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16화
소쩍. 소쩍. 소쩍....
달각. 달그락.
소쩍....
그리드를 태운 마차가 숲 깊숙이 진입할수록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고요에 잠식 된 숲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이제 마차의 바퀴소리와 병사들의 발소리 뿐이었다.
“몬스턴가?”
숲에서 새와 짐승들이 자취를 감추는 것은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신호다. 이와 같은 상식, 이제는 당연히 그리드에게도 있었다.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카심이 답했다.
-타이탄의 백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숲에 몬스터가 출몰할 리 없습니다.
사람이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근처에 숨어있다.
쏴아아아아아-
어둠으로 물든 대지와 숲 전역으로 카심의 그림자가 퍼져나간다.
카심의 보고는 빨랐다.
-적입니다. 숫자는 300 이상.
“도적?”
-아니요. 칸을 습격했던 자들이 보입니다.
“....!!”
임모탈!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리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그가 마차의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크워!!
쿠워어어어어....!
딱! 딱딱!!
땅이 들썩인다 싶더니 수풀 너머로부터 붉은 안광 수백 개가 나타났다.
보름달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면서 청색의 달빛이 숲을 비추자, 수백 구의 백골이 그 흉한모습을 드러낸다.
대량의 언데드 부대였다.
전위에는 스켈레톤 나이트가, 후위에는 스켈레톤 메이지가 자리 잡은 상급 언데드 군단이다.
“당신에게 더 강한 복수심을 심어드리도록 하죠.”
저 멀리, 언데드 군단의 뒤편으로부터 청량한 미성이 들려왔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그리드가 시선을 돌리자 백발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
“베라딘....!”
칸의 최후를 고통으로 장식한 인물.
그리드가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도 더 살해한 증오의 대상!
“죽인다!!!”
쿠와아아아아앙!!
카심이 말릴 틈도 없었다.
<이상적인 단검>을 꺼낸 그리드가 <신속한 몸놀림>을 전개, 곧바로 베라딘에게 몸을 날렸다. 이상적인 단검을 회수한 그는 <땡기미>를 꺼내 쥐고 있었다.
“그리드다! 놈을 잡아!!”
“저 개자식을 잡아 죽여!!”
쿠워어어어어!!
그리드를 발견한 네크로맨서들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수십 구의 스켈레톤 나이트가 그리드를 막아섰다.
오로지 그리드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거대한 언월도와 창을 휘두르는 놈들을.
콰쾅!
쿠콰콰콰콰콰쾅!!
악한 존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리파엘의 창>으로 변신한 4자루 갓 핸드가 폭격, 그리드에게 길을 열어준다.
“헉....!”
“마, 말도 안 되는....!”
250레벨 이상의 스켈레톤 나이트 수십 구가 일거에 잿더미로 변해버리다니?
그것도 그리드가 손도 대지 않고 움직인 창날에 당해서?
경악하는 네크로맨서들의 뇌리에 한 단어가 스친다.
‘지존....!’
네크로맨서들은 상기한다.
지금 자신들이 사냥하고자 하는 상대, 하늘을 무너뜨린 자임을.
어느새 적진 한가운데 난입한 그리드는 땡기미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휘리리리리릭!!
달빛을 머금은 은사 끝에 매달린 적흑색의 검날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등장하자.
서걱!
푸화하하하하하학!!
하필이면 검날의 회전 경로에 서있던 스켈레톤 나이트들과 네크로맨서들이 몸 곳곳을 베이며 주저앉는다.
철컥!
땡기미에 결합 된 검날은 한 자루의 검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열망의 무아검이다.
“베라디이이이이인!!”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쾅!!
지축이 떨린다.
숲이 통째로 날아갈 기세다.
회전과 쇄도를 반복하는 4자루 황금 창의 비호를 받으면서 언데드 군단을 돌파하는 그리드의 모습, 바다를 갈랐다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저건 이제 그냥 괴물이군.’
그리드의 무위 또한 신위의 반열에 올랐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지라 크게 놀랄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리드의 존재감은 베라딘이 상정한 범위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찌릿! 찌릿...!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접근해오는 그리드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베라딘의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다.
하지만 베라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회심의 미소였다.
쿠워어어어어어어!!
4자루 황금 창의 비호를 믿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원수를 눈앞에 두고 이성을 잃었기 때문인가.
온 신경을 베라딘에게 집중한 채 돌진하던 그리드는 갑자기 땅에서 솟구치면서 나타난 데스나이트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푸욱-!!
치명적인 독을 머금은 독귀 카일로의 단도가 그리드의 심장을 찌른다.
극독의 살상력을 앞세운 회심의 암습이었다.
대상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마비>를 줌과 동시에 대상의 현재 생명력을 50퍼센트 깎는 암습. 매우 낮은 확률로 대상을 즉사시키는 카일로의 궁극기다.
“지금!”
미쳐 날뛰는 야수를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리드가 함정에 당한 것을 확인한 베라딘이 희열에 찬 얼굴로 소리치자, 그의 앞에 대열을 맞추고 선 채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전개했다.
‘잡을 수 있다!’
무려 47기의 스켈레톤 메이지가 동시에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폭사하는 마력을 눈에 담은 베라딘은 확신했다.
암습에 이미 큰 피해를 입은 그리드가 마법의 폭격까지 받게 되면 불사를 소모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베라딘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데스나이트 <카일로>의 암습이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대상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습니다.]
[대상이 절대 판정의 마비 독에 저항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알림창을 말이다!
“뭐라고!!”
뒤늦게 알림창을 확인한 베라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베라딘은 납득할 수 없었다.
카일로의 단도는 분명히 그리드의 심장을 찔렀다. 찰나 동안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베라딘은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한데 암습이 무위로 돌아갔다고? 그리드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이게 무슨....! 멈춰라!!”
일이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자 당황하던 베라딘이 황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네크로맨서들은 각자 자신이 소환한 스켈레톤 메이지에게 마법의 발동을 명령해놓은 상태였다.
부우우우우우웅-
<그래비티 붐>
스켈레톤 메이지가 300레벨이 넘을 때부터 사용할 수 있는 고위 흑마법. 스켈레톤 메이지의 궁극기로 통용된다.
지정한 지역의 중력을 변형시키고 대상의 행동력을 저하시킴과 동시에 폭발을 발생시킨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마법이지만 범위가 너무 좁고 캐스팅 시간은 무척 길다. 심지어 전개 속도까지 느리다. 멀쩡히 움직이는 대상을 그래비티 붐으로 적중시킨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제로.
“우, 움직이다니?”
칸의 유작 <발할라> 덕분에 카일로의 암습과 마비 독에 저항한 그리드가 자리를 이탈하자 그래비티 붐은 허무하게 소진됐다.
그리드가 베라딘에게 한 걸음.
콰콰콰콰콰콰쾅!!
두 걸음.
펑! 퍼퍼퍼퍼퍼퍼펑!!
세 걸음, 점차 가까워질 때마다 그의 뒤편에서는 무의미한 폭발이 이어졌다.
황무지로 전락한 숲을 배경 삼은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 연(聯)을 전개, 스켈레톤 메이지들을 베어 넘긴 후 베라딘에게 도달했다.
“이걸로 첫 번째다.”
살기를 가득 머금은 그리드의 음성이 베라딘의 귓전에 울린다.
“네가 나한테 죽는 거 말이야.”
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드는 선언했다.
“너는 앞으로 몇 번이고 계속해서 내게 죽게 될 거야. 칸이 느꼈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될 거다.”
푹-!
푹푹!!
주인을 지키고자 달려온 카일로가 계속해서 그리드를 공격해보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암살 계열 스킬에 저항하는 칸의 유작을 무장한 그리드에게 하필이면 스킬 공격을 날리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말도 안 되는 템빨이군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는 베라딘에게.
“냄새나니까 닥쳐.”
그리드는 발언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곧바로 열망의 무아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은 베라딘의 목을 베지 못했다.
쩌저저저저정!!
갑자기 날아든 검이 열망의 무아검을 가로막은 까닭이다.
“너....?”
투명한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자 마치 서리를 흘리는 듯하다.
자신을 방해하는 여성의 정체를 알아 본 그리드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메르세데스?”
“.....”
첫 번째 기사.
제국의 뜻을 행사하는 최강의 검.
결국에는 도구일 뿐인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요.”
“큭....!”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정-!!
그리드의 몸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리드가 보지 못한 사각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메르세데스의 방패에 타격을 입은 까닭이었다.
압도적인 <차징>이다.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며, 잠시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그리드에게.
“전하!!”
카심의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와 병사들은 여러 명의 적기사단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그리드가 베라딘에게 눈이 돌아가 있는 동안 카심과 병사들 또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 이동....!”
카심이 그리드를 구원하고자 시도하지만, 완연해진 달빛이 어둠을 집어삼킨 까닭에 행동반경이 크게 줄어든 상태다. 한 번에 먼 거리를 이동하지 못하고 적기사에게 뒤를 잡히고 만다.
“윽!”
“카심....!”
그리드는 카심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로드의 스승이자, 친구이며, 가족이다. 로드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준 사람이 바로 카심이었다.
그래, 로드에게는 카심이 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안 돼....!!”
잃을 수 없다.
눈앞의 원수조차 잊은 채, 그리드의 신경은 카심에게 집중되었다. 적기사단에게 포위당한 그를 구원하고자 <플라이>를 전개한 그리드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카심에게 향했다.
아니, 향하고자 했다.
메르세데스가 문제였다.
채챙! 채채채채채채채챙!!
최고 속도에 이른 검술, 크라우젤을 가뿐히 상회하는 무력으로 발현되어 그리드를 압박한다.
<아이템 변신>의 지속 시간이 끝나자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온 갓 핸드의 묠니르 공세를 모조리 회피한 메르세데스가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리드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사라지고 분노가 깃든다.
“이런 개 같은....! 황제가....! 황제가 시킨 거냐!!”
웃는 낯짝으로 배웅까지 해준 주제에 곧바로 뒤통수를 쳐?
이를 가는 그리드에게 메르세데스는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침묵하는 그녀 대신 베라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라는 게 달려있으면 생각을 하셨어야죠. 제가 설마 아무런 믿는 구석도 없이 당신을 습격했을까요?”
적기사단의 무력을 믿었고, 보름달이 뜨는 밤을 믿었다.
베라딘의 계획은 완벽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템빨왕 그리드를 살해하고 이를 만천하에 알리는 것.
템빨국의 분노는 더욱 더 커질 것이고 임모탈의 명성은 자연히 오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그너스도 방관하지 못하게 된다.
씨익!
회심의 미소를 그리는 베라딘.
그는 그리드가 <기사 소환>을 사용, 설령 삼천왕과 템빨단원들을 불러올 지라도 변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들 전부가 덤벼도 첫 번째 기사가 포함 된 10명의 적기사단을 막을 방도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디 기사 소환을 사용하세요.’
네가 믿는 인재들을 모조리 말살해줄 테니까.
베라딘이 즐거워하는 그때.
푸우우우욱-
세 번째 기사 로렉스와는 격이 다른 강함을 뽐내는 메르세데스의 검이 그리드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쿨럭....!”
역시 이 여자는 괴물이다.
제국에서 보았던 칠공작들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이다.
확신하면서 피를 토하는 그리드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카심의 유한한 목숨을 걱정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카심도 끝이다.’
로드까지 불행해진다.
내가 느꼈던 슬픔과 증오를 그 아이만큼은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이와 같은 일념을 품은 그리드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다.
“기사..... 쿨럭! 소환....!”
그리드가 의지하는 최강의 힘.
그리드의 염원을 이뤄줄 수 있는 유일한 힘!
“피아로!!”
“....?!”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이름.
이내 떨어지는 빛의 기둥을 타고 등장한 사내를 목격한 메르세데스의 넋이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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