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35화 (630/1,794)

템빨 37권 - 20화

“제대로 처리한 거 맞나?”

“네. 분부하신 대로 우리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습격하였습니다.”

“흐음… 그런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그리드가 본국으로 귀환한 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적기사단과 임모탈이 그를 습격한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라는 뜻이다.

한데 템빨국은 아직까지도 그 어떠한 입장도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의 왕이 습격을 당했는데도 이 사실을 따지기는커녕 공표조차 않다니…….”

단지 두렵다는 이유로 쉬쉬할 만한 문제가 아닌바, 어떤 꿍꿍이속이 있는가 싶다.

톡톡.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해 보던 리미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놈들이 이쪽의 의도를 간파한 건가?”

제국이 황제파와 황비파로 분열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템빨국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템빨국에 유능한 책사가 존재한다면, 그는 습격의 배후가 황제가 아닌 황비임을 간파했을 것이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야.”

황제의 입지를 약하게 만드는 데 템빨국을 이용하려고 했던 이번 계획, 수포로 돌아갔다고 봄이 옳다.

“하여튼 쉽게 풀리는 일이 없군.”

판단하며 입맛을 다신 리미트가 메르세데스에게 눈짓했다. 이만 물러나라는 신호였다.

꾸벅, 인사한 후 집무실에서 나온 메르세데스가 한숨을 쉬었다.

‘단장에게 있어서 폐하는 이제 확실한 적이야.’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만나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후.

메르세데스는 지난 일주일 동안 검공 리미트의 과거를 캐고 있었다. 12년 전 그날의 비극에 리미트가 어디까지 개입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철저히 조사 중이었다.

하지만 최대의 권력가인 칠공작의 뒤를 캐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리미트의 신상에 접근하려고 하면 할수록 온갖 방해 요소가 발생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네 번째 기사였다.

“메르세데스 경.”

“규라탄 경?”

적기사단에서 ‘네 번째’라는 직책은 특수하다. 외적으로부터 적기사단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으며, 평시에는 감찰관의 업무를 수행한다. 황제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해야 하는 적기사단의 본질이 퇴색되지 않게끔, 네 번째 기사는 같은 적기사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감시했다.

그리고 당대의 네 번째 기사 규라탄이 바로 12년 전, 피아로를 배신자라고 판결했던 인물이다.

피아로를 신뢰했던 메르세데스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은연중에 의심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의심하는 수준이 아니라 명백한 혐오와 적대감을 느꼈다.

전대 적기사단을 붕괴시킨 진정한 흑막. 야탄교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인물.

아스모펠 덕분에 규라탄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까.

싱긋.

복도에서 규라탄을 마주 보고 선 메르세데스가 미소 짓는다. 적의 따위 조금도 노출하지 않았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오래간만에 뵙는 것 같네요.”

“한동안 황도를 떠나 있었소. 세 번째 기사 로렉스와 다섯 번째 기사 디아의 죽음에 대해서 재조사를 진행하고 있었거든.”

“…….”

로렉스와 디아.

둘 모두 무패왕의 후예에게 살해당한 기사들이다.

그들 또한 늘 피아로를 그리워했었다.

일주일 전 해후하였던 피아로의 모습과 로렉스, 그리고 디아를 동시에 떠올리자 메르세데스는 잠시 울컥했다.

만약 로렉스와 디아가 살아 있었다면… 만약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됐더라면…….

‘당신들은 기쁨과 슬픔에 밤새 울었겠지요.’

큰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료들을 그리워하는 메르세데스의 귓가에 규라탄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우연히 귀공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되었지. 메르세데스 경, 귀공께서는 근신 기간 동안 발할라에 다녀온 것 같더군?”

“…….”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서 무패왕의 후예를 쫓았던 거요?”

“…맞아요.”

“결과는?”

“복수를 하지 못했죠. 무패왕의 후예를 찾지 못했거든요.”

메르세데스는 루반나에서 직접 무패왕의 후예와 싸웠고, 그를 패주시킨 경력이 있다.

무패왕의 후예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려 2개월 동안 발할라에 잠입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패왕의 후예라고 볼 만한 인물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근신 명령을 어긴 것으로 모자라서 복수조차 하지 못했다라……. 만약 귀공이 복수에 성공했다면 황제 폐하께 선처를 부탁드릴 수도 있었겠지만 불가능하겠군.”

“어쩌자는 거죠?”

“어쩌긴 뭘 어째? 귀공이 근신 명령을 어겼다는 것을 폐하께 보고해야 하지 않겠소?”

“당신……!”

“잊지 마시오. 귀공은 첫 번째 기사로서 제국의 모든 기사에게 귀감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요. 한데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해? 간과할 수 없지.”

“읏……!”

“귀공, 이번에 또다시 근신 명령이 내려온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그 명령을 어기지 마시오. 제아무리 첫 번째 기사라도 폐하께서 두 번 봐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필이면 12년 전의 비극을 조사해야 하는 이 시점에 또 근신 처분을…….’

최악이다.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자신의 잘못이 발각되었는지, 재수도 없다.

‘아니… 우연이 아니야.’

이를 갈던 메르세데스가 깨닫는다.

이 타이밍, 규라탄이 의도한 것임을.

‘이자는 내가 근신 명령을 어겼던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일부러 묻어 두었던 이유는 지금처럼 적절한 때에 써먹기 위함이었으리라.

‘이자는 알고 있어. 내가 12년 전의 비극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제 더 이상 적의를 숨길 수가 없다.

메르세데스가 규라탄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자, 규라탄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뭐, 적기사단은 걱정 마시오. 귀공이 근신하는 동안 내가 루카스 경을 도와 잘 관리하고 있겠소. 아, 루카스 경은 마침 출정이 잡혔던가? 나 혼자 관리해야겠군.”

“…….”

당장 욕설이라도 날리고 싶다. 아니, 그 목을 베어 버리고 싶다.

메르세데스는 강력한 욕구를 느꼈지만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진실을 밝혀내고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도 전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말씀을 종합해 보자면.”

템빨국 수도 라인하르트.

라우엘이 칠판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최상단에는 양반 가람의 이름이 적혔다.

“양반 가람의 무력을 최상급이라고 규정할 경우, 제국의 칠공작들은 상급의 실력을 갖췄고,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는 중상급, 아스모펠 님은 중급, 그리고 전하와 크라우젤 님의 무력은 하급으로 분류된다는 뜻입니까?”

“맞아.”

“피아로 님은요? 당연히 최상급인가요?”

“레벨만 봤을 때는 메르세데스와 같은 중상급으로 분류하는 게 타당해. 실제로 메르세데스가 피아로와 호각을 겨뤘었고.”

“하지만 피아로 님께는 필멸이 있잖습니까?”

“네임드 NPC 중에는 네임드 보스처럼 필멸의 즉사를 저항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흠, 하지만 저항한다고 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건 사실이지. 피아로는 칠공작급으로 분류하는 게 맞겠다.”

“필멸을 감안해도 양반보다는 아래라…….”

세계관의 파워 피라미드를 알아 두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진지한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던 라우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가람이라는 놈이 그렇게 강한데 전하께서는 무슨 수로 놈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거죠?”

“말하지 않았었나? 놈이 방심했던 게 가장 컸고, 운 좋게 신장이 터져서 연살파극을 2연타로 날렸거든.”

“그럼…….”

라우엘이 칠판 가장 하단에 위치한 그리드의 이름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가람과 칠공작 사이에 그리드의 이름을 다시 적었다.

“운 좋을 때 전하의 위치는 이 정도 아닐까요?”

“…….”

“전하.”

저게 장난하나?

생각하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신중해지신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기를 잃지는 말아 주십시오.”

“패기를 잃은 게 아니야. 깊이 생각해 본 끝에 내린 현실적인 자가 진단이지.”

“본인의 생각을 무조건 신뢰하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당신은 안 똑똑하잖아요?”

“…….”

“전하는 스스로 측정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십니다.”

라우엘은 확신한다.

“레벨만 올리시면요. 이참에 네임드 NPC보다 레벨을 높게 유지하시고 렙빨까지 갖추시죠?”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임드 NPC들의 레벨이 오르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뻔히 알잖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자연히 상승하는 네임드 NPC들의 레벨은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이 오를 때마다 보정 효과를 받는다. 플레이어는 네임드 NPC의 레벨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 아니 규칙이었다.

하지만 라우엘의 생각은 달랐다.

“전하는 본인의 레벨 업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잊으셨습니까? 네임드 NPC가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면, 전하께서는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을 훨씬 더 웃도는 수준으로 레벨을 올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

“오늘부터 당장 갓 핸드랑 노에, 랜디, 그리고 템빨골들을 이용해서 무한 사냥 매크로 돌리도록 하세요. 특히 템빨골 말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쓸모없는 해골바가지로 방치하실 생각입니까? 어휴, 나였으면 걔들 벌써 진즉에 데스나이트랑 리치로 만들었겠네.”

“…….”

라우엘은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리드가 레벨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템빨골을 활용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조언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을 잊지 마시고요.”

목숨이 걸린 긴박한 순간에도 무한한 사고를 반복할 수 있게끔 수련한다면.

“어지간한 천재보다 나아지실 겁니다.”

“돌대가리라서 그런지 머리 굴리기가 어려워. 특히 몸을 움직이는 동시에 생각하는 게 너무 힘들더라.”

한탄하는 그리드에게.

“진짜 돌대가리는 아예 굴러가지도 않아요. 전하는 돌대가리가 아니라 새대가……. 아니, 죄송합니다.”

“때려도 되냐?”

“죄송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가 진심으로 질색하는 라우엘이었다.

그리드에게 한 방 맞았다가는 골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았으니까!

***

제3회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보름이 지난 날.

국가대항전 메달리스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템이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제3회 국가대항전 메달 획득 보상>

메달리스트 본인들이 갖기를 희망했던 상품이 담긴 선물 박스다.

그리고 그리드가 원했던 보상은 당연히 완제품이 아니라 아이템 제작 재료였다.

[<청룡의 숨결>을 획득하였습니다.]

[<백호의 숨결>을 획득하였습니다.]

[<현무의 숨결>을 획득하였습니다.]

“좋아.”

배틀 필드 우승 보상과 2개의 금메달 보상을 차례대로 획득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쩌면 또 새로운 신화급 아이템을 제작하기 직전의 순간인 것이다. 들뜨지 않을 리가 없다.

<청룡의 숨결>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청룡의 축복을 받습니다.

전격 속성 내성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아이템에 강력한 청룡의 기운을 불어넣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전격 속성이 강한 아이템에만 귀속시킬 수 있습니다.

무게:2

<백호의 숨결>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백호의 축복을 받습니다.

땅 속성 내성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아이템에 강력한 백호의 기운을 불어넣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땅 속성이 강한 아이템에만 귀속시킬 수 있습니다.

무게:2

<현무의 숨결>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현무의 축복을 받습니다.

물 속성 내성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아이템에 강력한 현무의 기운을 불어넣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물 속성이 강한 아이템에만 귀속시킬 수 있습니다.

무게:2

“아주 좋아!”

청색과 백색, 그리고 흑색의 아름다운 구슬 3개를 손에 쥔 그리드가 환희에 휩싸인다.

그는 주작의 숨결을 강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3개의 숨결을 단련하고 강화한 뒤, 템빨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빨리 더 강해져서 열렙하러 가자!’

의욕 충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망치를 거머쥐는 그리드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그리드, 약속은 지키리라 믿는다.”

“…너?”

손님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다름 아닌 천외천.

검성 크라우젤이었다.

그는 평소 이미지와 안 어울리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 만들어 줄 거지?”

“그, 그래…….”

이날만 기다렸던 건가?

보상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눈앞에 나타난 크라우젤을 보아하니, 이미 진즉부터 라인하르트에 대기하고 있었던 눈치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

피식 웃는 그리드에게 크라우젤이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최근에 좋은 사냥터를 발견했다. 원한다면 알려 주지.”

“그것참, 고맙…….”

“몬스터 한 마리를 사냥할 때마다 10분씩은 쉬어야겠지만.”

의미심장한 말은 덤이다.

‘사냥터 난이도가 얼마나 높기에?’

기대감과 긴장감에 휩싸이는 그리드에게.

“그리고 말인데, 내가 임모탈을 52명 죽였다. 그 보답으로 갑옷과 부츠도 만들어 줄 수 없겠나?”

“…5, 50명?”

“52명. 한동안 타이탄에 살았지. 원한다면 인증 샷도 보여 주마.”

“…….”

과연 천외천이다.

가공할 만한 실력은 기본이고 철두철미하기까지 하다.

그리드는 2개의 숨결과 소량의 아다만티움을 꺼내는 크라우젤을 보며 혀를 내둘렀고, 용광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하는 그를 바라보는 크라우젤의 눈빛은 더없이 상냥했다.

‘상처는 잘 극복하고 있는 건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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