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19화
템빨국은 플레이어 최강의 세력인바,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본이다.
템빨국을 견제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강자의 숙명을 간과했다. 하여,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고 적의 침입을 허용해 버린 것이다.
그리드는 생각한다.
칸의 슬픈 최후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라고. 칸은 내 무지의 희생자라고.
칸의 사후.
그리드는 지혜에 집착하게 되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칸의 최후가 그토록 쓸쓸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리드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당면의 과제로 삼았다.
타고난 지능이 부족한 까닭에 지식의 축적이 느리다고는 하나, 자신의 유일한 장점인 끈기를 이용해서 ‘무한한 사고(思考)’를 반복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리드는 믿었다. 아니, 단순히 믿는 수준이 아니라 반드시 실현시키겠노라 마음먹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그리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사고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지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몇 배로 생각했다. 포기를 모르는 근성을 토대로 어떤 상황과 직면할 때마다 계속, 계속, 계속해서 생각했다. 돌대가리를 끊임없이 굴렸다.
적기사단과 임모탈의 습격을 받았던 시점에 피아로만 소환했던 이유? 아그너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본 결과, 그리드는 자신을 습격한 적기사단과 임모탈은 미끼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 미끼에 낚여서 모든 기사를 소환했다가는 본국의 전력이 약화되고, 또 한 번 빈집을 털릴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차적으로 피아로만 소환했다.
메르세데스의 종자를 처리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드가 후환을 염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리해서가 아니라 생각해서였다.
그리드를 지치게 만드는 요소다.
고민 없이 선택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타인에게 의지했을 때와는 다르다. 사고의 가속은 상상 초월의 에너지 소모를 발생시켰다.
스르륵.
명령을 받든 카심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후우.”
녹초가 된 그리드는 마차에 몸을 기댔다. 그는 마치 강력한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한 직후처럼 진이 빠져 있었다.
그의 상태를 헤아린 피아로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피아로는 그리드가 대견했다. 그토록 애틋하게 여기던 칸의 죽음에 좌절하기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발전한 그리드가 존경스러웠다.
황제와의 대면 또한 필시 잘해 냈으리라.
이와 같은 믿음이 생길 정도다.
미소 짓는 피아로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종자만 처리하면 되는 거 맞겠지?”
그리드는 적기사단의 군기를 목격했다.
그들은 피아로의 출현에 동요하면서도 메르세데스의 명령을 즉각 수행했었고, 아스모펠의 이야기를 의심하면서도 메르세데스의 판단에 반발하지 않았다.
하여, 최소한 오늘 이 자리에 있던 적기사들은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누설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품었다.
하지만 종자는 미지수다. 멀찍이 떨어진 채 말을 지키고 있던 녀석은 어떤 놈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카심에게 놈을 처리하라고 명령한 이유다.
피아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의 일은 메르세데스가 스스로 판단하겠지요. 기사들과 종자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자와 믿을 수 없는 자를 선별하여 처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를 무척 신뢰하는군.”
“놀랍도록 현명한 소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자로 들였다.
“그리고 제 기대대로 성장했더군요. 그녀는 훗날 제국의 새로운 기둥이 될 겁니다.”
사실, 그리드의 부름을 받고 달려와 메르세데스와 조우하였을 당시 피아로는 무척 놀랐다.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당연하다.
세뇌당했던 시절의 아스모펠은 적기사들의 9족을 모두 멸하지 않았는가? 아스모펠은 후환을 조금도 남겨 두지 않았다. 하물며 피아로의 종자였던 메르세데스가 살아남았을 거라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한데 아스모펠은 메르세데스를 살려 두었다.
그 이유.
‘무의식중에도 제국의 미래를 염려했던 걸 테지.’
세뇌당했던 시절의 아스모펠조차도 죽이기 아까워했던 인재.
그것이 바로 메르세데스다.
아련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피아로에게.
“당신의 말을 들으니까 더욱더 욕심이 생기는군.”
그리드가 선언해 보였다.
“나는 메르세데스를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겠어.”
메르세데스와 짧게 겨루었던 그리드는 전례 없는 압박감에 휩싸였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행동이 읽히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녀의 기술이 뛰어나서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아니다.
그녀는 상대방의 행동을 ‘예지’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기캐야.’
그리드는 단언했다.
메르세데스는 피아로와 같은 부류다.
보통의 플레이어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
초네임드급 NPC다.
그리드는 반드시 그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피아로의 생각 또한 같았다.
오래간만에 조우한 메르세데스와 합을 교환하였을 때, 피아로는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필멸밖에 없음을 느꼈다.
‘그리고 보다 시간이 지나면.’
그녀의 혜안은 필멸의 운명을 거부하는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다.
피아로의 욕심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맞습니다, 전하. 그녀는 반드시 전하께서 거두셔야 합니다.”
“음.”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
피아로에게 황제와 조국에 대한 미련은 이제 조금도 남지 않은 것인가, 라는 질문을 그는 삼킨다.
신뢰였다.
“라인하르트로 귀환한다.”
그리드가 생각하기로, 이번 습격에 황제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무척 적었다. 황비 마리의 수작일 공산이 컸다.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크다. 어서 빨리 라우엘과 만나 상의해 봐야 한다.
왕명을 내린 그리드가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지친다.’
제국에 있는 하루가 마치 1년 같았다.
한숨 돌리며 의자에 기대앉은 그리드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시야에 아스모펠이 걸렸다. 마차의 우측을 걷는 아스모펠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신의 죄의식은 마음을 넘어서 영혼에 각인된 거겠지.’
저건 구원이 어렵다.
피아로에게는 용서받았을지언정 이미 죽은 적기사단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용서받을 길이 없으니까.
그리드가 예상하기로, 아스모펠은 황비 마리에게 복수를 완수하는 순간 스스로 목숨을 끊을 공산이 컸다.
‘…가만.’
안타까운 마음에 슬픈 표정을 짓던 그리드가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전대의 적기사들, 전원 다 죽은 게 맞는 건가?’
배신자 피아로에게 호응한 반역자들.
전대 적기사단에 대한 세간의 평가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대 적기사들이 처형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래, 대부분.
전부는 아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남아 있다.
‘어쩌면 아스모펠에게 속죄의 기회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즉각 아스모펠에게 명령했다.
“아스모펠, 당신은 오늘부터 대륙 전역을 돌면서 전대 적기사단의 생존자를 찾아내도록 해.”
“예? 그, 그게 무슨……?”
놀라움과 두려움.
전혀 예상치 못한 명령에 당황하는 아스모펠의 얼굴이 잿빛이 된다.
그의 흔들리는 시선을 똑바로 응시한 그리드가 설명했다.
“당대의 적기사단조차 흡수할 여지가 생긴 마당이야. 전대의 적기사단을 흡수하는 일도 영 불가능하진 않을 거 아니야. 그렇지?”
“전대 적기사단의 생존자들을 전하께서 거두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
“그들을 찾아서 섭외하는 역할이 과연 제게 적합할까요? 피아로가 아닌 굳이 제게 임무를 맡기시는 이유는…….”
아스모펠이 도중에 말문을 닫았다. 뒤늦게 그리드의 의도를 간파한 그는 감히 ‘속죄’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피아로는 당신을 용서했어.”
“…….”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그들 모두 피아로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아꼈을 테니까.”
“…….”
“찾아봐. 그리고 대화를 나눠 봐.”
순전히 아스모펠을 걱정하고, 그를 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던 이 명령, ‘전대의 적기사단을 찾아라’.
어쩌면 템빨국에 ‘이전 시대의 강자’들을 불러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생각하는 그리드의 마음이, 인정이, 현재 템빨국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단편적인 예다.
“늘 행복해져라.”
“…….”
“내가 받든 칸의 유지다. 우리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자.”
“…명심하겠나이다.”
걸음을 멈춘 아스모펠이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
그리드를 태운 마차가 조금씩 멀어지고, 급기야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속죄의 여행을 떠나게 된 그를 피아로가 응원했다.
‘힘내시게.’
돌아올 때는 부디 옛 전우들과 함께이기를.
***
<환국의 백성(1)>
★히든 전직 퀘스트★
치우의 시련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춰야만 합니다.
우선 범인의 수준을 탈피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1):400레벨을 달성할 때까지 사망하지 않을 것.
*퀘스트가 유지되는 동안 사망하지 않고 20레벨을 올릴 때마다 대량의 추가 능력치를 획득합니다.
*사망할 경우 이때까지 얻은 추가 능력치를 모두 상실합니다. 잃은 능력치는 복구할 수 없습니다.
*사망할 경우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 2로 변경됩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2):400레벨을 달성할 때까지 사망 횟수가 5회 이하일 것.(사망 횟수 2/5)
*마지막 기회입니다. 2번째 퀘스트 클리어 조건까지 실패할 경우 치우의 시련에 도전할 자격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지난날 동대륙을 방문했던 베라딘은 처음부터 환국과 양반에게 집중했다. 동대륙을 지배하는 세력과 연이 닿으면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에서였다.
그 결과 플레이어 최초로 환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그는 무려 <양반>으로 전직할 수 있는 히든 전직 퀘스트를 얻었다.
최초 방문자 특혜로 양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준 셈이다.
당시 베라딘의 레벨은 290.
그는 300레벨이 훌쩍 넘는 지금까지 죽지 않고자 부단히도 애써 왔고,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수준의 추가 능력치를 확보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두 날려 버렸다.
단순한 직업적 유희를 위해 템빨국을 건드렸다가 벌써 2번이나 죽었다.
“이거 어쩌면…….”
마른침을 삼키는 베라딘의 안색이 창백하다.
그리드가 ‘첫 번째’라고 했던 말이 자꾸만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놈은 정말로 자신을 몇 번이고 찾아 죽일 기세였다.
“…당분간 숨어 지내야겠군요.”
본인을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믿어 왔던 베라딘이다.
상대가 누구라도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해 왔던 그에게 있어서 상식을 위반하는 그리드의 템빨과 부하빨은 새로운 충격이며 공포였다. 어지간해서는 그리드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베라딘 인생 최초로 타인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 내가 고작 그런 평범한 사람에게 이딴 꼴을……!’
꽈드득!
분노에 몸을 떨며 이를 가는 베라딘.
그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느낀다.
그리드가 소환한 농부를 목격한 적기사들의 반응이 영 거슬렸다.
‘그들이 놀랐던 이유가 뭐지?’
네크로맨서의 전투 포지션은 후방이다. 몸을 지킨답시고 너무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던 까닭에 베라딘은 그들의 대화 내용을 엿듣지 못했다.
낭패다.
‘뭔가 있어. 뭔가…….’
농부의 정체, 어쩌면 작금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베라딘은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았다.
같은 시각, 타이탄 외곽.
채애애애앵-!
어둠 속에서 날아든 단도를 메르세데스의 검이 막아 냈다.
그녀가 나서 주지 않았으면 지금쯤 목이 꿰뚫렸을 거라는 사실, 뒤늦게 깨달은 스카이가 허겁지겁 방패를 챙겨 들었다.
메르세데스는 어둠 너머를 노려보고 있었다.
“템빨왕 전하께 전하세요. 당신께서 염려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겠다고요. 뒷일은 제게 맡기도록 하세요.”
-…알았습니다.
“……?”
스카이는 아무런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음침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지? 왜 내가 암살을 당할 위기에 놓인 거지?’
겁에 질려 있는 스카이에게 메르세데스가 말한다.
“당신은 오늘부로 파면입니다.”
“예……?”
“두 번 다시는 황궁에 발을 들이지 마세요.”
“그, 그게 무슨……!”
갑자기 이 무슨 생뚱맞은 일이란 말인가?
당황한 스카이가 사정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전이었다.
[세컨드 클래스 <첫 번째 기사의 종자> 자격을 상실하였습니다.]
[진행 중인 적기사 퀘스트가 모두 소멸합니다.]
[황궁 입장 자격을 상실합니다.]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와 쌓아 왔던 호감도 7이 0으로 초기화됩니다.]
“어……? 어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사색이 된 스카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메르세데스가 자신의 음침한 속내를 눈치챈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홀로 남겨지고 한참이 지난 후.
곰곰이 생각해 보던 스카이는 이번 사건의 배후에 그리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 개새끼가!!”
그리드 탓에 메르세데스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이룰 수 없게 된 스카이가 처음 느낀 감정은 극도의 분노였다.
하지만 잠시다.
“미, 미친…….”
스카이는 이제 분노가 아닌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단지 입김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그리드의 초월적인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지존의 존재감은 이전까지의 지존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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