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17화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 있노라니.
황실은 영원할 것이며, 백성은 안심할지다.
한때 제국 전역에서 유행하였던 노래의 한 소절이다.
검호 피아로와 화검(華劍) 아스모펠.
제국이 낳은 두 영웅을 칭송하는 이 노래를 듣고, 부를 때면 제국의 신민들은 큰 용기와 희망을 얻었었다.
어린 시절의 메르세데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 또한 두 영웅의 찬가를 습관처럼 흥얼거리면서 자연스럽게 기사의 꿈을 키웠다.
언젠가 반드시 두 영웅과 같은 적색 갑주를 입겠다는 일념으로, 그 어떤 고난과 시련일지라도 이겨낸 사람이 바로 메르세데스인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12년 전의 비극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피아로!!”
“....?!”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이름.
이제는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죄악이 되는 이름이 그리드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순간.
번쩍!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고, 그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흙과 땀에 찌든 허름한 천옷 차림의 중년인이었다.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눌러 썼고, 굳은 살 가득 배긴 손에는 낫과 호미를 쥐고 있다.
영락없는 농로의 행색이었으나, 메르세데스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았다. 12년 만의 해후가 무색하게도, 그녀는 상대방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피아로....!”
검호, 영웅, 기둥, 황제의 검, 그리고 단장, 스승....
과거의 메르세데스가 피아로를 지칭할 때 사용하던 호칭들은 이제 없다.
‘배신자’라는 낙인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지금의 그녀가 피아로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치는 그녀의 검을 호미로 방어, 그리드를 지켜낸 피아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혜안의 소녀가 이제는 어엿한 기사가 되었구나.”
읊으며,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는 피아로의 눈빛에서 단 한 치의 후회도, 아쉬움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를 본 메르세데스의 아름다운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당신....!”
어째서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가?
어떻게 그리도 당당할 수 있는가?
왜 내가 아닌 템빨왕의 곁에 서는가?
설마.
“전하, 무사하십니까?”
“덕분에.”
“제가 모시겠나이다.”
“설마....”
당신의 마음속에서 제국은. 나는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익....!!”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힌 메르세데스가 이를 악 물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
“제가 지난 12년 동안 몇 번이고 바라였는지 아시나요?”
참기 어렵다.
결국, 메르세데스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드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는 피아로의 모습을 보면서, 피아로에게 있어서 자신은 ‘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매일.... 정녕 매일 기다렸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나타나서, 배신은 누명이었노라 말해주시기를.”
“.....”
“근데 지금의 그 모습은 뭔가요? 나의 단장님은.... 나의 스승님은 어디로 가셨나요!!”
쩌렁쩌렁!!
메르세데스의 앙칼진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진다.
덕분에 적기사단 모두가 피아로를 목격하게 되었다.
“피, 피아로 님...?”
“말도 안 돼.... 어째서 이곳에 피아로 님이...?”
혼란 속에 전쟁이 멈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베라딘과 임모탈 소속원들이 모두 당황했다.
적기사단들의 면면을 살피는 그리드 또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째서 당대의 적기사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그리드가 알기로 피아로가 제국에서 쫓겨난 것은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당시에 피아로를 따르던 적기사단 대부분이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몰살당했다고 들었다.
하여, 그리드는 당대의 적기사단을 피아로와 하등 관계가 없는 새로운 집단으로 보고 있었다. 세상사람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한데 이들의 반응을 보면 썩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왜?
그리드의 의문을 메르세데스가 해소해준다.
“당신을 보고 꿈을 키웠던 소년, 소녀들이.”
“.....”
“당신의 말 한 마디 가르침에 큰 힘을 얻고 정진하였던 젊은 기사들이 이제는 적색의 갑주를 입고 있습니다.”
“.....”
“그 누구도 당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못했지만, 우리 모두가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언젠가 당신이 우리 앞에 나타나 누명을 뒤집어썼을 뿐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고, 당신이 제국을 배반한 것이 정녕 사실이라면 시신이 되어서 돌아와 주기를 바랐어요.”
최소한 장례라도 치러주고 싶었다.
슬픈 낯으로 웃는 메르세데스의 떨리는 음성이 차츰 진정되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도 어느새 완전히 메말랐다.
“하지만 당신은 배반자가 맞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군요.”
당신이 그렇게 된 원인은, 지금 등 뒤에 숨기고 있는 템빨왕에게 있을 터.
꽈드득!
혼란을 잠재우고 이성을 되찾은 메르세데스가 이를 갈았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거대한 분노였다.
“당신을 그리워했던.... 당신을 믿고 싶었던 제 자신이 부끄럽고 원망스러워요.”
스릉!
메르세데스가 아직 뽑지 않았던 검을 뽑았다.
두 자루 양날검을 양손에 거머쥐고 나서야 비로소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템빨왕 그리드, 당신에게 제국의 영웅을 탈취한 죄를 묻겠습니다. 그리고 배반자.... 피아로를 말살합니다.”
적기사단 내에서 메르세데스의 뜻은 절대적이다.
그녀의 선언이 신호가 되었다.
피아로를 보고 망설이던 적기사들이 다시금 카심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메르세데스는 피아로에게 날아가 검을 휘둘렀다.
이때를 놓칠 베라딘과 임모탈이 아니다.
“지금!”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가자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임모탈이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새로운 언데드를 소환해서 그리드의 병사들을 덮쳤다.
베라딘이 소리친다.
“그리드! 지금 당장 모든 기사를 소환하셔야할 겁니다!!”
템빨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농부를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다면 보다 발악하라! 모든 인재를 소환하고, 그 대가로 전부를 잃어라!
씨익!
지금, 적기사단의 힘을 믿고 환희에 찬 미소를 짓는 베라딘은 모른다.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악마 벨리알의 팔을 날려버렸던 피아로의 <절구질>.
그 위력, 한낱 플레이어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피아로! 언제까지 장난칠 셈입니까! 아직도 저를 어린애로 보시는 건가요?!”
채챙! 챙!!
자신의 쌍검을 고작 호미와 낫으로 막아내는 피아로의 작태를 명백한 무시로 받아들인 메르세데스가 분노에 찬 일갈을 뱉는 그때.
“절구질.”
쿠오오오오오오오-!
인간의 크기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기둥 아니, 절구가 밤하늘에 떠올랐다. 별빛마저 퇴색시킬 정도로 찬란하게 떠올라있던 보름달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강기의 집약체였다.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다.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적기사단 전원 질색하며 자리를 이탈하는 반면 민첩성이 낮은 베라딘과 임모탈의 네크로맨서들은 제자리에 멀뚱멀뚱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심지어 베라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드디어 나왔군요. 전설의 농부가 자랑하는 최강의 기술.”
베라딘은 벨리알 레이드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보았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그리고 템빨단원들의 전력을 소상히 파악하기 위함이었고, 그 과정에서 피아로의 절구질에 대한 분석 또한 끝냈다.
“대상의 최대 생명력에 비례하는 물리 데미지를 입히는 광역 스킬, 맞지요?”
확실하다.
생명력 비례 데미지를 입히는 스킬이 아닌 이상 수십 억의 생명력을 자랑하던 벨리알에게 치명상을 입혔을 리 없다.
확신한 베라딘이 임모탈의 상위 랭커들에게 신호했다. 그들 모두 새로운 갑옷을 꺼내 입었다.
[천근의 갑주를 착용하였습니다.]
<천근의 갑주>
등급:에픽
내구력:59/59 방어력:579
*착용자의 레벨 수치와 비례하여 방어력이 상승합니다.(레벨 3당 방어력1)
*물리 데미지를 9퍼센트 경감시킵니다.
*이동 속도가 0으로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체력 수치가 20퍼센트 감소합니다.
*10초당 1의 스태미나가 하락합니다.
사하란 제국의 공습을 견디고 싶었던 페로족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갑주입니다.
착용자의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높입니다. 단, 너무 무겁기 때문에 착용자를 지치게 만듭니다. 오로지 높은 방어력을 바라고 설계한 갑옷이기 때문에 내구성도 부족합니다. 오래 착용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무게:69,900
사용 조건:레벨 250.
체력 스탯과 스태미나를 대폭 감소시키고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페널티를 지닌 최악의 갑옷!
하지만 방어력만큼은 동급 헤비 아머를 초월할 정도로 높다.
“이깟 공격 버티면 그만....!”
갑옷을 구하지 못한 하위 랭커들의 죽음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베라딘은 자신을 비롯한 상위 랭커들만 살아남아도 메르세데스를 도와서 그리드를 박살낼 수 있다고 계산했다.
일시적으로 방어력을 높여주는 값비싼 버프 물약까지 꺼내 마시는 베라딘과 네크로맨서들의 머리 위로.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절구질이 작렬했다.
피아로는 처음부터 네크로맨서들을 노리고 있었다.
언데드 군단과 싸울 때는 네크로맨서만 조지면 된다는 사실을 백전의 용사인 그가 모를 리 없는 것이다.
“크하하핫...! 하?!”
앞으로 한 걸음이다.
잠시 후면 그리드를 해치울 수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할 거대한 파장을 기대하면서 미친놈처럼 웃던 베라딘과 네크로맨서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짓뭉개지기 시작했다.
꽈직-!
꽈직!! 꽈지지지직!!
[<천근의 갑주>가 파괴됩니다!]
[<천근의 갑주>가 파괴됩....!]
[<천근의 갑주>가 파괴....!]
.....
....
강력한 무게를 싣고 떨어진 강기의 집약체는 상식에 위반되는 위력을 담고 있었다. 베라딘과 네크로맨서들이 믿고 있던 갑옷을, 그들의 육신을, 영혼을 통째로 파괴하고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사라진 숲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나무가 없어지자 휑하게 드러나는 밤하늘 곳곳으로 잿빛의 기둥들이 비산하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았던 언데드 군단 또한 흙으로 변해 땅으로 되돌아갔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내가 두 눈 뜨고 살아있는 한, 전하의 옥체는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네.”
피아로가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적기사단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옛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메르세데스의 예상대로 피아로는 적기사단을 명백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지끈!
가슴이 아프다.
우리에게 기사의 충성을 가르쳐주었던 영웅이 배반자가 되어서 칼을... 아니, 호미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끔찍하다. 기사란 이토록 덧없는 존재였는가, 생각이 들면서 회의감이 생겼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메르세데스에게 적기사들이 종용했다.
“우리만으로는 위험합니다.”
“후퇴하시는 편이.... 리미트 단장님도 납득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솔로 넘버 나이트는 메르세데스가 유일하다.
반면 피아로는 과거보다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리드와 카심도 만만찮은 실력자다.
현재 전력으로 저들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적기사단의 판단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메르세데스가 명령했다.
“좋아요. 모두 퇴각하세요.”
“메르세데스 경께서는....?”
“누군가는 퇴로를 지켜야하지 않겠어요?”
살아있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기사의 맹세를 올린 상관은 황제에 대한 충성이 아닌 배반을 강요하고 있으며, 내게 기사의 맹세를 가르쳤던 옛 스승은 이미 배반자가 되어있다.
결국, 나 또한 저들처럼 더럽혀지게 될 운명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다짐하는 메르세데스의 각오를 엿본 피아로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자들이 있다.
강한 신념을 지닌 자들이 바로 그렇다.
“네 뜻을 꺾을 순 없겠지. 좋다. 내 손으로 끝을 내주겠다.”
피아로는 그리드의 신하다. 그리드를 해치려했고, 지금도 해치려하고 있는 메르세데스를 좌시할 수 없었다.
그 재능과 신념을 알아보고 자신이 직접 종자로 거두었던 소녀를,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노라 결심한다.
하지만 그리드가 용납하지 않았다.
피아로의 표정에 깃든 슬픔을 목격한 까닭이다.
“피아로, 나는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는데?”
“전하....?”
“기사 소환, 아스모펠.”
피아로의 누명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리드가 그 이름을 외치자 적기사들의 경악했다.
메르세데스는 영혼이 출타하기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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