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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44화 (639/1,794)

템빨 38권 - 8화

저 멀리, 성문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자, 잠시만요!”

그리드에게 이끌려 달리던 메르세데스가 걸음을 멈췄다. 성문을 지키고 선 병사들의 눈치를 살핀 그녀가 그리드의 손을 조심스럽게 뿌리쳤다.

희고 고운 얼굴에 짙은 홍조를 드리운 채, 손끝에 남은 여운을 가슴에 묻는다.

“왜? 무슨 일인데?”

“어디까지 데려가실 작정이세요?”

“그야 당연히 제국 밖이지.”

“뭐라고요? 제가 떠날 리 없잖아요?”

“뭐?”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규라탄이라고 했던가? 아까 그놈의 태도를 보니까 제국에서 한자리 거하게 차지하고 있는 놈 같던데?”

그리드는 눈치채고 있었다.

제국은 규라탄의 정체를 모른다. 마족은 인류 공통의 숙적인바, 규라탄이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도 제국이 방관했을 리 없다. 메르세데스가 위기에 빠졌던 이유 또한 허점을 찔렸기 때문이리라.

“놈은 너에게 배신자 운운하던데 말이지. 너, 상당히 위험한 상태 아니야? 자칫하다가는 과거의 피아로처럼 누명을 뒤집어쓰고 큰 화를 입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저는 규라탄의 정체를 모두에게 알릴 의무가 있어요.”

“사람들이 너의 말을 믿어 줄까?”

나름 생각해 보고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메르세데스가 쓴 미소로 답했다.

“아무도 믿지 않겠죠.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규라탄이 네 번째 기사를 계승한 시점은 대략 15년 전이다. 그는 지금까지 긴 세월 동안을 완벽한 인간으로 살아왔다.

혜안을 지닌 메르세데스도, 이름난 대마법사들과 성직자들조차도, 지난 15년 동안 규라탄의 실체가 악마라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다.

규라탄이 마기를 숨기는 능력은 비범함, 탁월함을 넘어서 비상식의 영역이었다. 대악마의 권능이 아닐까 싶다. 비록 약화된 권능일지라도, 한낱 인간을 조롱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힘인 것이다.

“하지만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날이 올 때까지 저의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그게 저의 의무이기도 하고요.”

정체불명의 악마가 제국을 혼돈에 빠뜨리려 하고 있는 지금, 수호의 상징인 첫 번째 기사는 반드시 그를 저지해야만 했다. 이는 숭고한 사명이다. 결코 외면할 수 없으며, 외면하고 싶지도 않다.

결의에 찬 표정을 짓는 메르세데스에게 그리드는 영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규라탄 그 자식이 오늘 너와 내가 함께했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알리기라도 했다가는…….”

네가 기다리는 때가 오기도 전에 너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라는 뒷말을 애써 삼키는 그리드에게 메르세데스가 싱그러운 미소를 그려 주었다. 햇살보다 눈부신 미소였다.

‘이렇게 웃을 수도 있었나?’

고귀하기만 하던 기사가 이성으로 보인다.

그녀의 미모에 새삼 감탄한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의 반응을 보고 덩달아 의식하게 된 것인지,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힌 메르세데스가 그리드의 시선을 회피하며 설명했다.

“부정해야죠. 제가 규라탄을 악마라고 주장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듯이, 규라탄이 제게 뒤집어씌우는 죄목 또한 사람들은 믿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제가 이대로 도망치면 부정할 기회조차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남아야 해요.”

“최악의 경우에는 규라탄이 너를 직접 공격할 수도 있잖아? 오늘처럼 말이야. 그때는 어쩔 거지? 그때도 내가 도와줄 수는 없다고.”

“전하께서는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메르세데스의 맑은 눈동자에 빛이 서린다.

제국 제일 기사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눈빛이다. 처음 만났던 그날, 그리드를 무릎 꿇렸던 최강의 기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오늘은 여러모로 사정이 나빴지만, 다음에 또 그와 싸우게 된다면 제 한 몸쯤 충분히 건사할 수 있어요.”

근신 기간이었던 탓에 갑옷조차 챙기지 못했고, 규라탄을 검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마법을 허용하고 말았다.

애초에 사기도 최악이었다.

누구를 믿고 의심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저택에 갇힌 그녀는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규라탄이라는 명백한 적을 알았고, 어쩌면 의지해도 좋을 사람을 얻었다.

눈앞의 안개가 걷힌다.

“템빨왕 전하.”

“응.”

“걱정 마세요. 전하께서 소중히 아끼시는 피아로 님의 억울한 불명예, 제가 약속한 대로 반드시 씻어 낼 테니까요.”

“…그래.”

그리드는 피아로의 과거와 아픔을 잘 안다. 그가 반드시 오명을 벗어 내고 어두운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길 바랐다.

또한.

“너도 무사해야 된다.”

메르세데스도 원했다.

그리드에게는 강력한 힘이, 인재가 필요했고, 그녀는 그리드가 바라는 인물상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였다.

얼음처럼 굳어 버린 메르세데스가 잠시 잠자코 있더니 묻는다.

“…제가 마음에 드시는 건가요?”

힘겹게 꺼내는 질문.

그리드가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탐나. 매일 밤 떠올릴 만큼.”

너처럼 고귀한 기사를 탐내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너의 가치를 가장 잘 안다.

그리드의 말은 이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메르세데스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귀까지 붉게 물들인 그녀는 그리드와 도무지 시선을 마주치질 못했다.

“너무 적극적이시네요. 누구에게나 그러시나요?”

본래부터 여성 편력이 심한 것이냐는 내용의 질문이었다.

그리드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아니, 아무에게나 이러지 않아. 나도 도리라는 걸 안다고. 하지만 어쩌겠어? 네가 너무 특별한 것을.”

이미 제국의 기사라는 걸 알지만 반드시 나의 기사로 만들고 싶다.

그리드의 이 간절한 마음, 왜곡되어 전달된다.

“그, 그런가요.”

메르세데스는 그리드의 능글거리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 남자, 보통내기가 아니야.’

필시 희대의 난봉꾼이다. 매일같이 여자를 울리고 다닐 사람 같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피아로 님과 아스모펠 님을 거두어 준 은인이며, 전대 적기사단의 오명을 씻어 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은인이고, 또 내 생명의 은인인 그가 나쁘게 보일 리 만무한 것이다.

하나.

“어째서 지금과 같은 시국에 당신이 타이탄에 계시는 것인지, 굳이 이유를 여쭤보지 않을게요. 은인에 대한 예우로써 의문 자체를 품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 마음을 흔드는 일이라면 그만해 주세요. 어차피 우리는 이뤄질 수 없잖아요.”

제국의 기사인 내가 타국의 왕과 혼인한다?

제국을 버리는 셈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메르세데스가 씁쓸한 미소를 그리는 그때였다.

덥석!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메르세데스의 손목을 붙잡은 그리드가 선언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피아로와 재회했던 그날, 네 입으로 분명히 말했었지? 너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죗값을 치르겠다고 말이야. 약속은 지켜야지 않겠어?”

“…연인도 부인도 아니고, 노예를 원하셨던 건가요.”

“응?”

“저질이시네요.”

“……??”

대체 뭘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당황하던 그리드가 이내 아차 싶었다. 본인의 손재주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뒤늦게 떠올린 그가 메르세데스의 손목을 뿌리쳐 보지만 이미 늦었다.

“처, 처녀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훑다니, 너무 과도한 희롱이세요.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죗값을 대가로 제게 그렇고 그런 것들을 바라시는 건가요?”

“…….”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얻게 된 이벤트가 고작 변태로 오해받는 거였다니?

당황하고 실망하는 그리드에게.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의미심장하게 말한 메르세데스가 자신의 가녀린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드레스 차림인 그녀의 쇄골에 시선이 고정된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지만, 그가 생각하는 그런 전개는 없었다.

메르세데스는 본인이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풀었을 뿐이고, 그것을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백은으로 만든 펜던트였다. 한 떨기 장미 문양이 고상하다.

“이건……?”

“우리 가문의 증표예요. 만약, 언젠가 제국 내에서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시게 된다면 이 증표를 사용하도록 하세요. 나름 도움이 될 거예요.”

띠링~

[히든 퀘스트 완료!]

[메르세데스와의 호감도가 50 상승하였습니다.]

[<베인츠 가문의 펜던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베인츠 가문의 펜던트>

내구력:31/33

매력 +100

품위 +100

사하란 제국의 명문 무가, 베인츠 백작 가문의 직계임을 증명하는 펜던트입니다. 사하란 제국령 모든 곳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큰 존경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무게:5

사용 조건:베인츠 백작 가문의 가주, 혹은 후계자에게 인정을 받은 자

“귀한 물건 같은데?”

무려 직계임을 상징하는 증표다. 메르세데스의 친족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리드가 받는 것이 이상한 물건이었다.

당황하는 그에게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저었다.

“일국의 왕인 당신께는 하찮은 물건일 뿐이에요.”

‘하찮을 리가.’

이 아이템은 무려 ‘사하라 제국령 전역’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드가 언제,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제국 전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뜻이다. 반드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터였다.

“정말로 괜찮겠어? 내가 이걸 악용했다가는 너희 가문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잖아?”

“전하께서는 피아로 님과 아스모펠 님께서 선택하신 분이 아닌가요? 당신 같은 분께서 그 물건을 함부로 악용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설령 악용하신다고 하더라도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일 테겠죠.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는 저의 죗값으로 받아들일게요.”

“…좋아.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성격이라 이거지?”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메르세데스의 올곧은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드는 그였다. 알면 알수록 신뢰가 쌓였다.

“고맙다.”

짤막하게 인사하는 그리드.

반면 메르세데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감사하였습니다, 템빨왕 전하.”

“건투를 빌어.”

“제국과 피아로 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리고 당신과의 재회를 위해서 무사하겠노라는 말은, 차마 잇지 못하는 메르세데스였다.

***

“도망치지 않고 되돌아온 거요? 귀공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저택으로 돌아온 메르세데스를 기다리는 인물은 다름 아닌 규라탄이었다. 말투와 태도가 평상시와 같았다. 마치 몇 시간 전의 일은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주변에 다른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메르세데스가 조소했다.

“제가 돌아올 것을 예상한 눈치인데요?”

“뭐,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말이요.”

만약 메르세데스가 그대로 그리드와 함께 줄행랑을 쳤다면, 규라탄은 그녀에게 온갖 누명을 씌운 후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을 것이다. 명명백백한 반역자로 만들어서 구족을 멸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결국 이렇게 되돌아왔다.

아쉽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죽이면 그만이니까.

“시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 또한 쉽지. 꽤나 반발이 발생하겠지만, 그들 또한 모조리 척살하면 그만이고 말이야. 피아로의 가족들을 처리했듯이 말이지. 큭큭큭!”

규라탄이 사악한 미소를 그렸다. 말투와 태도, 그 모든 것이 악마 모습일 때로 되돌아갔다.

메르세데스가 각별하게 여겼던 피아로를 언급하는 이유? 뻔하다. 도발이다.

간파하지 못할 메르세데스가 아니었다.

“하찮은 도발이라니, 대악마라는 존재도 별거 아니로군요.”

“…….”

“하긴, 이제는 저를 쉽게 제압할 자신이 없으니 초조하겠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저와 싸우게 될 경우 큰 소란을 피할 수 없을 테고, 당신의 정체가 발각당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자, 말해 봐요. 원하는 게 뭔가요?”

메르세데스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당신, 나와 거래하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던 거잖아요?”

본래 거래란, 상인이 아닌 악마의 주특기다.

약점을 파고드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역시나.

“서로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어차피 내가 악마라는 사실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아. 나는 권약의 대악마, 아스타로트. 나를 소환한 인간의 소망이 완전히 이뤄지기 전까지는 내 존재 또한 철저히 가면을 쓰게 된다. 권약의 이행을 위해서는 섭리조차 거스르는 것이 나의 권능이니까.”

“소환자……?”

간과하고 있었다.

‘소환자가 누구지?’

과연 누가, 어떤 의도로 대악마를 소환하고 황궁에 잠입시킨 걸까?

뒤늦은 의문을 품고 동요하는 메르세데스의 흔들리는 눈빛이 규라탄은 무척 흡족했다.

“큭큭! 나의 소환자는 너 또한 잘 아는 사람이야.”

“그게 누구죠?”

“말해 줄 리가 있나? 악마의 거래는 확실한 계약에 의거한다. 계약을 어기는 쪽이 입게 될 피해는 대악마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막대해. 그저 작은 힌트를 주자면, 네가 예상하는 그 여자는 아니다.”

‘마리가 아니라고?’

“그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황제와 가까운 존재가 바로 나의 소환자지.”

씨익!

규라탄의 커다란 입꼬리가 귀 끝에 닿는 순간, 메르세데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가깝다’는 표현이 물리적인 거리를 뜻하는 거라고 보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뇌리를 스치는 것은 혈육.

“설마, 황자 전하들 중에?”

“힌트는 여기까지. 확실한 사실은 나의 뒷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반면 너는 어떻지? 황제에게는 처음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고, 황자들과는 거리를 뒀으며, 황비의 손길을 거부했던 너다. 그나마 너를 신뢰했던 검공 리미트와의 관계 또한 너 스스로 망쳤고 말이야. 너를 선망하는 기사들? 한낱 양 떼에 불과해. 네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지. 메르세데스, 너는 외톨이다. 철저히 무력해. 나를 조금도 위협할 수 없어.”

영혼까지 무기력해지게 만드는 속삭임이 이어진 후.

“하나 아쉽게도 나 또한 너를 위협하기 어렵게 됐다. 이제 내가 너를 처리하려면 나 또한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니 내키지가 않아.”

비장의 마법이라는 패를 잃은 게 크다. 메르세데스의 솜씨는 대악마도 인정했다. 물론 약화된 상태이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므로 서로를 방관하자고 제안하는 거야. 네게도 지금 당장은 나쁘지 않을 테지. 내게 저항할 만큼 힘을 축적하려면, 네게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잖아?”

악마의 유혹이 시작된다.

소문처럼 달콤하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의 신뢰를 얻는 게 급선무야.’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메르세데스의 모습이 규라탄을 웃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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