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8권
=======================================
템빨 38권 - 1화
[아이템의 이름을 ‘돌검’으로 결정하시겠습니까?]
“…아니, 잠깐.”
흐름을 타고 거침없이 소리치던 그리드가 제동을 걸었다. 돌검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크라우젤과 대장장이들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아니다.
깨달음의 원인은 현재 그리드가 입고 있는 갑옷에 있었다.
칸의 유작, 발할라.
칸이 떠난 이후로 그리드가 단 한 번도 벗지 않고 있는 갑옷 말이다.
‘아이템의 이름은 중요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어.’
칸은 어째서 갑옷의 이름을 발할라라고 지었을까?
사실 그리드는 별다른 의미를 찾지 않았었다. 칸의 조상 알바티노가 제작한 발할라를 본떠 만든 갑옷이기 때문에 이름 또한 그대로 따온 것이려니, 그저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됐다. 발할라의 뜻 중 하나가 ‘기쁨의 집’이라는 사실을.
‘덕분에 아이템에 담긴 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어.’
내가, 이 그리드가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거대한 집 같은 존재가 되기를 칸은 바랐던 것이다.
‘그래, 이름은 중요하다.’
아이템의 형태와 기능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편향되었다가 굳었던 그리드의 사고가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늘 생각하라’는 라우엘의 조언을 상기하면서 그리드는 생각했다.
칸이 남긴 유작의 이름이 단순한 철갑옷이었다면, 자신은 지금과 같은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이름이 갖는 무게를 확실하게 인지한다.
‘애초에.’
선망하는 친구와 함께 만든 작품이다. 무성의한 이름을 짓는 것은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정정하겠다.”
돌검.
그 충격적인 이름 탓에 침묵에 잠긴 대장간 곳곳에 그리드의 당당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묵사발.”
“……?”
“이 검의 이름은 묵사발이다.”
분명 일반적인 관점에서 땅의 힘은 ‘수호’의 상징에 가깝다. 하지만 영웅왕 그리드와 검성 크라우젤은 땅을 통째로 뽑아 들어 집어 던질 수 있는 수준의 괴물들이었다. 그들이 휘두르는 ‘땅’은 압도적인 무게로 적을 짓뭉갤 것이다.
“그래서 묵사발이야.”
“…진짜로 땅을 뽑아 던질 수 있는 겐가?”
“…….”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별세계 인물로 인식하는 판미르가 ‘비유’라는 개념을 망각한 채 질문한다.
그 탓에 엄숙(?)하던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지기는 했으나,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크라우젤, 너와 나의 기술과 경험, 그리고 지식이 담긴 이 검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서 적을 묵사발 낼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아. 묵사발……. 고심 끝에 지은 이름이다. 부디 네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어.”
“…그래. 긴말 안 하마.”
태클 걸 부분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리드는 정말로 진지해 보였기 때문에 크라우젤은 차마 함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언제 한번 작명가라도 소개시켜 줘야겠군.’
이처럼 생각할 뿐이었다.
***
<도안:묵사발>
등급:에픽~레전드리
에픽 등급 정보
내구력:455~790 공격력:390~650 방어력:100~188
*옵션 예측 불가
유니크 등급 정보
내구력:667~980 공격력:493~817 방어력:140~246
*옵션 예측 불가
레전드리 등급 정보
내구력:??? 공격력:??? 방어력:???
*옵션 예측 불가
전설을 넘어서 신화가 되어 가고 있는 대장장이 그리드가 검성 크라우젤과 함께 고안해서 만든 무기의 도안입니다.
중검의 형태이며, 손잡이 부분에는 너클 보우가 달려 있습니다. 손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너클 보우는 마치 둥근 왕관을 소형화시킨 것처럼 디자인되어서 멋이 뛰어납니다.
손잡이 조금 윗부분 검날이 좌우로 뻗어 나가, 얼핏 보면 손잡이가 2중으로 달린 것 같은 착각을 줍니다. 이 특수한 검날은 변칙적인 공격을 가능하게 해 줌과 동시에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수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의 재질로는 만년석, 혹은 블러드 스톤을 사용하며, 재질에 따라서 성능이 크게 달라집니다.
상당한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근력이 낮은 사람은 휘두를 수조차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만, 균형적으로는 흠잡을 구석이 전혀 없는 매우 이상적인 중검입니다.
무게:6,800~13,900
사용 조건:예측 불가
‘만년석으로 제작했을 때는 최소 능력치가 적용되는 거고, 블러드 스톤으로 제작했을 때는 최대 능력치가 적용되는 거겠군. 반면 무게는 만년석을 사용했을 때가 압도적으로 높을 거고.’
완성된 도안을 확인하는 그리드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핀다.
아직 옵션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단순 능력치만 놓고 봤을 때 묵사발은 무척 뛰어난 무기였다.
에픽 등급의 한손 검이 최소 390의 공격력과 100의 방어력을 보장받는다? 300레벨 제한의 동급 아이템들 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성능이다.
‘그리고 묵사발의 레벨 제한은 무척 낮을 가능성이 높아.’
크라우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검이란 ‘쓰기 편한 검’이었고, 그리드 또한 크라우젤의 이상에 초점을 맞췄다. 즉, 묵사발은 높은 범용성과 실용성을 겸비했다는 뜻이다.
재질의 특성 탓에 무게가 높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근력을 확보한 사람들은 묵사발을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었다.
‘만년석의 단가가 높아서 병사들에게까지 보급하는 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테고……. 일단은 기사들에게 순차적으로 보급해 보자.’
양산형 그리드 무기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강력한 무기다. 유니크 등급이라도 떴다가는 어지간한 전설 무기급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이를 무장한 템빨국 기사들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생각하며, 기뻐하는 그리드에게는 이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제작이다.
“크라우젤, 백호의 숨결을 줘.”
“음.”
동대륙에서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거나 국가대항전에서 금메달을 따지 않는 이상 획득할 수 없는 제작 재료.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녔을 그 백색의 구슬을 크라우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여전히 백린목이 타오르고 있는 용광로 앞에서, 그리드는 주작궁과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을 제작하던 때를 떠올린다.
‘신화급 무기를 제작하기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은 코어 아이템의 강화야.’
주작궁 때는 주작의 숨결을 강화했었고, 열망의 무아검 때는 벨리알의 뿔을 강화했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무척 고단한 작업이었다.
최소 3일 이상, 길면 일주일 동안을 한 가지 아이템만 두드려 대는 작업, 심지어 섬세한 기술까지 필요하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템의 ‘저항’이었다.
주작의 숨결은 망치로 때릴 때마다 뜨거운 불꽃을 토했었고, 벨리알의 뿔은 망치로 때릴 때마다 폭발을 일으켰었다.
그리드가 높은 방어력과 체력을 겸비하지 않았다면, 주작의 숨결과 벨리알의 뿔 모두 끝까지 제련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망치질 몇 번 하다가 죽었을 테니까!
‘백호의 숨결 또한 저항하기는 마찬가지겠지.’
또한 이놈도 한 성깔 한다고 가정할 경우 제련에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참 쉽지 않은 일이구나.’
고통을 인내해야 할 생각을 하니 심지어 두렵기까지 하다.
그리드는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후우, 몇 번이나 심호흡한 후 몸을 푸는 그리드의 표정이 비장했다.
크라우젤과 판미르는 그 모습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가 단지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긴장한 거라고 여겼다. 그가 아이템 제작이라는 행위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못했다.
당연하다.
여태까지 그들이 보고 들은, 그리고 경험했던 대장장이들은 모두 평범했으니까.
그래, 대부분의 대장장이들은 ‘제작’ 버튼 하나만 눌러서 아이템을 양산하는 실정이다. 수작업의 대가라고 자부하는 판미르조차도 온갖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이 현실인바, 그리드가 하나의 아이템을 제작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지 그들은 섣불리 예측할 수 없었다.
“좋아. 제작을 시작해 볼까.”
준비가 끝났으니 행동은 빠르다.
그리드는 백호의 숨결을 용광로 안에 집어넣었다. 곧이어 이어지는 풀무질이 용광로의 온도를 급속도로 높이자, 백색의 구슬이 점차 열기에 물들어 갔다.
[온도가 너무 높습니다!]
“큭……!”
숨죽인 채 그리드를 지켜보던 판미르가 신음을 토한다.
백린목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리드가 용광로의 온도를 계속해서 높이자, 그를 몇 미터나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상을 입은 것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팔뚝을 부여잡으면서 한 걸음 물러서던 판미르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을 제외한 대장장이들, 이미 모두 그리드의 용광로로부터 한참을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화이트를 비롯한 4대 장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인급 대장장이들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온도라고?’
이토록 높은 온도를 순식간에 발생시킨 그리드의 풀무질 솜씨가 놀라울 따름!
판미르가 감탄을 넘어서 경악하는 그때.
푸우욱!!
칙! 치이이이익!!
붉게 물든 구슬을 꺼낸 그리드는 담금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최소 100리터 규격의 물통에 가득 찼던 물이, 고작 주먹만 한 구슬이 들어오는 순간 용암처럼 펄펄 끓었다.
사방으로 튀는 뜨거운 물방울을, 여태껏 유일하게 그리드의 바로 곁에서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크라우젤이 <초감각>에 의지해서 회피한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오오! 과연 검성 님……!”
크라우젤의 화려한 움직임에 감탄한 대장장이들이 탄성을 내지르자 크라우젤은 머쓱해졌다.
‘아이템 제작이라는 것이 본래 이토록 긴박하고 위험한 일이었나?’
터엉!!
제련한 구슬을 모루 위에 올려놓는 그리드.
여전히 비장하다. 마치 전쟁터의 무사 같다.
꿀꺽, 기세에 눌린 크라우젤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따아아아아앙-!!
그리드가 드디어 단조질에 돌입했다. 그의 망치가 구슬, 그러니까 백호의 숨결을 강타함과 동시에.
콰르르르르륵-!!
여태까지 잠잠히 있던 백호의 숨결이 포효했다. 부르르, 진동하더니 뿌드득, 뿌드득!! 날카로운 돌의 가시를 고슴도치처럼 토해 냈다.
“큭……!”
그리드의 뺨과 목, 그리고 손목에 긴 상처가 남는다.
백호의 숨결이 방출한 돌의 가시들을 완전히 회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드……!”
“전하!!”
당황한 크라우젤과 사색이 된 대장장이들이 소리친다.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곳은 오직 그리드만을 위한 전쟁터.
그리드의 허가 없이는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 존재하지 않는다.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낸 그리드는 실소하고 있었다.
“이 자식 이거, 역대급이네.”
주작의 숨결은 물론이고 대악마의 뿔보다 훨씬 더 흉포한 성질을 지녔다.
숨결이 이 정도일진대, 이 숨결을 토해 낸 백호 본인의 성깔은 얼마나 더러울까?
‘이런 놈하고 두 번 연속으로 싸우는 건 무리야.’
판단하면서, 잠시 단조질을 중단한 그리드가 인벤토리로부터 자신의 백호의 숨결을 꺼냈다. 그리고 곧장 용광로에 집어 던졌다.
‘그냥 한 번에 싸우는 편이 낫지.’
그렇다.
그리드는 2개의 백호의 숨결을 동시에 제련하고 단련할 계획이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그리드는 앞으로 2주 내에 제국 황도에 가야만 했다. 그때쯤이면 성벽이 무너질 테니까. 그 전까지 아이템 제작을 다 끝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크라우젤, 2개의 숨결을 동시에 제련하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뭐든지 말만 해라.”
“물약 좀 먹여 줘.”
“……?”
잠시 후.
따아아아아앙-!!!
모루 위에 2개의 백호의 숨결을 나란히 올려놓은 그리드가 단조질을 재개했다.
백호의 숨결들은 망치에 얻어맞을 때마다 대량의 가시를 방출했고, 그리드는 상처를 입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망치를 휘둘렀다. 그리고 상처가 누적되는 그에게 크라우젤은 달려가서 생명력 회복 물약을 먹여 주었다. 사방으로 뻗어지는 가시들을 초감각으로 회피하면서 말이다!
따앙-! 따앙!!
“크라우젤! 물약!”
“마셔라. 왼쪽이다. 피해라.”
“큭! 회피에 또 실패하고 말았어!”
“이미 날아오기 시작한 공격을 눈으로 좇고 회피하니까 어려울 수밖에. 적(?)의 동작을 주시하고 공격이 날아올 방향을 미리 예측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봐.”
“응, 알았어!”
따앙!! 따앙!! 따아앙-!!
“…….”
정말로 치열하게 단조질에 열중하는 그리드와, 그의 주변을 날아다니다시피 배회하며 보좌하는 크라우젤.
당대의 지존과 전대의 지존이 힘을 하나로 모아 싸우는(?) 감동적인 모습을 넋 나간 채 지켜보던 판미르가 뒤늦게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아이템 제작하는 거 맞지?’
착실하게 완성되어 간다.
두 번째 신검(神劍)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