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8권 - 7화
[마력 탐지기에 발각당합니다!]
[투명후드짚업의 효과가 무력해집니다. 은신이 해제됩니다.]
[마력 탐지기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앞으로 3분 동안 눈에 띄는 행동을 할 경우 위험인물로 간주 됩니다.]
황도 타이탄에 입장한 이후, 벌써 수십 차례 겪은 일이다.
평범한 흰색 후드 차림새로 전락한 그리드가 칫, 혀를 찼다.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비단 궁전뿐만이 아니다. 평범한 시가지나 가게 내부, 심지어 빈민촌 곳곳에도 마력 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대륙을 지배해온 제국의 압도적인 부와 기술력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혹시라도 시선이 끌려선 안 돼.’
간신히 궁전을 빠져나온 그리드.
북쪽 성문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굳이 얼굴과 아이디를 가리지 않고 대로를 활보했다.
플레이어 숫자만 무려 20억 명이다.
그리드라는 아이디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거리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 천지인 이곳에서 그리드는 그저 ‘지나가는 행인 1’에 불과했다.
평범하게 갈 길 가는 그를 굳이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약, 정체를 감춘답시고 수상하게 행동했다가는 도리어 더 눈에 띄었으리라.
콰아아앙-!!
“....?”
비교적 한산한 북쪽 거리.
사람들의 신경이 남쪽 성벽에 집중 된 지금, 큰 무리 없이 새로운 시가지에 진입한 그리드가 발걸음을 멈췄다.
고요한 거리의 끝에서 들려온 폭음 때문이다. 그리드가 수천, 수만 번도 더 들어본 형태의 폭음이었다.
‘전투? 누가 싸우는 거지?’
사실 그리드는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타이탄을 벗어나야하는 그의 입장에서 정체불명의 소란 따위에 휩쓸린다는 것도 웃겼다.
하지만 그리드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소란이 들려온 방향으로부터 금색의 느낌표가 계속해서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퀘스트 신호였다.
‘이 타이밍에 퀘스트?’
제국에서, 그것도 이와 같은 소란 속에 내게 퀘스트를 줄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누가 나와 연관 됐지?’
그리드는 쉽게 떠올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머리를 굴려보았다.
결과, 의외로 빠르게 한 명의 인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메르세데스!”
제국에서 유일하게 그리드와 비밀을 공유한 첫 번째 기사.
그녀는 12년 전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사명감을 보였었다.
경우에 따라서 위험에 노출 될 수도 있는 입장인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신속한 몸놀림!”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있는 흑화 대신 신속한 몸놀림을 전개, 민첩성을 크게 상승시킨 그가 전투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스스로 무덤을 파줘서 고맙구나. 저승에서 지켜보아라. 네가 그토록 지키고자 애썼던 제국이 분노와 절규, 고통과 슬픔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을.”
마치 흑화 상태의 그리드를 연상하게 만드는, 하지만 그보다는 기괴한 느낌의 중년인이 메르세데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메르세데스는 검은 피를 토하는 중이다.
그리드는 알림창과 마주했다.
[새로운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피아로를 위하여>
★히든 퀘스트★
12년 전의 진실을 파헤치고 있던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가 큰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녀를 구원하지 못할 경우, 피아로는 앞으로 평생 배신자라는 낙인을 벗지 못할 것입니다.
메르세데스를 구원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메르세데스의 생존
퀘스트 클리어 보상:메르세데스와의 호감도 50 상승. 메르세데스와 이벤트 발생.
퀘스트 실패 시:메르세데스 사망. 적기사단 관련 에피소드 삭제.
‘웃기네?’
그리드의 감상이다.
피아로와 비견되는 강자인 메르세데스가 어째서 이토록 큰 위기에 빠진 것이며, 상징과도 같던 적색의 갑옷은 어디다가 갖다 버린 것인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하여튼 간에 빌어먹을 게임이야.’
적일 때는 독보적인 강함을 뽐내던 인물들이 아군이 되는 순간 너프 되버리는 공식,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혀를 찬 그리드가 4개의 갓 핸드 중 하나를 리파엘의 창으로 변신시켰다.
임모탈과의 전투에서 <아이템 변신>을 사용한 갓 핸드는 단 하나였기 때문에 나머지 3개의 갓 핸드는 아이템 변신이 가능한 상태였다.
“윽....”
죽음의 위기에 빠진 메르세데스가 신음을 흘리는 순간.
“그 여자는 내꺼야.”
이를 악 물고 외친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에게 돌진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푸우우우욱-!!
[악한 존재에게 26,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메르세데스를 위협하던 수수께끼의 인물이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리파엘의 창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으로 보아, 생김새 그대로 마족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마족은 레베카교의 신기에 철저히 무력한 법이다.
그리드는 ‘규라탄’이라는 이름의 마족이 한동안 꼼짝도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틈에 메르세데스를 구원할 계획이었다.
한데.
“템빨왕...?”
규라탄은 그리드의 예상과 달리 멀쩡했다. 꼼짝도 못하기는커녕 자신의 허리를 꿰뚫은 리파엘의 창을 신경질적으로 뽑아냈다. 생명력 게이지도 온전했다.
‘초네임드?’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힘껏 내달린 그는 이미 메르세데스의 지척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이는 즉 규라탄의 곁이기도 하다.
“메르세데스! 템빨왕과 한 패였더냐! 이로써 너의 배신은 명명백백한 것이 되었다!”
규라탄이 흥분했다.
희열에 찬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그가, 메르세데스를 향해서 손을 뻗고 있는 그리드에게 검을 찔렀다.
날이 구불구불한, 주인의 생김새와 마찬가지로 기괴한 형태의 검이었다.
까아아아앙-!!
“....!”
규라탄이 놀란다.
메르세데스에게 신경이 팔린 그리드의 허점을 제대로 찔렀다고 생각했건만, 황금색의 손 2개가 날아와 자신의 검을 막아낸 까닭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아티팩트라고?’
규라탄의 뇌리로 한 명의 인물이 스쳐지나간다.
묘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궁극 강화의 묠니르>를 무장한 갓 핸드가 날아들고 있었다. 지면에 나뒹굴고 있던 리파엘의 창 또한 어느새 부유해 규라탄을 노렸다.
규라탄은 등 뒤로부터 은밀하게 날아든 또 다른 황금 손과 리파엘의 창에게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멀쩡하다. 경직되지만 찰나일 뿐. 가슴을 꿰뚫고 나타난 황금색 창을 뽑아낸 규라탄이 그것을 손에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렇구나. 템빨왕 네가 바로 템플러.... 아니, 템빨러였어.”
지난 수 년 동안, 대륙 곳곳에서 야탄의 종들이 학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범인은 템빨러.
스스로 움직이는 아티팩트를 다루는 실력자라고 들었다.
“큭큭, 네가 보통 놈이 아니기는 했구나. 나라를 세울 정도의 무력이라니. 야탄의 종들이 당할 만도 했어.”
“너는 누구지?”
그리드가 ‘야탄의 종 학살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드와 야탄교의 관계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브라함과 유라 정도밖에 없었다.
한데 눈앞의 마족은 그리드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한 것이다.
그 또한 야탄교 소속임이 뻔했다.
“너도 야탄의 종인가?”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규라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할 수도 있겠다.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야탄 신의 종인 법이니까.”
원하던 대답이 아니다.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조심하세요!”
그윽한 눈길로 그리드를 바라보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번뜩 정신을 차리더니 소리쳤다.
“그는 흑마법을 사용합니다!”
“뭐?”
갓 핸드가 휘두르는 2자루의 검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킨 후 갓 핸드를 가격, 경직시킨 수준의 검사가 마법까지 사용한다고?
바짝 긴장하는 그리드였으나 이미 늦었다.
그리드와 대화를 나눴던 시점부터 규라탄은 이미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드의 발밑에 말이다.
“순진한 녀석이로군.”
피식.
규라탄이 조소하자.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리드의 발밑에서부터 큰 폭발이 발생했다.
그리드는 물론이고 메르세데스까지 동시에 집어삼키는 거대한 지옥의 불길이었다.
그 기세를 목도한 그리드가 떠올린 존재는 대악마 헬가오였다. 화석을 채취하기 전의, 강력한 헬가오 말이다.
“골칫덩어리 두 마리를 동시에 처리하게 되다니, 이건 뜻밖의 행운이로군.”
규라탄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검은 불꽃에 집어삼켜진 그리드와 메르세데스 둘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 믿었다.
고작 인간들 따위가 자신의 마법을 정면에서 맞고도 살아남을 리 없었으니까.
‘이제 이 둘을 어떻게 엮어볼까.’
스르륵.
시신을 연상시킬 정도로 창백했던 피부가 혈기를 띄기 시작한다. 온통 검게 칠해졌던 두 눈 또한 흰자위가 구분되어갔다.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아니,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변장한 규라탄은 황제에게 오늘 날의 사건을 어떤 형태로 보고해야 더 효과적일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반격을 당할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너의 약점은 뭐지?”
“....?!”
자신의 몸을 방패로 삼은 것인가?
연기를 꿰뚫고 등장한 그리드의 품에는 메르세데스가 안겨 있었고, 그녀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리드 혼자서 폭발을 모조리 떠안은 느낌이었다.
한데 문제는.
“어째서 너까지 멀쩡한 거지?!”
그리드도 큰 상처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옥의 불길에 온전히 맞선 직후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멀쩡했다.
“내가 왜 템빨왕인지 몰라?”
그리드의 검이 규라탄을 찌른다.
푸우우우욱-!!
방심하고 있다가 허점을 드러낸 규라탄.
방어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열망의 무아검에 가슴을 꿰뚫린 그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었다.
한낱 인간의 무기 따위가, 빛의 여신 레베카의 신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쿨럭!”
피를 토하는 규라탄의 손에 붙잡혀있던 리파엘의 창이 <아이템 변신>의 지속 시간이 끝나자 갓 핸드로 되돌아간다.
격렬하게 저항하며 빠져나가는 놈을, 규라탄은 붙잡고 늘어지지 못했다.
콰지직!!
하늘에서부터 내리친 붉은 벼락에 관통당한 까닭이다.
눈을 까뒤집은 규라탄의 몸이 부르르, 경기를 일으켰고, 그리드는 춤사위를 펼쳤다.
“연살파극(聯殺派極)!”
푸욱-!
푹푹푹푹!!
강력한 찌르기가 규라탄의 몸을 연속적으로 꿰뚫기 시작하자.
콰콰콰콰콰쾅!!
검은 불꽃이 폭발한다.
규라탄이 마법진까지 그려가면서 소환했던 불꽃과 비견되는 파괴력의 불꽃이 아무런 딜레이 없이 즉발적으로 몇 차례나 전개됐다.
규라탄과 메르세데스 모두를 경악시키는 무위였다.
“큭....! 네, 네놈....!”
규라탄이 기껏 갈무리했던 마기를 다시금 방출하기 시작했다. 검게 물들어가는 그의 기괴한 두 눈을 마주하고도, 그리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뮐러에게 육신을 잃었던 퇴물 따위가.”
콰르르르르릉-!!
연살(聯殺)에 이어 전개되는 파(派)의 묘리가 규라탄을 집어삼킨다. 온 몸을 갈기갈기 찢겨나가며 피를 흩뿌리는 그의 머리 위로 그리드의 검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 뒤를 각자 <실패작>과 <백호 검>, 그리고 <이야루그트>와 <그리드의 대검>을 무장한 4개의 갓 핸드가 따른다.
“너무 과하게 기고만장한 거 아니냐?”
냉소하며.
서걱-!!
극한의 베기를 선보이는 그리드.
정수리부터 사타구니에 이르기까지 베여나가는 규라탄을 또 다른 4자루의 지존 무기들이 꿰뚫었고.
쿠와아아아아앙!!
검은 불꽃이 다시 한 번 폭발하면서 규라탄을 집어삼켰다.
“.....”
메르세데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피아로와 칠공작이라는 거물들을 목도해온 그녀에게도 그리드의 화력은 한 차원 위의 것으로 다가왔다.
2자루 신검을 활용한 연살파극의 위력은 독보적인 것이다.
“튀자.”
“...네?”
그리드는 이대로 저 정체불명의 악마를 쓰러뜨리는 것일까?
반사적으로 기대하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당황했다.
전투 내내 규라탄을 압도했던 그리드가 퇴각을 입에 담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드가 설명했다.
“정신 차려. 사람들이 금방 몰려올 거야.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국에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발각 당했다가는 난처해질 거라고.”
애초에.
‘이길 수 없어.’
검성 뮐러에게 본신이 봉인당하고 약화 된 대악마라고는 해도 결국 대악마다. 1대1, 1대2 정도로는 승산이 없다.
과거, 그리드가 헬가오를 레이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화석이라는 약점을 찾아 공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규라탄의 생명력은 10분의 1조차 닳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갑옷은 어디다가 팔아먹었어?”
메르세데스의 작은 손을 움켜쥐고 앞서 내달리던 그리드가 질문하자.
“파, 팔아먹지 않았어요! 고귀한 상징을 어떻게 돈으로 팔아넘기겠어요?”
메르세데스가 얼굴까지 붉혀가며 소리쳤다.
그리드는 그녀가 농담을 모르는 진중한 성격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녀는 진중하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남성’의 손길이 너무나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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