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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23화 (618/1,794)

템빨 37권 - 8화

“칸!!”

덥석!

잿빛으로 흩어지는 칸의 육신을, 그리드는 결단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처절하게 끌어안았다.

“행복해야만 하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시간이 없다.

칸은 단 하나의 바람을 유언으로 남겼다.

쏴아아아아-

마지막으로 그리드를 안아 보고 싶었던 칸의 두 손이 그리드의 몸을 감싸기 전, 완전히 산화되어 사라진다.

울컥, 설움이 복받치는 칸이었으나 내색하지 않고자 밝게 웃었다.

그리드의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될, 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카아아아아안!!!”

그리드는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칸의 감촉을, 체온을, 체취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여 간절히 손을 뻗어 보지만 부질없다. 그의 손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공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오빠…….”

그리드와 칸의 마지막 이별을 지켜보는 루비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코끝을 붉게 물들인 채 엉엉 우는 그녀를 페이커가 부축했다.

“혼자 있게 해 주자.”

***

처음으로 나를 인정해 주었던 사람.

고생과 슬픔, 그리고 환희를 공유했던 사람.

제자이자 스승이었고,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칸이다.

그리드가 머릿속에 ‘소중한 사람’을 그릴 때면 그가 늘 선두에 있었다.

“끅…….”

텅 빈 대장간.

이제는 칸이 없는 그곳에서, 메마른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리드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칸이 떠나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은 흘릴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다시 또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고약한 영감 같으니.”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한참을 오열하던 그리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공허한 대장간에 메아리쳤다.

“내 기술을 전수받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기로 했잖수? 근데 왜… 근데 왜 약속을 어겨? 응? 이 나쁜…….”

나쁜 사람.

원망 어린 한마디를 토해 내려던 그리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신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고, 혹시나 오해해서 칸을 지옥에 떨어뜨릴까 봐 걱정한 것이다.

“…….”

공허 속에 시간이 흐른다.

그리드는 칸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는 대장간을 살피면서 깊은 원한을 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원한이었다.

어째서 칸을 지키지 못했는가.

어째서 조금 더 빨리 도착하지 못했는가.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보냈어.”

인기척을 느낀 그리드가 말한다.

“하지만 작별의 시간은 고작 1초였다.”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을까?

마음속으로만 아버지, 할아버지라고 외쳤지, 정작 효도 한번 못했다. 마지막 가는 길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리드를 라우엘이 위로해 주었다.

“칸 님께는 그 1초가 영원 같았을 겁니다. 외롭지 않았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전하를 만날 수 있었으니 행복했겠죠.”

칸 사망 후 13시간 23분.

그리드가 넋 놓고 있는 동안 라우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오는 길이다.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서 임모탈 소속원들을 파악하고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그들의 활동 반경과 근거지를 조사 중이오니 전하께서는 척살령만 내려 주십시오.”

감히 템빨국을 침범하고 그리드의 가족을 해친 놈들이다. 그리드를 위해서라도, 템빨국의 위상을 위해서라도 용서는 없다.

라우엘을 비롯한 템빨단원들은 임모탈에게 지옥 그 이상을 보여 줄 각오였다. 앞으로 영원히 고통받으면서 후회 속에 살아가게끔 철저히 짓밟을 계획이었다.

“또한 칸 님의 장례식은 생전의 업적을 고려해서 국장(國葬)으로 치를 예정입니다. 나라 경제와 군사력 발전에 그분께서 기여하신 바가 전하 못지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보고하던 라우엘이 잠시 입을 닫았다. 후우, 심호흡하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새롭게 출현했던 전설의 대장장이 말입니다만… 예상하셨겠지만 칸 님이 맞습니다.”

‘큰 별이 졌다’는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던 시간과 칸이 사망한 시간이 일치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후까지 철을 두드렸던 칸은 종국에 이르러서야 전설이 된 것이다. 비록 찰나밖에 존재하지 못했던 전설일지라도, 그의 위업은 영원히 회자될 것이었다. 라우엘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중독이 아니라 자연사로 파악됩니다.”

전설에게는 모든 상태 이상 저항과 5초 불사라는 패시브 스킬이 존재한다.

만약 칸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전설이 되는 순간 독을 해독하고, 생명력은 최소치로 고정되어 살아남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페이커와 루비, 그리고 성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분석해 보건대 칸은 천수를 다한 것이 확실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고통 없이 떠나셨을 겁니다.”

그리고 전설의 5초 불사 덕분에 잠시나마 그리드를 만날 수 있었으니 여한이 없었으리라.

그리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를 바라면서 보고하는 라우엘이었으나, 정작 그리드의 분노는 극한까지 치솟고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독에 당했기 때문에 수명이 단축된 걸 수도 있다.”

“…….”

“설령 아니더라도, 칸은 지독한 중독의 고통을 인내해야만 했어.”

안 그래도 노쇠한 상태로 몇 시간을 중독돼 있었다.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완화된 고통밖에 체험하지 못하는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칸이 느꼈을 고통과 공포를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부인과 아들을 여읜 후 쭉 슬픔 속에 살았던 칸이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통받았다는 사실이 그리드는 한없이 슬펐다.

“임모탈…….”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그리드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쥔 채 이만 갈 뿐이었다.

마음을 다스리고 정신을 수습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제가 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서 인사한 라우엘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드를 대신해야 하는 그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전하의 상태를 보아하니 군대를 움직일 준비도 해 놔야겠군.’

라우엘은 그리드의 폭주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단순히 척살령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전군을 움직여서라도 임모탈을 학살할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좋은 전개는 아니다. 도리어 최악이다.

전쟁은 병사와 식량, 그리고 천문학적인 재화를 소모한다.

네크로맨서로 구성된 임모탈과 전쟁을 벌일 경우 템빨국이 입을 피해는 무척 컸다.

‘베라딘 개자식. 하필이면 제국과 휴전을 맺고 있는 이때 사고를 치다니.’

라우엘은 제국과의 휴전 기간 동안 국력을 20퍼센트 이상 상승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마이너스가 되게 생겼다. 휴전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는 제국을 감당하기가 더 어려워질 공산이 컸다.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힘없는 걸음으로 출구를 향하는 라우엘.

그를 뒤로한 그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칸의 모루 위에 놓인 풀 플레이트 아머가 뒤늦게 그의 시선을 끌었다.

칸의 유작.

갑옷에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살피는 그리드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

등급:비화(祕話)

내구력:??? 방어력:???

옵션:???

제2대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와 제3대 전설의 대장장이 칸의 숨겨진 이야기가 담긴 갑옷입니다.

*오로지 <그리드>만이 아이템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드 본인입니다.]

[아이템 정보가 갱신됩니다.]

띠링~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

등급:비화(祕話)

내구력:1,721/1,721

방어력:1,410

*생명력 회복 속도 20퍼센트 증가

*마법, 물리 공격에 받는 피해 40퍼센트 경감

*즉사, 암살 계열 스킬에 면역

*체온 유지

*파티를 맺을 경우, 파티원의 숫자에 따라서 추가 방어력 상승

*갑옷의 내구력이 하락할 때마다 방어력 상승

*마법 방어력 +300

*피격을 입을 시, 높은 확률로 <독귀의 독>을 방출합니다.

*패시브 스킬 <만독불침> 생성

*패시브 스킬 <움직이는 요새> 생성

전설의 대장장이 칸이 그리드의 안전을 기원하며 제작한 갑옷입니다. 칸의 배려와 애정, 그리고 정성과 독이 듬뿍 들어갔습니다.

파그마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대장장이 알바티노의 걸작 <발할라>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입니다.

성능은 원본을 초월하며, 착용자의 행보에 따라서 신화가 될 여지가 있습니다.

무게:3,980

사용 조건:그리드

“칸…….”

칸이 이 갑옷을 만들기 위해서 쏟은 정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한 얼마나 고난이도의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지 그리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설계되었음도 눈치챘다.

결국.

“미안해요……. 미안해요, 칸.”

그리드는 또다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왜 나는 칸에게 선물을 주지 못했을까?

내가 그에게 이처럼 훌륭한 선물을 줬었더라면, 그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칸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깨달은 그리드가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에게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세우게 되었다.

-기자회견을 준비해 줘.

마음을 진정시킨 그리드가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네? 기자회견이요?

라우엘은 당장 베라딘과 아그너스를 찾아내라고 닦달할 줄 알았던 그리드가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했다.

그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타 세력을 침범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힌 임모탈을 규탄할 거다.

-…언론을 이용해서 여론을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그래.

대륙은 넓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임모탈 소속원들을 템빨단만으로 수색하고 징벌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물론 몇 명이야 찾아 죽일 수 있겠지만 그게 끝이다. 효율이 너무 적다.

-그러니까 손을 빌려야지. 20억 플레이어 모두에게 임모탈 척살령을 내릴 거야.

‘군대를 움직이는 사태까지 가는 건 안 된다는 걸 알고 계시는군.’

슬픔과 분노에 눈이 멀어 치기 어린 행동을 일삼을 줄 알았건만, 그리드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어엿한 국왕의 자세였다.

라우엘은 솔직히 감탄했지만 여론을 움직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임모탈의 급습과 칸의 죽음.

템빨국 입장에서야 큰 재난이고 슬픔이었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는 게임 속에서 벌어진 소소한 사건에 불과했으며, ‘고작’ NPC의 죽음이다.

그리드가 임모탈을 아무리 규탄해 봤자 비웃음을 사기밖에 더 하겠는가?

특히 그리드는 올해 국가대항전에서도 막대한 보상을 획득했다.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비웃음을 넘어선 조롱과 비난을 보낼 가능성이 컸다.

-언론까지 움직여 가면서 일을 키워 봤자 득 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임모탈을 규탄해 봤자 사람들에게는 어차피 남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협조해 주는 사람이 드물 거예요.

솔직하게 말하는 라우엘에게.

-네가 뭘 착각하나 본데.

-……?

-나는 사람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 언론을 이용하려는 게 아니야. 광고를 하려는 거지.

-광고… 말입니까?

-그래. 기자회견에서 임모탈 놈들에게 응징하는 것을 정당화한 후, 나는 사람들에게 임모탈을 사냥해 올 때마다 아이템을 만들어 주겠다고 홍보할 거다.

-…….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그리드의 광고가 세상에 전파되는 순간 20억 명의 임모탈 사냥꾼이 생기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아이템에 눈 돌아가서 만사 제쳐 두고 임모탈만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었고, 임모탈은 숨을 장소 없이 무한 PK에 노출될 터였다.

하지만 이는 즉 그리드가 막대한 재산을 내놔야 한다는 뜻이 됐다.

수백 명, 아니 어쩌면 수천수만 명이 될지도 모를 사냥꾼들에게 보상으로 아이템을 제작해 주다 보면 주머니가 텅텅 비고도 남을 것이다.

-…돈은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즉답했다.

-나 돈 많아.

지슈카에게 주작궁을 팔아넘긴 이후부터 꾸준히 재산을 불려 온 그리드가 각오를 밝혔다.

-개털이 되더라도 상관없어. 임모탈 그 개새끼들이 모조리 다 게임을 접을 때까지 척살령을 유지한다. 이건 명령이야.

이제는 템빨뿐만이 아니다. 그리드는 재력과 권력을 이용하는 방법까지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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