논밭 위에 뒷짐 지고 선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피아로의 뒷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는 모습조차도 고귀하고 위엄이 넘치는 옛 영웅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푹! 푹푹!!
“……?”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논밭을 가로지르던 메르세데스가 자리에 멈춰 섰다.
어디선가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직 땅 파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메르세데스와 그리드의 격차를 알려 주는 대목이다.
“전하.”
소리 없이 검을 뽑아 쥔 메르세데스가 그리드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수상한 소리가 납니다. 땅굴을 파서 왕도로 침입하려는 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
“땅굴?”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답게 북한 공작원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 또한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자 그의 귀에도 땅 파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이 소리가 익숙했다.
호미질 소리다.
하지만 귀족 출신답게 농사에 무지한 메르세데스에게는 생소한 소리였다.
“제게 맡겨 주세요. 적들을 제압하고 누가 시킨 짓인지 알아 오겠습니다.”
“아니, 잠……!”
잠깐이라는 짧은 단어를 외칠 새도 없었다.
은빛의 검기를 몸에 두른 메르세데스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앙-!!
비행에 가까운 돌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수십 미터를 도약해서 날아가는 메르세데스와 그리드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내.
쿠와아아아아앙!!
저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손부터 나가는 성격이었어?”
메르세데스와 연애하거나 결혼하게 될 남자가 불쌍해지는 그리드였다. 그 남자가 자신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콰쾅! 쿠콰콰쾅!!
천둥 같은 폭음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린다. 이어서 휘몰아치는 풍압이 논밭에 가득 선 밀을 바닥까지 짓눌러 버렸다.
그리드는 슬슬 초조해졌다.
“왜 계속 싸우는 거지?”
설마.
“피아로 이 인간이 또!”
성장한 메르세데스를 보고 호승심을 억누르지 못한 게 분명하다.
당황한 그리드가 전투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 대결을 원치 않았다.
피아로가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드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피아로의 진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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