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12화
템빨국은 농업 국가로 시작했다. 피아로가 발전시킨 농업 덕분에 나라 재정이 안정됐고, 상업 국가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리드가 칸과 함께 대장장이들을 육성하고 대장간 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던 이유 모두 농업으로 벌어들인 돈 덕분이다.
“이렇게 많이?”
바이란에서 생산, 운반해 온 밀과 감자가 산처럼 쌓인 광경을 목도한 그리드가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템빨국의 특산물로 자리 잡은 밀과 레인보우 포테이토는 나라 경제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수출 품목이었다. 그걸 무려 100톤이나 제국에 갖다 바치라니 내킬 리 없다.
“애초에 공물을 바칠 이유가 어디에 있지? 우리가 제국의 속국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설명했다.
“공물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전하께서 먼저 제국에 방문을 요청하였고, 제국은 요청을 받아 줬죠. 이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작은 선물을 챙겨 가는 것쯤은 기본 예의가 아닐까요?”
무려 양국 정상 간의 만남이다. 대륙 전체가 주목할 만한 공식 행사였다.
제국은 자신들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그리드를 극진히 대접할 것인데, 정작 손님인 그리드가 맨손으로 방문했다가는 템빨국과 그리드의 체면만 구겨진다.
“손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국에서도 전하를 맞이하기 위해서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작은 선물까지 준비했을 수도 있죠.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로만 따져도 저쪽이 우리보다 돈을 더 쓰면 더 썼지, 덜 쓰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대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큭큭큭, 라우엘의 예쁘장한 얼굴에 악마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리의 밀과 감자를 맛볼 제국인들의 반응입니다. 그 맛에 완전히 반해 버려서 수입을 추진할지도 모를 일이죠.”
템빨국의 밀은 무려 전설의 대장장이가 개량한 품종으로 재배했다. 그 어느 나라의 밀과 비교해도 품질이 우수했다. 오죽하면 템빨국 빵과 면은 죄다 맛있다는 소문이 퍼졌겠는가?
제국이라고 해서 그 맛에 반하지 않을 리가 없다. 굳게 닫혀 있던 제국과의 무역이 이번 기회에 열릴 가능성이 높았다.
“굳이 농산물을 선물로 준비한 이유가 그거였어?”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이익을 추구하는 라우엘의 비상한 머리에 그리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라우엘은 그리드와 템빨국에게 큰 축복이었다.
“이번 아이디어는 제가 아니라 라빗 행정관이 내놓은 겁니다. 돈 버는 일에 관해서는 제가 그 양반을 따라갈 수가 없죠.”
검호 시절의 피아로를 단돈 73실버로 부려 먹었던 라빗이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라빗은 그 누구보다 많은 녹봉을 받는 대신 국가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었다. 라빗이 없었다면 템빨국의 성장 속도는 지금보다 2배, 3배 이상 느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대단한 라빗을 행정관으로 섭외한 인물이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신기하군요. 전하께서 라빗 행정관을 섭외했던 시기는 전하께서 아직 바보였을 때 아닙니까? 어떻게 그때 당시의 전하께서 라빗 경 같은 인재를 선별하고 영입할 수 있었던 걸까요? 타고난 재능이려나?”
“…….”
최소한 내가 섬기는 사람에게만큼은 진실 되고 싶다.
라우엘의 마음이다.
몇 개의 사건 후로 라우엘은 늘 그리드에게 솔직하고자 노력했다. 싸가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 탓에 가끔씩 열이 뻗치는 그리드였지만 감사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라우엘의 솔직한 감상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인재를 선별하고 섭외하는 능력…….”
그리드는 칸과 피아로, 그리고 아스모펠과 스틱세이 등 자신이 섭외한 인물이 얼마나 많은지 상기해 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놀랍다. 그들 모두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반쯤 폐인 상태 아니었던가? 용케도 그들과 긍정적인 인연을 맺고 함께하게 되었다.
물론 영주의 검에 귀속된 <캐릭터 관찰> 스킬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지금의 그리드는 알 수 있다.
단지 대상의 에피소드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 아무나 못한다.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죠? 칸.’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내게.
“전하?”
“아.”
잠시 상념에 잠겼던 그리드가 허겁지겁 눈가를 닦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라우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칸 님의 장례식 말입니다만……. 정말로 국장(國葬)이 아니어도 되는 겁니까?”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의 영혼이 묻힐 장소는 여기가 아니야.”
제국 방문 일정은 3일 뒤다.
그 전에 다녀올 곳이 있다.
윈스톤.
칸의 고향이다.
***
Satisfy에서 시신의 개념은 옅다.
플레이어와 NPC 모두 죽음에 이르는 순간 잿빛으로 산화하고 흩어지기 때문이다.
특정 퀘스트를 진행 중이거나 네크로맨서 등의 직업군이 아닌 이상에야 시신을 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지독하게도 원망스러운 그리드였다.
소중한 사람의 유해조차 챙길 수 없음에 뼈아픈 슬픔을 맛봤다.
하지만 그리드는 상기했다.
Satisfy에는 영혼의 개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브라함의 영혼과 이야루그트의 영혼, 그리고 칸의 조상들이 묻힌 묘지에서 목격했던 칸의 아들 귀신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드는 믿었다.
지금 자신의 곁에 칸의 영혼이 머물고 있음을.
번헨 열도 계승의 장에서 얻은 히든 피스 <자아 부여>를 통해서 칸의 영혼을 아이템에 귀속시킬 수 있지는 않을까, 이와 같이 생각해 보기도 했었으나.
‘내 욕심 때문에 칸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어.’
그리드는 보았다.
파그마의 손에 의해서 데스나이트로 부활한 전대 전설들의 슬픔을.
그들은 안식을 원했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도 칸의 영혼을 묶어 둘 수는 없었다.
“칸.”
윈스톤 외곽의 작은 묘지.
칸의 아들과 부인, 그리고 조상들이 묻혀 있는 그곳에 그리드가 홀로 섰다.
계속해서 닦아 내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 탓에 희뿌연 시야로,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아이템을 꺼낸다.
템빨단 소속 조각사들과 함께 제작한 비석이었다.
칸의 영혼이 머물게 될 비석.
“기왕이면 천국에서 지내요. 지상에는 가끔씩만 놀러 오도록 하고요. 묘지는 내가 잘 관리할게요. 루비도, 로드도 자주 찾아올 거예요. 그 아이들의 아이들… 까지도.”
묘지 중앙에 비석을 장식한 그리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곳의 묘지에서, 지존은 홀로 슬픔과 싸웠다.
고맙네.
고마워.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
템빨왕 그리드.
전설 파그마의 능력을 계승하였으며, 전 에트날 왕국의 영웅이었다.
휘하에 둔 유능한 부하들과 함께 32위 대악마 벨리알을 물리쳤다.
이후 에트날 왕국을 전복시키고 템빨국을 세웠으며, 발할라의 건국에도 큰 공헌을 했다.
“번헨 열도를 정화하고 명예의 전당까지 되찾았다지?”
“심지어 그곳에 자신의 동상까지 세웠습니다.”
“요호호호… 새 시대의 인물이라는 느낌이 팍팍 드는구먼.”
“전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봐도 무방하죠.”
“요호호… 더군다나 레베카교의 교황과도 친분이 깊다지?”
“예. 뿐만 아니라 당대 검성 크라우젤과도 교류를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히요… 자신의 능력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친구인가 보구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드는 파그마의 기술로 제작한 무구들을 미끼로 활용해서 인맥을 확대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브라함도 그렇게 꼬셨으려나?”
영원의 탑.
제국의 비호 아래 마법을 연구하며, 마법의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금기를 어겨 온 집단이다.
“요호호… 어서 빨리 만나 보고 싶구만.”
마탑의 주인 골드히트.
대륙의 10대 마법사 중 하나인 그는 같은 대마법사인 아슈르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실력자였다.
태생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의 4번째 제자, 릴리스의 수제자였으니까.
***
“으아아아아악!!”
제국 황도 타이탄.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잠시 잡화점에 들렀던 임모탈 소속 네크로맨서가 비명을 내질렀다.
잡화점에서 나오는 순간 몸 곳곳에 칼과 도끼가 찍힌 까닭이다.
“당장 멈춰라!!”
순찰 중이던 치안대 병사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이걸로 한 마리!”
네크로맨서는 죽었고, 그를 사냥한 사람들은 좋다고 웃으며 도망쳤다.
도시 내에서 사람을 죽인 대가로 얻게 될 페널티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왜?
얻게 될 보상이 페널티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스샷 제대로 찍었어?”
“당연하지! 그리드 제작템 하나 확보야!!”
“아싸!! 푸하하하핫!!”
얼마나 기쁜지 일단의 무리는 경비병들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실컷 웃어 댔다.
그들을 바라보는 플레이어들의 감상은 단 하나였다.
‘부럽다!’
우리도 빨리 임모탈을 찾아야 한다!
눈에 불을 켠 플레이어들이 황도 곳곳을 누볐다. 일단 네크로맨서만 보이면 쫓아가서 감시하며 그의 소속을 밝히고자 노력했다. 인내심 부족한 사람은 상대가 그냥 네크로맨서라는 이유만으로 죽이고 보았다.
임모탈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빌어먹을!!”
쾅!!
황비 마리의 궁전 외진 곳에 위치한 별채.
바글바글 모여 있는 임모탈 소속원 347명이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리드의 척살령 탓에 궁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으니 초조해 미칠 노릇이었다. 남들은 꾸준히 사냥하고 득템하고 있을 이때, 자신들은 쥐 죽은 듯이 숨어서 넋만 놓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빌어먹을 베라딘 새끼. 평소에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완전히 사달을 내 놨어.”
“차라리 베라딘 일당을 자수시키자. 괜히 우리 전부 싸잡아 피해를 입을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동료를 팔아먹자는 말이 쉽게 나와?”
“그럼 뭐 어쩌자고! 이대로 다 같이 죽자 이거야?”
임모탈의 결속력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공포라는 감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로 수십억 플레이어를 움직인 그리드에 대한 공포였다.
하필이면 잠자는 사자, 아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가 끔찍한 지옥을 겪게 되었으니 그저 후회되고 두려울 뿐이었다.
임모탈의 간부 중 한 명인 불렛이 길드원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보자. 언제까지고 이런 분위기가 유지될 순 없을 거야. 우리를 찾지 못하면 사람들 모두 시들해질 거라고.”
“으음…….”
사냥감을 찾지 못하는 사냥꾼은 의욕을 잃게 마련이다.
임모탈은 자신들이 한동안 이렇게 숨어 있으면 숨통이 트일 거라는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그, 그리드가! 그리드가 제국을 방문할 예정이랍니다!!”
“뭐라고……!”
임모탈 소속원 전원이 사색이 되었다.
“그놈은 악마야! 악마라고!!”
고작 대장장이 NPC 몇 마리 잃었답시고 우리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죄인으로 만들고, 급기야는 직접 사냥하겠답시고 제국까지 찾아온다는 건가?
이쯤 되면 거의 미친놈 아닌가?
모두가 벌벌 떠는 그때였다.
“다들 뭘 두려워하는 거죠? 도리어 기뻐해야 할 일 아닙니까?”
베라딘이 나타나 말했다.
“그리드에게 우리의 저력을 보여 줄 찬스입니다. 기고만장해서 직접 이곳까지 찾아오는 놈을 우리가 역으로 사냥해 줍시다.”
물론 다짜고짜 공격할 수는 없다.
베라딘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리드는 황제와 공식 일정을 가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드를 공격해서 자칫 황제의 일정을 망쳤다가는 제국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었다.
“적절한 타이밍을 봅시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베라딘은 그리드의 콧대를 한 번 눌러 놔야 한다고 보았다.
같은 시각.
마리의 궁전에 일단의 상인 무리가 진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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