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8권 - 6화
“말도 안 돼!!”
당연한 이야기지만, 임모탈 또한 국가대항전 영상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개막식부터 폐막식에 이르기까지, 단 한 개의 경기도 놓치지 않고 재방송을 시청한 매니아도 있었다.
그리드가 어쌔신 타르마를 일격에 해치웠던 즉발 스킬의 존재를 그들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스킬의 위력이 베라딘을 일격에 해치울 정도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왜?
베라딘은 최소한 생존력 부분에서만큼은 네크로맨서의 한계를 초월한 인물이었으니까.
근거는 템빨국 침공전이다.
당시 베라딘은 페이커를 압도했었다. 대인전에서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어쌔신의 맹공조차도 견디던 베라딘이 일격에 사망할 거라고 예상하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광역스킬이었어?’
검은 불꽃이 폭발함과 동시에, 베라딘은 물론이고 그의 반경 10미터 이내에 자리 잡고 있던 네크로맨서 수십 명이 사망했다.
임모탈 소속원들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즉발 스킬 따위가 저토록 강력한 위력과 거대한 영향 범위를 자랑할 수 있다니,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레전드리 스킬은 다르다 이건가?’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 울린다.
불편한 정적을 깬 사람은 네크로맨서 랭킹 2위 불렛이었다.
“산개...! 산개해라!! 흩어지라고!!”
사색이 된 네크로맨서 랭킹 7위 드루도 함께 소리쳤다.
“저 괴물 새끼한테 절대로 거리를 내어주지 마!!”
“히익!”
인간의 생존 욕구는 공포를 극복하는 힘이 되어준다.
그리드의 화력에 압도당하고 넋을 잃었던 네크로맨서들이 금세 정신을 차렸다. 스켈레톤 나이트와 메이지 등의 상급 언데드를 소환, 그리드를 견제하는 한편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자 노력했다. 누군가는 아예 뒤도 안 보고 도망쳤다.
그리드의 첫 번째 표적은 그들이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구원은 없다.
해충은 구제(驅除)가 답이다.
완전히 박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온갖 군상들을 만나온 그리드는 잘 알고 있었다.
“초(超).”
쿠오오오오오-!
썰물처럼 물러나는 네크로맨서들의 중심에서 춤사위를 펼치는 그리드.
잘 정돈되어 있던 그의 흑발이 너울거리기 시작한다.
검은 불꽃의 폭발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셔진 지면의 파편들이 허공에 떠오른다.
그리드의 평타가 원거리 형태로 변환되는 전조였다.
펑-!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흑화 상태의 그리드는 최고 공속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검을 초당 6회 휘두를 수 있었고, 이는 즉 초당 6회의 검기를 발사할 수 있다는 뜻이 되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병기였다.
“크아아아악!!”
“윽...! 큭!!”
오로지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등을 보이고 도망치던 네크로맨서들이 주저앉는다.
그리드가 쏘아낸 검기에 얻어맞은 그들의 등짝은 넝마였다. 평범한 네크로맨서인 그들은 방어력과 생명력이 낮았기 때문에 그리드의 평타 한 방만 맞고도 죽은 사람이 태반이다. 그나마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스턴 상태에 빠졌다. 일격에 절반 이상의 생명력을 손실하고 말았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루바안!!”
절규에 가까운 불렛의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의 의지에 호응한 데스나이트 루바안이 그리드를 덮쳤다.
쿠워어어어어어어!!
생전에 오크족 투사였던 루바안은 길이가 무려 2미터가 넘어가는 할버트를 무기로 사용한다.
도망치는 네크로맨서들을 저격하느라 빈틈을 드러내고 있는 그리드에게 루바안의 강력한 베기가 떨어졌다.
아주 찰나.
불렛의 기대감이 급격히 상승했다.
루바안의 공격력은 최상급.
베라딘의 데스나이트 카일로의 공격력조차도 초월하는 바,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치명상을 피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쩌엉-!!
루바안의 할버트가 그리드의 어깨를 찍어 누르는 순간 떠오른 알림창이 불렛의 얼굴을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대상에게 2,4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독안개가 출몰합니다!]
[데스나이트 루바안이 중독되었습니다!]
“...미친 건가?”
압도적인 방어력은 고사하고 중독 반사 데미지를 입히는 갑옷이라니?
‘저걸 무슨 수로 잡아?’
그리드가 마치 태산과도 같은 드래곤의 거구를 기울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공격력을 발휘한다는 사실, 이미 목격한 바 있다.
하지만 크라우젤과 마찬가지로 브레스에 손쉽게 사망하지 않았던가?
또한 PvP 결승전에서는 크라우젤에게 넝마가 되기도 했었다.
그래, 그리드의 템빨이 제아무리 뛰어날지언정 방어력만큼은 비교적 평범한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수십 만 네크로맨서 중에서 2번째로 강력한 자신이라면. 크라우젤 등의 국가대항전 출전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존’의 자격을 갖춘 자신이라면 그리드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으리라고, 불렛은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지독한 오만이었다. 아니, 부끄러운 착각이었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어.’
저들과 나는 격이 다르다.
현실을 깨닫는 불렛.
잠시 넋을 잃고 있던 그가.
[데스나이트 루바안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드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하는 데스나이트를 확인하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시체 폭발이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어!!”
우왕좌왕.
쉬지 않고 검기를 휘두르는 그리드를 둘러싸고 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네크로맨서들이 일제히 희망을 엿본다.
시체 폭발.
소환 상태의 언데드를 자폭시킴으로써 대상의 최대 생명력에 비례한 피해를 입히는 마법.
자폭시킨 언데드를 재소환하기까지 상당한 대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큰 단점이지만, 위력만큼은 발군이다.
그리드와 장기전을 가봤자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네크로맨서들이 미련 없이 시체 폭발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쿠와아아아아아앙-!!
[4,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드에게 접근한 언데드가 폭발하는 순간.
“좋았어!!”
네크로맨서들이 환호했다.
여태까지 접근하는 언데드들을 족족 베어버리던 그리드의 신형이 처음으로 흔들리면서 피를 토하는 모습을 엿본 까닭이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언데드들이 걸어 다니는 폭탄이 되어서 그리드에게 접근하는 광경, 비극적인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그리드! 오만의 대가를 치러라!!”
개인의 힘에는 결국 한계가 있는 법.
불렛은 혼자서 임모탈 전원을 적으로 돌린 그리드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때마침 수십 마리의 구울이 그리드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했다.
쾅-!
쿠콰콰콰콰콰콰쾅!!
강력한 폭발!
그리드를 중심에 두고 발생하는 폭발의 기세가 황비의 궁전 전역을 흔들리게 만들 정도다.
한데.
“어....?”
정작 그리드는 멀쩡했다.
폭발을 흡수하는 <크루제의 신묘한 보자기>를 활용한 결과다.
희뿌연 먼지를 꿰뚫고 등장한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있었다.
푸욱-!!
“컥!!”
콰작!!
“캬악!!
흑화 상태의 그리드는 네크로맨서들의 민첩성으로는 결코 쫓을 수 없는 속도를 자랑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마냥 전장을 누비며 검을 휘두르는 그에게 네크로맨서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갔다.
“무, 무슨....!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거지?! 헉!!”
질색하며, 그리드를 저지하고자 새로운 언데드를 소환하던 드루가 비명을 내질렀다.
2마리의 누리끼리한 해골들.
당연히 아군이 소환한 언데드인 줄 알았던 녀석들이 다가오더니 칼을 찌른 까닭이다.
놈들은 일반적인 스켈레톤과 달랐다. ‘표정’이 있었다.
당황해서 자빠진 불렛을 ⌓ ⌓ 이렇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꼴이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이, 이 미친 해골들은 또 뭐야?”
정체불명의 해골들은 약해도 더럽게 약했다.
놈들에게 찔린 불렛이 입은 데미지는 채 100단위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불렛은 묘하게 불길했다.
표정을 지닌 언데드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약간의 이성을 지닌 최상급 언데드, 리치조차도 표정만큼은 없다.
‘어쩌면 이거....’
초희귀 언데드 아닐까?
‘소환자가 누구지? 헉!!’
해골들의 머리 위로 시선을 돌린 불렛이 질색했다.
해골들의 이름이 템빨골 1과 템빨골 2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작명 센스를 보아 주인이야 뻔했다.
“그, 그리드가 소환한 거라고?”
대장장이가 언데드를?
아니, 무슨 수로?
의문을 품음과 동시였다.
푸욱-!!
“컥....!”
불렛이 피를 토했다.
그가 잠시 템빨골들에게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적진을 휩쓸면서 다가온 그리드가 그의 심장에 검을 찌른 것이다.
“자, 잠깐.....”
단 한 번 찔린 것으로 생명력이 채 10퍼센트도 남지 않았다.
스턴에 빠진 불렛이 간신히 입을 연다.
“사, 살려줘.... 제발 살려줘....! 나는 템빨국을 침략한 적 없어!! 베라딘이랑 드루 그놈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나도 피해자야!!”
인간의 마음은 의외로 약하다는 사실을 불렛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처럼 진실을 알리고 애원하면 그리드가 조금쯤은 망설여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말렸어야지.”
무미건조한 반응.
짧게 대꾸한 그리드의 이어지는 공격에 불렛은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그 지독하게도 냉정한 모습이, 이제 몇 남지 않은 네크로맨서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오금이 지린다’는 표현을 언제 사용해야하는 것인지, 지금 이 순간 알게 된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
자신들이 임모탈을 탈퇴하기 전까지는. 아니, 어쩌면 게임을 접기 전까지는 그리드의 복수극으로부터 해방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겁에 질린 그들을 모조리 해치운 그리드가 곧바로 투명후드짚업을 입었다.
빌어먹을 시체 폭발 탓에 발생한 소란을 듣고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으니 지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그너스를 만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정체가 발각 당했다가는 큰일이다. 분노한 제국이 진실을 파악한 후에 템빨국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어서 피하자.’
그리드는 북쪽 성문을 퇴로로 삼을 계획이었다. 붕괴 된 남쪽 성벽과 정 반대에 위치한 그곳이라면 경계가 비교적 약할 거라고 생각했다.
***
타이탄 북쪽에는 제국 귀족들의 저택과 별장이 밀집 된 주거지역이 존재한다.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의 저택 또한 그곳에 위치했다.
“누가 감히 제국을...!”
남쪽 외성벽이 붕괴됐다는 소식을 접한 메르세데스가 곧바로 검을 무장했다. 이어서 적색의 갑옷을 무장하려던 그녀였으나, 잠시 망설이더니 관두고 원피스 차림 그대로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일단의 적기사들과 맞닥뜨렸다.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정원에 모여 있는 기사들, 네 번째 기사 규라탄과 그의 수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규라탄이 어깨를 으쓱였다.
“황명을 또 한 번 어기다니, 역시나 그 소문이 사실인가보군.”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죠?”
“귀공이 황제에 대한 충의를 잃었을 뿐더러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소문 말이요.”
“그게 무슨 근거 없는 억측인가요?”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나처럼 생각할걸? 폐하께서 귀공의 자격을 박탈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마자 성벽이 붕괴 됐소. 귀공을 따르는 모종의 세력들이 벌인 짓 아니요?”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네요.”
“아니, 모두가 믿게 될 거요. 실제로 당신은 이 혼란 틈에 도망치고자 저택을 나서지 않았소? 어떤 끔찍한 처벌을 받게 될지 몰라 불안한 나머지 말이요.”
“....대화가 무의미하군요.”
메르세데스는 눈치 채고 있었다.
“12년 전 피아로님께 그랬던 것처럼, 이제 당신은 내게 누명을 씌우고 처리할 계획인 거네요.”
“배반자의 이름을 입에 담기까지. 이거야 원, 배신의 정황이 명명백백하구만.”
씨익!
규라탄의 양쪽 입 끝이 승천했다. 커도 너무 큰 입이다. 웃는 모습이 광대 분장을 한 사람처럼 기괴했다.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 사형.”
네 번째 기사의 자격으로 내리는 형벌이 시작된다.
규라탄의 선고와 동시에 다섯 명의 적기사들이 메르세데스를 덮쳤다.
스파앗-!
순백의 드레스를 흩날리며 선회하는 메르세데스.
회전과 동시에 꺼내 쥔 2자루의 검이 거대한 호선을 그리자, 정원을 예쁘게 가꿔주고 있던 꽃과 나무들이 소리도 없이 잘려나간다.
적기사들의 가슴으로부터는 선혈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규라탄이 쯧쯧 혀를 찼다.
“이십 번대 기사로는 어림도 없군.”
약해빠진 놈들, 정말이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내가 죽인 전대의 적기사들은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말이지.”
충격적인 발언을 대수롭지 않게 뱉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규라탄에게 메르세데스가 나비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노출되는 그녀의 허벅지를 시야에 담는 규라탄의 눈빛에는 그 어떤 욕망도 깃들지 않는다.
성욕이라는 것은, 인간과 짐승 같은 저급한 생물들이나 느끼는 것이었으니까.
쿠콰콰콰콰콱!!
메르세데스의 두 자루 검이 규라탄에게 도달하기 직전.
“읏....!”
칠흑의 마력이 방출되며 메르세데스를 덮쳤다.
예상치 못한 형태의 반격에 당황한 메르세데스가 검을 교차시켜보지만.
콰자자작!!!
고작 두 자루의 검으로 마법을 방어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갑옷의 부재가 너무 컸다.
선혈을 흩뿌리며, 하늘을 부유한 메르세데스의 가녀린 몸이 저택의 담벼락을 꿰뚫고 날아가 대로에 처박혔다.
천천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간 규라탄이 킥킥 웃는다. 마기에 휩싸인 그의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했고, 눈은 흰자위 없이 온통 검었다.
“지난 12년 동안 너의 눈이 거슬렸다. 꽁꽁 숨겨둔 비밀조차도 꿰뚫어보는 듯한 너의 그 맑은 눈동자는 마치 저주와도 같아서 마주볼 때마다 뽑아버리고 싶었지. 고통스러워하는 너의 모습을 언젠가 반드시 천천히 감상하고 싶었다.”
“허억.... 허억.... 당신....”
“하지만 리미트가 너를 너무 신용하는 바람에 함부로 틈을 엿볼 수가 없더군. 큭큭, 멍청한 네년이 리미트의 뒤를 캐기 시작하고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지만 말이야.”
규라탄이 주름진 손을 뻗었다. 길고 새카만 손톱이 메르세데스의 눈가로 향했다.
“스스로 무덤을 파줘서 고맙구나. 저승에서 지켜보아라. 네가 그토록 지키고자 애썼던 제국이 분노와 절규, 고통과 슬픔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을.”
“으윽....!”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어떤 독보다 치명적인 마기가 메르세데스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저항조차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의 귓가로.
“그 여자는 내꺼야.”
웬 남성의 음성이 들려오더니.
푹-!
푸푸푹!!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금빛의 창이 날아와 규라탄을 꿰뚫었다.
“템빨왕....?!”
저주받을 레베카의 신기를 간신히 뽑아 던진 규라탄이 경악했고, 메르세데스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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