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9화
이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달라고? 자네 네크로맨서 아닌가? 쯧, 일자리는 다른 곳에 가서 알아봐.”
“장난치는 거요? 네크로맨서 길드에서 네크로맨서를 거부하는 경우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소?”
“어디에 있기는? 여기에 있지! 썩 꺼져!”
“이런 미친……!”
폴드 왕국.
현재는 템빨국 소속이지만 과거에는 사하란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 작은 나라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왕권이 교체될 때마다 수만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내란을 겪어 온 것이다.
이유는 사하란 제국의 개입에 있었다. 제국은 적통성이 부족한 왕자들을 은밀히 후원하고 선동하는 방식으로 폴드 왕국의 왕위 계승에 혼란을 안겼고, 폴드 왕국은 왕권이 교체되는 시기마다 피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탓일까. 폴드 왕국의 황폐한 대지에는 원한에 사로잡힌 혼령이 셀 수 없이 많이 배회했다. 사방 천지에서 언데드와 고스트 계열의 몬스터를 찾아볼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들이 폴드 왕국을 보물섬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언데드를 권속으로 만들 수 있는 네크로맨서들에게 있어서 폴드 왕국은 이상향에 가까운 주거지였다.
불과 어제까지는 말이다.
“환장하겠네. 퀘스트를 주는 NPC가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NPC들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돌변했어. 여태까지 쌓아 올린 친밀도가 무용지물이라고.”
“버그 아닐까? 네크로맨서 길드까지 네크로맨서를 홀대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고객 센터에 문의해 보니까 버그 아니라는데.”
제3회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3일이 지난 날.
네크로맨서들은 폴드 왕국 어디에서도 퀘스트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식당이나 여관 등의 기본 시설조차 이용하지 못하는 등 왕국민들에게 노골적인 적의와 천대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 따지고 들었다가 폭행을 당하거나 추방된 네크로맨서가 부지기수였다. 왕국 차원에서 네크로맨서들을 핍박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수인족 왕국 세이렌은 폴드 왕국보다 한술 더 떴다.
“네크로맨서잖아? 소속을 밝혀라.”
“네? 왜요?”
“까라면 까! 앗! 이놈 이거 임모탈이다! 당장 체포해!!”
“히, 히익!!”
수인족 병사들은 세이렌을 방문하는 네크로맨서들을 강압적으로 검문하고, 그들의 소속을 밝혀냈다. 그리고 임모탈 소속의 네크로맨서를 발견하면 가차 없이 체포해서 무려 일주일이나 감옥에 가둬 버렸다. 체포 과정에서 저항하다가 살해당한 임모탈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이게 뭔 날벼락이란 말인가?
네크로맨서들의 혼란이 가속화되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템빨국을 침략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힌 임모탈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바입니다. 우리에게 물질적, 인적 피해를 입히고,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안긴 그들을 우리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우리를 지지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한국 서울에서 열린 그리드의 기자회견이 전 세계 뉴스를 장식했다.
임모탈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그리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평범한 네크로맨서 플레이어들은 임모탈을 원망하고 비난하였다.
임모탈 내에서도 파벌이 갈렸다.
이번 사건의 주동자인 베라딘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빗발쳤다.
분노하는 동료들을 베라딘이 진정시켰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입게 될 타격은 미미합니다. 폴드 왕국과 세이렌 등 템빨국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에서 활동하는 것만 피하면 충분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어요.”
“지금 가장 큰 문제가 폴드 왕국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거잖아?”
“폴드 왕국보다 더 이상적인 사냥터는 대륙 곳곳에 많습니다만. 평소에 얼마나 정보 수집을 게을리 했으면 그것도 모르는 겁니까?”
“익……! 그동안 폴드 왕국에서 쌓아 올린 친밀도를 무시하는 거냐? 너 대체 뭐가 그렇게 당당해? 네가 멋대로 벌인 짓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사죄라도 해야 합니까? 왜요? 우리는 아그너스 님을 도와 죽은 자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모인 조직 아닙니까? 제가 이번에 템빨국을 침략한 이유는 아그너스 님의 왕국 건설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템빨국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고,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행동이었는데 어째서 그걸 비난받아야 하는 거죠?”
“…….”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는 판미르의 섭외에 성공했습니다. 이대로는 템빨국의 아이템 생산 기반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아서 대장간을 침략한 거고, 실제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 행동이 정말로 비난받아야 하는 겁니까?”
“…….”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임모탈 소속원들은 더 이상 베라딘을 욕할 수가 없었다. 멋대로 일을 벌인 행위는 괘씸했지만, 의도만큼은 비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속내가 어찌 됐든 명분이 너무 좋았다.
분위기가 진정된 것을 확인한 베라딘이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템빨국의 척살령은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템빨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서 활동하면 그만이에요. 템빨국이 우리를 잡겠다고 헛수고하는 이때 우리는 힘을 비축하고 왕국 건설의 기반을 다집시다.”
베라딘은 자신만만했다.
그리드가 아무리 용을 써 봤자 투입할 수 있는 인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템빨국이 임모탈을 찾는다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이 없었다.
모두가 베라딘의 생각에 동의하고 안심하는 그때, 네크로맨서 랭킹 2위 불렛이 거수했다.
“네크로맨서들의 원성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지?”
임모탈 때문에 죄 없는 네크로맨서들까지 큰 피해를 입었다. 임모탈을 특정 짓기 어려웠던 템빨국이 모든 네크로맨서를 억압한 탓에 갈 곳 잃은 네크로맨서가 많았다. 특히 그들 대부분은 중저레벨 유저였으므로 폴드 왕국이 무척 중요했다.
“그들이 템빨국에 협력하는 식으로 분풀이할 가능성이 있어.”
불렛의 우려였지만.
“아니요. 네크로맨서들은 우리를 섣불리 적대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를 적대했다가는 훗날 아그너스 님께서 건국하실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단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애초에 그리드가 억압한 것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자연히 그리드를 향하게 되어 있어요.”
베라딘은 이번 사태에 대해서 큰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손해로 각인된 일은 본인의 죽음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그의 예상보다 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큭큭, 너희들 말이야. 도대체 무슨 수로 감당하려고 이딴 짓을 벌인 거야? 응? 약골들 따위가. 큭큭!”
회의실 문이 허락도 없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내가 등장했다.
아그너스였다.
베라딘을 비롯한 장내의 모두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멀쩡한 상석은 놔두고 창틀에 걸터앉은 아그너스가 베라딘에게 이죽거렸다.
“그리드가 전 세계 플레이어를 상대로 임모탈에 현상금을 걸었다.”
“네?”
“임모탈 한 명의 목을 따 올 때마다 아이템을 하나씩 만들어 주겠다는데? 큭큭, 킥킥킥!!”
“무슨……!”
베라딘과 임모탈 소속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드의 척살령이 템빨국 국내에 한하지 않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갈 거라고 상상한 사람, 최소한 이 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리한 베라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템을 보상으로 걸어?’
자금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템빨국의 재정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베라딘은 그리드가 허풍을 떠는 것이라고 보았다.
주작궁을 판매하고 지슈카의 전 재산을 강탈(?)한 그리드의 개인 재산은 상상도 못하는 그였다.
“애초에 그리드의 척살령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요?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침략당한 일은 순전히 그리드의 잘못입니다. 본인이 완벽히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을 수습하겠답시고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그의 모습은 대중에게 필시 부정적으로 비칠 거예요.”
현실을 부정하는 베라딘에게 아그너스가 이죽거렸다.
“그리드가 크라우젤을 꺾은 걸 잊었어?”
“……?”
“킥킥! 너, 대가리는 잘 쓰면서 상징이 지니는 힘은 모르는 거냐? 지금의 그리드는 지존이야.”
“아…….”
베라딘이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의 그리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망과 동경을 받는 존재다. 그리드에게 절대적인 호의를 보내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리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큰 힘이 실리게 되어 있었다. 그리드는 손쉽게 대중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난감해하는 베라딘의 귓가에 창백한 얼굴을 바짝 들이댄 아그너스가 속삭였다.
“음침한 네놈이 무슨 꿍꿍이속을 품었던 건지 내 모르겠다만……. 이번 상대만큼은 네 뜻대로 안 될 거야. 그치? 큭큭!”
움찔!
베라딘이 깜짝 놀랐다. 아그너스의 말투에서 자신을 향한 불신을 감지한 까닭이다.
여태까지 자신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왔던 아그너스가 사실은 불신을 품고 있었다고?
당황하는 베라딘의 안색을 확인한 아그너스가 긴 혀를 날름거렸다.
“내가 바보가 아니잖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템빨국과 절대로 충돌하지 말라던 네놈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멋대로 템빨국을 침략했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응?”
꾸우욱.
베라딘의 가녀린 어깨를 움켜쥐는 아그너스의 손에 큰 힘이 실린다. 네크로맨서 계열 직업군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강력한 악력이 베라딘의 얼굴을 구겨지게 만들었다.
“페이커를 이겼다지? 네가? 큭큭! 대체 네놈의 정체가 뭔데?”
“그,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닥치고 내 말 들어.”
“…….”
“네가 무슨 꿍꿍이속을 품었든 나는 관심 없어. 나중에 내 뒤통수를 후려치더라도 상관 안 해. 왜? 네깟 놈이 어떤 수작을 부려 봤자 나를 어쩌진 못할 거거든.”
“…….”
아그너스의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보고 선 베라딘은 깨닫는다.
“하나만 명심해라. 어떤 개짓을 하고 다녀도 좋으니까, 여태까지 그랬듯이 나한테 편의를 제공하는 것만큼은 잊지 마. 개처럼 부려 먹히고, 가끔씩은 나를 절제시켜. 그럼 내가 네놈을 버리지 않고 쓸모 있게 써먹어 줄 테니까.”
아그너스는 미치지 않았다. 단지 감정이 과격한 나머지 가끔씩 미친놈처럼 보였을 뿐이다.
사실 처음부터 의심하기는 했다.
단순한 미친놈이라기에는 너무 명확한 목적의식을 품고 행동해 왔으니까.
그래서 흥미를 느꼈던 것이고, 곁에서 관찰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음흉한 놈일 줄은 몰랐다.
‘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고?’
치를 떠는 베라딘에게.
“자,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임모탈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이대로 방관할까? 아니면 네놈이 바라는 대로 그리드와 싸워 줄까? 골라 봐. 나는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거든.”
“…당분간 제국으로 피신해서 황비의 비호를 받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 악문 베라딘이 현실적인 대응책을 내놨다.
아그너스를 궁지로 몰아넣고 그의 광기가 증폭되는 것을 엿보겠다던 처음의 계획은 이제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그너스에게 의미 없는 싸움을 강요했다가는 불신만 키울 가능성이 높았다.
베라딘은 임모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 와신상담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황비의 치마폭이라고 마냥 안전할까?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20억이라는 숫자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드가 얼마나 집요한 인물인지도 몰랐다.
한 가지 목적을 품었을 때 발휘되는 그리드의 끈기 또한 광기에 가깝다. 현실을 망각하고자 재미를 추구할 때 발생하는 아그너스의 광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광룡철 가져와.”
임모탈이 제국에 숨어들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리드가 내린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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