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41화 (636/1,794)

템빨 38권 - 5화

근신 명령을 어긴 메르세데스가 발할라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됐다.

황명을 어긴 것은 황제에 대한 충의를 잃었다는 증거이며, 허가도 없이 적대국을 방문한 행위는 반역의 증거다.

규라탄이 올린 보고서의 내용에는 노골적인 비방과 왜곡이 담겨있었다.

적대국에 방문했다는 이유만으로 첫 번째 기사를 반역자로 내모는 그의 행동은 비상식에 가까웠다.

‘메르세데스가 발할라를 방문한 이유야 뻔하다.’

무패왕의 후예를 찾아내서 복수하려했을 터.

정황 상, 그녀가 발할라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황제 쥬앙데르크는 이처럼 확신했다.

하지만.

‘짐의 명령을 어긴 것 또한 사실.’

애석하게도, 황제는 메르세데스의 충성심만큼은 의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충성했다면,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황명을 어기지 않았을 테니까.

‘뭐, 애초에 충성을 기대한 적도 없다.’

당연하다.

그토록 신뢰했던 피아로조차도 나와 제국을 배반하지 않았던가.

기사라는 족속들은 광대나 다름이 없다. 충의는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가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규라탄만큼은 조금 더 신뢰해도 좋겠군.’

네 번째 기사 규라탄은 12년 전 피아로의 변절을 밝혀낸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기사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착실히 수행해온 그가 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메르세데스를 비방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위험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테지. 짐이 메르세데스를 경계하기를 바라는 게야.’

판단한 쥬앙데르크가 황명을 내렸다.

“첫 번째 기사는 황실에 충성하고 만백성의 귀감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짐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의무를 버렸다. 짐은 이 순간부로 메르세데스의 모든 자격을 박탈할 것이며, 3년의 근신 처분을 내릴 것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였다.

메르세데스 본인은 물론이고 대소 관료 모두가 동요했다.

메르세데스가 누군가?

피아로의 배신에 동요하여 수복하지 못하고 있던 적기사단을 하나로 규합하여 진정시킨 장본인이다.

그녀의 활약 덕분에 적기사단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고 내각이 안정을 되찾았다.

전쟁에서의 용맹과 활약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녀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황제가 상징을 내친다? 이때 발생할 파장은 끔찍하다.

황제의 측근들조차도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그녀가 설령 황비 전하의. 아니, 황비 전하를 이용하고 있는 귀족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을지언정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단순히 징계를 내리는 것과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옵니다.”

“그녀가 지닌 영향력을 생각하셔야합니다. 제국의 모든 기사들이 폐하께 반감을 품을 우려가 있습니다. 이전처럼 적절한 징계를 내리는 선에서 마무리하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적기사들에게 단장 리미트를 따르겠느냐,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를 따르겠느냐는 질문을 던질 경우.

대부분의 기사들이 메르세데스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의 평가가 무색하게도 메르세데스는 존경 받는 기사였다.

“흐음....”

최측근들조차도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자 냉정을 되찾은 황제도 난감해졌다. 톡톡, 굵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고심해본다.

그러다가 문득.

꽈드득!

천장에서부터 들려오는 묘한 소음을 포착한다.

“....!”

황제의 집무실.

원탁에 둘러앉은 채 토론하고 있던 황제 쥬앙데르크와 3명의 칠공작들이 일제히 시선을 들었고.

“잠시 실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장 베인이 도약했다.

덥썩!

추락하던 금속제 샹들리에가 베인의 커다란 손에 붙잡힌다.

“이, 이게 무슨....?”

칠공작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천장에 멀쩡하게 매달려있던 샹들리에가 갑자기 추락하다니?

‘이 무슨 불길한 징조란 말인가!’

무려 황제의 집무실이다.

시설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샹들리에에는 노후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새것 같았다.

흉조라고 읽은 칠공작들이 불안에 휩싸였지만 황제는 도리어 분노하고 있었다.

“황비....!!”

핏대 세운 그의 얼굴이 대춧빛으로 물든다.

깨달은 것이다.

황비는 황비파 귀족들의 허수아비가 아니라 황비파의 거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비로부터 선물 받은 샹들리에의 규격이 한 달 전보다 배는 커져있음을 재차 확인한 황제가 소리쳤다.

“마리를 당장 내 눈 앞에 끌고 오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보통 심각한 사태가 아니다.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칠공작들이 군기 바짝 든 이등병마냥 허겁지겁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이미 집무실 앞에는 근위대 병사 수백 명이 집결해있는 상태였다.

황궁 곳곳에 비상령이 울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모든 출입구를 봉쇄해라! 쥐새끼 한 마리라도 궁전을 빠져나가선 안 된다!”

“예!”

“마리 황비를 모시러 간다! 황명이다!”

“예!!”

혼돈이라는 이름의 물이 쏟아졌다.

황실은 허우적거렸고, 제국의 정치 상황은 급변을 예고했다.

그리고 이때.

“그, 급보이옵니다!!”

충격적인 소식 하나가 황제에게 전달됐다.

“남쪽 외성벽의 일각이 무너졌다고 하옵니다!!”

“뭐라!”

건국 이후 단 한 차례의 외침도 허용하지 않았던 타이탄의 견고한 성벽이 무너졌다고?

갑자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역사상 전례 없는 대사건에 부르르, 경련하는 황제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전하께서는 아름답지 아니하신 부분이 없사옵니다.”

황비 마리의 궁전.

공손히 무릎 꿇고 앉은 귀족 부인이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중이다.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마리의 발톱에 정성껏 색을 칠해주고 있었다.

무려 명가 출신의 귀족 부인이, 무릎을 꿇고 앉은 것으로 모자라서 타인의 발톱 화장 따위나 해주는 것이다.

한쪽에 선 시녀들이 안절부절 못했다.

귀족의 추태를 목격한 대가로 언젠가 자신들이 큰 화를 입게 되리라고 그녀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이 진주가루가 전하의 아름다운 발끝에 도리어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걱정 되옵니다.”

“썩 민폐는 아니에요. 나쁘지 않네요.”

살가운 부인에게 인자한 미소로 대응하는 황비 마리.

그녀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콧대 높은 귀족 부인조차도 자신의 앞에서는 한낱 강아지 꼴이었으니 권력의 쾌감이 대단했다.

‘자처해서 발톱 화장을 해주다니.’

황비의 권력이 이 정도다.

황태후의 권력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마리의 욕망이 들끓었다.

아들 4황자를 반드시 황위에 앉히고야 말겠다는 목표가 더욱 더 확고해졌다.

“흐응. 흐으으응.”

절로 흘러나오는 황비의 콧노래가 퍼져나간다. 마치 천사가 부르는 것처럼 아름다운 노랫소리였다.

하지만 귀족 부인과 시녀들은 알고 있다.

황비의 상냥한 미소와 아름다운 외견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시커먼 속은 천사의 것과 거리가 멀었다.

“전하!!”

“...흐응.”

평온이 깨진다.

갑자기 들려오는 외침에 콧노래를 멈춘 황비가 시선을 돌렸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허겁지겁 달려온 알버트 자작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자리를 피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피하라고요?”

황비는 당황하기보다 분노했다.

이곳은 제국 황비의. 훗날 황제의 어머니가 될 나의 보금자리다.

한데 이곳에서 피하라니? 내가? 왜?

아미를 찌푸리는 황비에게 알버트 자작이 설명했다.

“그렌할 공작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사온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폐하의 근위병들을 대동하고 있사옵니다!”

“그렌할 공작이...?”

황제의 오른팔 격인 그가 이곳엔 왜?

심지어 황제의 근위병들을 대동했다고?

“무슨 일인지 어서 알아보도록 해요.”

황비 또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다가온 시녀들이 정성껏 구두를 신겨주었다.

방을 나서기 전, 황비는 시녀들을 지목했다.

“저 아이들은 없애도록 하고요. 우리 백작 부인의 명예는 지켜줘야지요.”

“화, 황비 전하....!”

사색이 되는 시녀들과.

“전하의 배려에 매번 감격할 따름이옵니다.”

고개 숙여 감사하는 귀족 부인.

저열한 여성들이 득실거리는 황비의 궁전은 오늘도 역시나 역겹다.

꾸욱, 황비가 눈치 채지 못하게끔 입술을 깨문 알버트 자작.

일고의 고민 없이 검을 뽑은 그가 벌벌 떠는 시녀 다섯 명의 목을 베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전하의 침실에 매달려있던 모빌이 추락했다고 하옵니다.”

기사 한 명이 달려와 황비에게 보고했다.

황비의 얼굴이 사늘하게 굳었다.

“원인은요?”

“그게 정확치 않습니다. 시녀들은 모빌이 전보다 크고 무거워졌다는 헛소리만 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

이제야 아귀가 맞는다.

영민한 황비가 상황을 즉각 파악했다.

“당장.... 지금 당장 마차를 준비하도록 하세요. 폐하를 뵈어야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해명해야한다.

사색이 된 채 소리치는 황비의 귓가로 듣고 싶지 않았던 음성이 들려왔다.

“마차는 제가 이미 준비하였습니다. 자, 가시죠. 전하.”

그렌할 공작이었다.

늘 그렇듯이, 그는 버릇없게도 쌍두 코뿔소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황비는 그의 내려다보는 시선이 지독히도 싫었다.

하지만 섣불리 내색할 수 없다.

칠공작 중에서도 가장 강한 권세를 자랑하는 그렌할 공작은 황제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상대였으니까.

“공작의 배려에 감사드려야겠네요.”

***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군.”

지독한 속내야 어찌됐든, 표면적으로는 평온하기 짝이 없던 황비의 궁전이다.

한데 오후 한 순간에 발칵 뒤집혔다.

원인을 파악한 베라딘은 오늘 이후부터 황비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에게도 불똥이 튈 수도 있어.’

임모탈은 황비 직할의 기사단 로즈 나이트 소속이다. 연좌제를 조심해야했다.

‘새로운 보금자리가 필요한 시점인가.’

베라딘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아그너스를 비롯한 임모탈 소속원들이 한동안 신세를 졌던 별궁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야 돼.’

최악의 경우, 황비가 든든한 뒷배가 아니라 발목을 붙잡는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쯤이면 이미 서대륙 어디에도 발붙이기 힘들다.

‘이참에 동대륙으로 이동하는 것도 좋겠지.’

위기는 곧 기회다.

비록 강제적이라고는 하나,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기에 이처럼 좋은 타이밍도 없다.

생각하는 베라딘.

그는 분명한 희망을 품은 상태였다.

마리의 위기를 단순히 남의 일로 치부하며, 정작 본인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는 망각하고 있었다.

왜?

최소한 아직까지는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의 적은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집요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대륙 최대의 국가를 혼란에 빠뜨려버리는 수고와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저벅저벅.

“.....”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별궁으로 이동하는 베라딘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그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황비의 부재 탓인지, 사방 곳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깨닫는다.

이곳은 이미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늘 늦는 법이다.

“똥 마렵냐? 뭘 그렇게 서둘러?”

“.....”

드디어 별궁 앞에 다다랐을 때.

베라딘의 등 뒤로부터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뚝.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선 베라딘이 질문한다.

“라우엘입니까? 작금의 모든 상황이 라우엘의 작품인가요?”

“네게는 내게 질문할 자격이 없어.”

“당신은 바보입니까? 이곳은 우리 임모탈의 주둔지입니다. 기껏 잠입에 성공해봤자 뭐합니까? 당신 혼자서는 우리를 위협할 수 없는데.”

“위협 따위 안 해. 죽일 거야. 모조리 다.”

“핫, 혹시 기사 소환을 사용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이 소란 속에 템빨국의 얼굴이 보였다가는 제국의 칼끝이 고스란히 템빨국으로 향하게 될 텐데요.”

“그거 알아? 너, 이제 첫 번째야.”

“모두 나오세요!!”

여전히 그리드로부터 등 돌린 채.

별궁의 입구 쪽을 바라보고 선 베라딘이 힘껏 소리치자.

“뭐야? 어! 그, 그리드다!”

“뭐라고? 진짜다! 그리드다!!”

“다들 당장 뛰어 나와!!”

수십, 수백 명의 네크로맨서가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한 베라딘이 드디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대면했다. 그리드의 차가운 시선을.

“이제 첫 번째라고.”

“자꾸만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나한테 죽는 거.”

“....?”

“피아로한테 죽은 건 카운트 안 되거든. 이 개새끼야.”

칸의 원수를 드디어 눈앞에 두었다.

이 순간의 그리드는 20억 유저에게 선망 받는 지존도, 100만 백성을 대표하는 템빨왕도 아니다.

그저 온전한 그리드다.

주체할 수 없는 원한과 살의를 마음껏 분출해도 좋았다.

스파아아앗-!!

네크로맨서 중 태반이 아직 해골을 소환하기도 전.

베라딘의 데스나이트와 일부 네크로맨서들의 소환수들이 그리드를 요격하려고 나서는 순간.

“기억해 둬. 내가 네 눈앞에 나타나면 너는 이미 죽어있는 거야.”

<종횡무진>의 묘리를 이용, 베라딘의 바로 곁으로 이동해온 그리드가 <흑화>와 <대장장이의 분노>를 전개하며 열망의 무아검을 휘둘렀다.

서걱-!!

“윽....!”

[51,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죽음 극복>의 효과로 최대 생명력의 35퍼센트를 보존했습니다.]

즉발 스킬에 당한 건가?

너무나도 강력한 일격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주춤, 뒷걸음치며 물약을 꺼내는 베라딘의 손으로.

푸우욱-!!

리파엘의 창이 날아와 꽂힌다.

쩌엉! 쩌저정!!

데스나이트 카일로와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그리드를 흠씬 두들겨 팼다. 하지만 그리드를 저지하기는커녕 도리어 독 안개의 분출만 도울 뿐이다.

검에 베이고, 창에 찔린 것으로 모자라서 중독되고 고통스러워하는 베라딘에게.

“죽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도살자라고 불리던 시절을 연상하게 만드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2번째 평타였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검은 불꽃이 폭발한다.

베라딘은 물론이고 그 주변의 네크로맨서들까지 잿빛으로 산화했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