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10화
임모탈을 멸절시키겠다!
개인적인 원한을 앞세운 그리드의 기자회견은 심각한 도의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피해를 입었답시고 한 세력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협력을 요청한 것이다.
누가 봐도 필요 이상의 보복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그리드의 모습은 절대 갑의 폭군 그 자체였고, 을의 입장을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생리적인 거부감을 안겼다.
대중의 호응을 얻기는커녕 비난을 살 만한 기자회견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기자회견은 대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돈으로 쓴 각본 덕분이다.
“템빨국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두 세력 간의 다툼일 뿐이지,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관계없는 별세계 이야기 아닙니까? 템빨국의 복수에 다른 사람들이 동참해야 할 이유가 뭐죠?”
“국가대항전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타 세력을 침략하고 피해를 입힌 임모탈에게 단죄를 내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제2, 제3의 임모탈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아요. 내년부터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피해를 입는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질 겁니다.”
“음… 그럼 결국 랭커들의 국가대항전 참여율이 떨어질 테고, 국가대항전의 수준 또한 덩달아 낮아지겠군요?”
국가대항전은 전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국가대항전만 기다리며 1년을 보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2류, 3류들만 참가하는 국가대항전을 대중들이 원할 리 없다.
“맞습니다. 국가대항전을 매년 즐겁게 감상하고 계실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도 임모탈을 전례로 남겨선 안 됩니다. 우리 모두의 축제를 악용하는 세력이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우리가 단단히 힘을 합쳐서 임모탈을 철저히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템빨국이 임모탈 응징의 선두에 서는 것은 사적인 원한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해석하면 되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기자회견장에 모인 기자는 족히 200명이 넘었지만, 정작 그리드가 질문을 받는 기자는 20명에 불과했다.
라우엘에게 뇌물을 받은 기자들이었다.
이 20명의 기자들은 전원 그리드에게 유리한 질문을 던졌다. 정작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복수의 폭력성은 묵과해 버렸다. 덕분에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할수록 템빨국의 복수극은 대의를 품은 성전으로 포장되어 갔다.
“저기, 잠시만요. 임모탈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 템빨국의 허를 찔렀을 뿐이고, 이는 하나의 전략으로 용인할 수 있는 수준 아닙니까? 제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봤자 임모탈을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것은 너무 과한 천명 같은데요?”
“임모탈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평범한 네크로맨서 플레이어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들었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질문은 거수 후에 해 주십시오. 그쪽에 기자분, 질문하세요.”
웅성웅성.
그리드는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그들이 아무리 손을 들어 봤자 거들떠도 보지 않고 미리 매수한 기자들의 질문만 받았다.
‘노골적이군!’
그리드에게 좋은 방향으로만 회견이 진행되자 기자들의 의심이 시작되었고, 이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그리드의 기자회견은 쇼일 뿐이며, 자신들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분노한 기자들 몇 명이 소란을 피우려 하기 직전이었다.
그리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끼를 뿌렸다. 분노한 기자들과 대중들을 단번에 현혹할 만한 미끼였다.
“임모탈 사냥에 협력하여 국가대항전의 앞날을 수호하는 데 공헌해 주시는 분들께는 제가 직접 아이템을 만들어 드릴 예정입니다.”
“템빨국 국민 사이에서는 흔한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보다 특별해야겠죠. 최소 에픽 등급이 보장되는 아이템을 만들어 드릴 계획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재료비는 제가 부담하도록 하죠.”
“……!”
그리드가 제작한 아이템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기회!
기자들은 이 특종을 놓칠 수 없었다. 의심을 잠시 접어 두고 보상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 탓에 대중의 관심도 보상에 집중되고 말았다.
“이것으로 회견을 마치겠습니다. 참석해 주신 기자 여러분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결국 한 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기자회견이 끝난 시점의 그리드는 ‘국제적 행사의 흥행과 대중들의 권리를 수호하고자 임모탈에게 단죄를 내리는 정의의 사도’쯤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부패한 언론과 달콤한 자본이 만나 완성시킨 콜라보였다.
“괜찮아?”
기자회견이 끝난 후.
뒷좌석에 올라타는 그리드를 룸미러로 확인한 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리드의 표정이 영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정재계 인사들처럼 언론을 매수하고, 대중을 기만했다는 점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드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괜찮아. 나 몰라? 나 원래 나쁜 놈이야.”
설령 착한 놈이었을지라도, 칸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럽혀졌을 것이다.
뒷말을 삼키는 그리드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
“기자회견 잘 봤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논점은 흐리고 명분에만 초점을 맞출 것.
라우엘의 조언이었고, 그리드는 이를 착실하게 이행했다. 라우엘에게 매수당한 기자들이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칭찬까지야. 네가 연출한 영화에서 후로이가 쓴 각본을 읽었을 뿐이잖아.”
“영화의 완성은 배우의 연기력 아니겠습니까?”
“…….”
그리드가 입을 닫았다. 안 그래도 점점 두꺼워지는 본인의 낯짝에 불안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뉴스와 영화에서나 보던 정치인들처럼 썩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근심하는 그에게 라우엘이 웃어 주었다.
“정치인이라는 족속들은 굉장히 똑똑합니다. 전하께서 그들처럼 되실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것참 다행이네.”
안심시키겠답시고 돌려 까는 라우엘을 노려보던 그리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싱글벙글, 라우엘이 환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까닭이다.
‘내 얼굴이 너무 경직돼 있었나.’
긴장을 풀어 주려고 노력 중이구나.
역시 친구란 좋다.
칸이 그랬듯이.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기분은 나쁘지 않으니까.”
털썩.
의자에 걸터앉은 그리드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라우엘 너의 예상대로 임모탈 전원이 제국으로 숨어들었다지?”
“네. 아마 당분간은 나올 생각이 없을 겁니다.”
제국의 인프라는 대륙 최고다. 사냥터와 연계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편의 시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환경이 완벽했다.
대신 인구가 많아서 어딜 가나 사람으로 가득했지만,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평생 제국령 내에서만 썩어 지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임모탈은 제국 소속이죠. 제국에서 후한 대접을 받을 겁니다.”
“호의호식하고 있다?”
“네. 하지만 지속적인 위협을 겪게 되긴 할 겁니다. 제국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이 임모탈을 노려 줄 테니까요. 조금이라도 으슥한 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어쌔신의 기습을 받고, 끽! 할지도 모를 일이죠.”
계속되는 위협.
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끔찍하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아무런 위안이 안 됐다.
그리드가 원하는 것은 임모탈의 완전한 파멸이었으니까.
특히 칸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안긴 베라딘과 놈의 배후인 아그너스가 잠시라도 숨 쉬는 것을 그리드는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직접 제국을 방문해야겠어.”
“잠입해서 친히 암살하실 계획입니까?”
“가능해?”
“불가능하죠. 전하께서 아스모펠 경을 납치해 온 뒤로 제국의 방위 시설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됐습니다. 투명 망토를 입어도 수색 마법에 발각될 겁니다.”
물론 제국령 외진 곳이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모탈은 황궁을 근거지로 삼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황궁에 무사히 잠입한다는 건 페이커가 아니라 페이커의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할 텐데, 그리드가 잠입에 성공한다? 말도 안 됐다.
“…설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라우엘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 있음을 확인한 까닭이다.
“설마 정면으로 쳐들어가실 생각입니까?”
칸의 죽음 이후 그리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보여 준 모습 또한 냉정하여 훌륭했다.
그래서 방심하고 말았다. 지금의 그리드가 제정신일 리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걱정 마. 아직까지는 정신줄 단단히 붙잡고 있으니까.”
걱정하는 라우엘을 안심시킨 그리드가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제국으로 서신을 보내. 템빨왕 그리드가 공식적으로 방문할 거라고.”
사하란 제국은 서대륙의 주인이다. 그리드는 왕국을 건설하자마자 황제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어야 했다. 하지만 거부했고, 그렇기 때문에 제국에게 억압받아 온 것이다.
“휴전도 맺었겠다… 이참에 황제한테 눈도장이나 찍어 놔야지.”
제국이 템빨국에 휴전 협정을 제안했다는 것은 템빨국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드는 현재 시점에서 제국을 방문할지라도 모욕을 당할 리 없다고 믿었다. 제국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해 놓기에 지금처럼 적절한 시기도 없다는 판단이었다.
생각을 읽은 라우엘이 감격했다.
“휴전 이후, 언제 한번 제국에 방문하셔도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불쾌해하실까 봐 끝끝내 말하지 못했죠.”
그리드가 제국을 방문해서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경우 휴전 협정의 기간을 늘릴 수도 있다.
“근데…….”
기대하던 라우엘이 문득 의문을 느꼈다.
“황제를 찾아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임모탈을 넘기라고 하실 겁니까?”
“내가 바보도 아니고, 뻔히 거절당할 부탁이나 하려고 고개를 숙이겠어?”
“휴.”
‘이제는’ 바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안도하는 라우엘에게.
“대장간에 가 있을 테니까 광룡철 가져와. 템빨 인력소에 있는 세공사들과 조각사들 모조리 소집하고. 아, 그리고 상인 랭커 중에 ‘뮤토’라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에게 내가 거래하고 싶어 한다고 전해 줘.”
그리드가 의미심장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드의 의도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라우엘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라우엘의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개인의 무력뿐만 아니라 주변의 환경 모든 걸 이용하려고 애쓰는 지금의 그리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지적 발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마치 침팬지를 보는 것 같군.’
침팬지 등의 영장류 동물들은 비교적 지능이 높다. 하지만 단지 타고난 지능만으로는 영리해질 수 없다. 도구나 환경을 이용하는 방법을 습득해야 비로소 영리해질 수 있었다.
지금의 그리드처럼 말이다.
지금의 그리드를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완숙의 단계…….”
“뭐? 갑자기 계란은 왜 찾아?”
“…….”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라우엘이 산통 깬다는 표정을 지었다.
***
“지금부터 광룡철로 장식품을 만들어 줘.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하지만 대충 만들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예술성이 높지 않으면 저쪽에서 선물로 줘도 안 받을 테니까.”
“네. 근데 이거 세공하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내가 도울게. 그리고 화이트, 당신은 장인들과 함께 광룡철로 대량의 바늘을 제작하도록 하세요.”
“바늘…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제아무리 견고한 성벽일지라도 바늘이 들어갈 틈쯤은 있지 않겠습니까? 판미르라고 새로 온 대장장이에게 이것저것 잘 좀 가르쳐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라인하르트 정중앙에 위치한 대장간 지구가 칸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활력을 되찾았다.
대량의 인력이 집결한 채 각자 맡은 작업에 열중했고, 그들을 지켜보는 그리드는 살의를 불태웠다.
‘기다려. 내가 몇 번이고 찾아가서 죽여 줄 테니까.’
임모탈이 제국으로 숨어든 것은 차라리 행운이다.
이번 기회에 미래의 적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입혀 놓을 수 있게 됐다.
생각하는 그리드,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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