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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29화 (624/1,794)

템빨 37권 - 14화

오싹……!

‘뭐지?’

4미터 간격으로 배치된 기둥이 좌우로 각 30개씩 늘어섰다.

황궁의 일각에 불과한 알현실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자 그리드는 압도당했다. 자신과 동료들이 그토록 노력해서 세운 템빨국이 제국 앞에서는 한낱 티끌이나 다름없단 생각이 들자 허무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리드가 느끼는 이 이질감과 공포의 근원은 알현실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리드가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알현실 끝 왕좌 위의 인물이 그리드를 주시한다.

저벅, 저벅, 저벅…….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시대의 강자’들에게 호응하는 그리드의 투기가 짙게 물들어 갔다.

그 적색과 자색의 휘광을 누군가는 흥미롭게 관찰했고, 누군가는 불쾌하게 보았으며, 또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고요 속에.

“템빨국 왕 그리드가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왕좌가 놓인 계단 아래 도달한 그리드가 고개를 숙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한 예를 갖췄다.

황제 쥬앙데르크.

그는 이 시대 최고의 권력가다. 셀 수 없이 많은 백성과 대지를 뒤덮는 군대가 그를 따랐다. 그야말로 대륙의 주인이라는 데에 그리드는 이견이 없었다.

비록 적이었고, 앞으로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지만 예를 생략할 순 없는 것이다.

원한 서린 칼날은 등 뒤로 숨긴다.

“과연 영웅왕의 풍모로군.”

타고난 백발인 듯하다.

황제의 구불진 흰 머리카락은 보통 노인의 것들과 달리 윤기가 넘쳤다.

“템빨국 왕이여, 제국에 방문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다. 인사하마. 짐이 바로 황제다.”

긴 소개가 필요할까?

황제라는 말속에 이미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쥬앙데르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황제라는 위치가 거대한 것이다.

오싹……!

‘이거 뭐야?’

알현실에 입장한 직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리드는 자꾸만 등골이 오싹해졌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째서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좌우에 도열하고 있는 시대의 강자들 때문에?

아니다.

이 거대한 두려움의 근원은 바로 황제였다.

‘…라스트 보스냐?’

<전설적 대장장이의 눈>과 <캐릭터 관찰>을 이용해서 황제를 관찰해 보고자 시도하지만 불가능하다. 레벨 차이가 너무 커서 알 수 없다는 알림창만 뜰 뿐이다.

하지만 그리드의 높은 통찰력이 알려 주고 있다. 황제는 강하다. 그리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으로!

‘예상을 뛰어넘잖아?’

앞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듯이, NPC의 지위와 강함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국이나 일족을 대표하는 존재들이 강하다. 수인족 왕과 마안족 왕이 적절한 예다.

하물며 대륙의 주인인 황제는 얼마나 강하겠는가?

그리드는 황제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고 뻔히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전설급…….’

시스템은 ‘황제’에게 ‘전설’과 동급의 판정을 내리는 걸 수도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제국의 시조는 신화적인 존재가 아닌가? 황족의 혈통은 특별하다.

“그래, 환영식은 마음에 들었나?”

“과분한 영광이었습니다. 저의 갑작스러운 방문 요청을 허락해 주신 것으로 모자라 기꺼이 반겨 주시니 기뻤습니다.”

“비록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우방의 왕이다. 짐과 짐의 백성들이 그대를 존중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지금 그대가 짐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처럼 말이야.”

뼈가 있는 말이다.

황제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맹수의 것처럼 번들거리는 잿빛 눈동자로부터 호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예의 없던 왕께서 이제 와 짐을 찾은 이유가 뭔가?”

이제는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황제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조아렸다.

“우리 템빨국에게 휴전이라는 자비를 베풀어 주신 폐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휴전이라는 자비라…….”

되뇌는 황제의 눈가가 씰룩인다.

제국이 템빨국에 먼저 휴전을 제안했던 이유가 뭔가?

발할라 침공을 눈앞에 뒀을 당시, 템빨국의 대군이 제국 국경에 집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제국은 템빨국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갔던 것이다. 늘 일방적으로 타국을 짓밟아 왔던 제국이 역사상 최초의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제국 입장에서 뼈아픈 치욕이었다. 가능하다면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언젠가는 제국 역사에서 지워 없애야 할 수모였다.

한데 지금, 그 수모를 안긴 당사자가 직접 찾아와 비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리드에게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제국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비루먹을 개자식을 보았나?’

천공왕 리갈.

제국의 칠공작 중 하나로 공군 대장이다. 무려 5천의 그리폰 부대와 3백의 비룡 부대를 이끈다. 육군 병력 10만, 100만과는 궤를 달리하는 가치의 군대를 이끄는 리갈은 본인과 제국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한데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어느 날 갑자기 왕을 자처한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황제와 제국을 업신여기고 있었으니, 리갈은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거슬렸던 그리드의 투기를 노려보며 살의를 내뿜는 그를 같은 칠공작인 레이첼이 진정시켰다.

“상대는 공식 귀빈이야. 일일이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진정하라고.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자칫 죽여 버리기라도 했다가는 국제적 망신이잖아? 뭐, 저게 정말로 도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쿡쿡!”

레이첼은 제국의 개국공신이자 초대 전설의 창술사였던 드하켈의 후손이다. 그녀 본인 또한 창의 달인으로, 대륙제일창 키리누스와 창술로 호각을 겨루는 실력자였다. 그녀가 직접 육성하고 통솔하는 <어스름 창병대>가 여태까지 전쟁에서 올린 공훈은 적기사단과 비견될 정도이다.

장내의 분위기가 술렁임을 느낀 그리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인사하러 안 온다고 지랄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인사하러 왔다고 지랄이네.’

더럽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들은 강자고 그리드는 약자다.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되도록 감내해야 한다. 지금은 말이다.

<리갈>

레벨:439

직업:라이더

능력치:????

스킬:????

<레이첼>

레벨:475

직업:창성

능력치:????

스킬:????

‘이들이 5기둥인가?’

다 들리게 떠드는 연놈들의 정보를 소란 틈에 확인하는 그리드의 귓가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감사 인사를 올리겠다고 예까지 걸음할 정도로 귀공이 한가한 사람은 아닐 텐데?”

황제조차도 그리드를 왕으로 대우해 주고 있는 이때, 목소리의 주인은 그리드에게 손아랫사람 호칭을 사용했다.

그 예의 없는 작태에 그리드는 물론이고 황제까지 눈살을 찌푸렸다.

“근래에 임모탈이라는 조직에게 라인하르트를 습격당했다지?”

싸가지 없는 놈의 정보가 그리드의 눈가에 스친다.

<리미트>

레벨:468

직업:검공

능력치:???

스킬:???

적기사단의 주인이자 제국 최고의 검사.

검공 리미트의 이름은 그리드 또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리미트는 불쾌해하는 그리드와 황제를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 임모탈이라는 조직은 현재 이곳 타이탄에 체류 중이고 말이야. 귀공이 제국을 방문한 진짜 이유는 그들을 사냥하기 위함이라고 보는데……. 억측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임모탈을 사냥하러 온 게 맞다면?”

제국이 템빨국보다 거대한 나라라고는 하나, 리미트는 공작이고 그리드는 왕이다. 속내야 어찌 됐든, 최소한 겉으로만큼은 왕 취급을 해 주는 게 기본 예의였다. 한데 리미트는 그리드에게 조금의 예절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리드도 참기 어려웠다. 템빨국 전체가 싸잡아 무시당하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그리드의 투기가 요동치는 것을 확인한 리미트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를 드러내라.’

제국과 템빨국의 교류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적었다. 한낱 소국에 불과한 템빨국에게 먼저 휴전을 요청한 황제 쥬앙데르크를 역대 모든 황제 중에서 가장 무능하다고 욕하는 대신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때 황비파의 대표 귀족인 리미트가 그리드와 대놓고 적대하게 된다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진 대신들의 마음을 황비 쪽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

예의범절을 깡그리 무시한 리미트의 도발은 명확한 목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리드는 도발에 넘어오기 직전이다.

그리드가 이대로 흥분해서 날뛰어 주면 무척 이상적인 전개가 펼쳐질 것이었다.

쥬앙데르크는 소국의 왕 따위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한심한 작자이며, 그 미쳐 날뛴 소국의 왕을 황비파의 거두 리미트가 제압했다. 이처럼 소문이 퍼지는 순간 황비파의 입지는 전보다 커질 것이었다.

기대하는 리미트였으나.

“…내가 만약 그런 이유로 황도를 방문한 거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즐거웠겠군. 내 손으로 놈들을 징벌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쉬운걸? 그 악당 놈들이 이곳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 나는 지금 처음 알았거든.”

그리드는 구린 속내를 품은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 20억 플레이어의 정점이라는 자리가 그를 보다 신중하고 현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근데 참 이상하군. 리미트 귀공이 어찌 그리도 임모탈에 대해서 잘 아는 거지? 템빨국에 임모탈을 보낸 배후가 귀공이라도 되는 건가?”

그리드는 단지 화를 억누를 뿐만이 아니었다. 리미트가 던진 도발을 다른 형태로 되돌려 줬다. 이간질이었다.

“설마 귀공은 황제 폐하께서 친히 맺으신 휴전 협정에 불만이라도 품었던 건가?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맺으신 휴전 협정을 어겨 가면서까지 템빨국을 공격한 거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맺으신’이라는 말을 몇 차례나 강조해서 말하는 그리드였다.

리미트를 황제의 뜻에 반하는 변절자로 몰아붙이기 위함이었다.

‘물론 통할 리 없겠지만.’

그리드는 황제의 적이었고, 앞으로 또 언제든지 적이 될 여지가 있다. 그리드가 이간질한다고 해 봤자 거기에 황제가 혹할 리가 없다.

이간질하는 그리드도, 이간질당하는 리미트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황제는 이간질에 넘어갔다.

어리석어서 놀아나는 게 아니다. 리미트가 황비파의 거두라는 점이 문제였다.

특히 근래의 황제는 리미트와 적기사단에게 잦은 징계를 내렸다. 황제는 리미트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믿었고, 그리드의 말대로 템빨국을 침략한 배후에 리미트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겉으로 내색하진 않는다. 그리드가 보는 앞에서 신하를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쓸데없이 소란스러워졌군. 만찬이나 즐기도록 하지.”

최대한 냉정하도록 노력한 황제가 침착한 음성으로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이후.

‘비전투 직업군의 레벨이 낮은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만찬에 참석한 대신들의 이름과 레벨을 일일이 확인한 그리드는 낭패를 느꼈다. 제국 최강자들의 레벨이 피아로의 레벨보다 평균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피아로의 농부라는 직업군이 문제인 듯했다.

제국의 전력은 분명한 압박이었고, 그리드는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긴장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리드 저자…….’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는 청발의 미녀, 메르세데스.

만찬회장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미모의 소유자, 그 첫 번째 기사가 그리드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한다.

명백한 경계였다.

메르세데스는 그리드가 두려웠다.

대상의 실력과 잠재력을 간파할 수 있는 그녀의 타고난 혜안이 그리드의 잠재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찌릿… 찌릿.

벌써 한 시간 전에 그리드가 손을 대었던 어깨에 아직도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있다. 생전 처음 느꼈던 감각이 메르세데스에게 더 큰 혼란을 안기는 그때였다.

“만만치가 않아.”

술잔을 손에 든 검공 리미트가 메르세데스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그리드를 쳐라.”

“예……?”

“굳이 죽이지 않아도 돼. 그리드에게 제국이 자신을 습격했다는 사실만 알려 주면 된다.”

“귀빈을 습격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제국의 짓이라는 걸 밝혀지게끔 하라는 말씀인가요? 이유가 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리드가 먼저 휴전 협정을 깨게끔 의도하는 거야.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한 휴전 협정이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파기당해 버리면 황제 폐하는 어떻게 될까? 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지. 정치적인 입지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떨어질 게다.”

“…….”

검공 리미트는 황비의 유혹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인물이다.

한데 지금 보니 황비의 곁에 서기로 확실하게 마음을 굳힌 듯하다.

황제가 적기사단을 견제한 행동이 최악의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안타까워하는 메르세데스에게 리미트가 속삭였다.

“황비 전하께서 병력을 지원해 주실 게다. 제법 실력 좋은 네크로맨서들이야. 그들과 함께 템빨국으로 귀환하는 그리드를 쳐라.”

“…알겠습니다.”

과연 옳은가.

물론 옳지 않다고 메르세데스는 확신한다.

무릇 기사란 주인에게 충성해야 하는 법이니까. 설령 주인이 자신을 예뻐해 주지 않더라도 충성하는 것이 기사의 숙명이고, 존재 의의다.

메르세데스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꾸욱…….

안타까운 표정으로 황제와 그리드를 번갈아 보는 메르세데스의 도톰한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같은 시각, 황비 마리의 궁전.

“이건 아주 적절한 기회예요. 그리드에게 본때를 보여 줍시다.”

황비 마리를 꼬드겨서 리미트를 움직인 장본인, 베라딘이 임모탈의 정예들을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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