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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22화 (617/1,794)

템빨 37권 - 7화

주름 가득한 칸의 얼굴에 핏기가 없다. 손끝 피부까지 온통 창백했다.

몸속이 엉망일 것이다.

연신 검은 피를 토하는 그의 고통을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나를… 나를 대장간으로 데려다주시게.”

“…….”

페이커는 칸에게 휴식을 권하고 싶었다. 스틱세이가 돌아올 때까지 안정을 취하는 편이 그의 생존 확률을 높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칸이 여든 평생 대장일만 해 온 사람임을 상기한 것이다.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강철을 두드릴 때야말로 그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낄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차라리 대장일을 하는 편이 안정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페이커가 칸을 부축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칸이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고마우이. 고마워.”

지끈.

페이커의 가슴이 저려 왔다.

칸이 언제부터 이토록 왜소했던가.

그 크고 단단하던 손은 어디로 사라지고, 거죽 늘어진 노인의 손만 남았는가.

세월은 참으로 잔혹하다.

체다카 길드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던 칸의 옛 모습을 회상하면서, 페이커는 무엇보다도 그리드를 걱정하였다.

그리드가 느낄 슬픔이 지금 자신이 품은 슬픔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

여느 때와 달리 공기가 차다.

“…….”

텅 빈 대장간에 돌아온 칸이 눈시울을 붉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가득 채웠던 젊은 대장장이들.

언젠가는 자신들 또한 그리드 전하를 보필하고 싶다고 외치던 그들이 한 줌 재로 사라진 것이다.

무참히 사라진 그들의 꿈과 미래가 칸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돌아갈까요?”

떨리는 칸의 몸을 붙잡은 페이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나는 괜찮으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젊은이들의 영혼은 저승에 직접 찾아가서 달래 주리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은 칸이 자신의 용광로 앞으로 다가가 섰다.

페이커는 그의 곁에 물약 수백 개를 쌓아 놓았다.

“성녀를 데려오겠습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포션을 마시는 걸 잊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끄덕.

칸의 대답을 확인한 페이커가 곧바로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비상 연락망을 이용해서 성녀 루비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PvP 결승전이 끝나고 그리드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타이밍이었다. 연락이 닿질 않았다.

조급해진 페이커가 다른 템빨단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로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다들 그리드의 우승에 감격하고 축하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쾅!!

페이커의 주먹이 벽을 때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되는 자해가 그의 주먹을 피로 물들였다.

“…빌어먹을.”

페이커는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템빨국을 보위하겠다고?

노인 한 명 지키지 못하는 반푼이 주제에?

‘왜 더 노력하지 못했지?’

노말 클래스의 한계는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세상에는 아직 자신이 모르는 괴물 같은 플레이어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했다.

지독한 오만이다.

흑요와 싸워 이긴 이후,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착각했다.

조금 더, 조금 더 발악해야 했다.

얼굴을 감싸 쥔 페이커가 바닥에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다급히 전화를 받는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성녀 루비의 전화였기 때문이다.

***

“칸 할아버지!”

따앙, 따앙.

고요한 밤에 울리는 망치질 소리가 오늘따라 외롭다.

허겁지겁,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장간에 도착한 루비가 멈칫했다.

“할아버지…….”

“오오, 우리 공주님 오셨는가.”

불꽃을 눈앞에 두고 선 사람이 맞는가?

용광로를 마주 보고 있는 칸의 살색은 완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무색하게도 그의 피부는 달아오르지 않았고, 도리어 차가워 보였다.

“하, 할아버지…….”

루비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빛을 바랬다.

자신을 친손녀처럼 아껴 주고 보살펴 주던 칸이다. 루비도 그가 친할아버지처럼 좋았다. 그가 자신을 영원히 아껴 주리라 믿었고, 자신 또한 영원히 그를 따를 계획이었다.

한데 저 초췌한 모습은 뭐란 말인가. 이제 더 이상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통을 숨기려 하는 칸의 모습이 루비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소망! 자애의 빛! 정화!!”

루비는 칸의 고통을 어서 끝내 주고 싶었다. 황급히 힐을 사용한 후 대상의 상태 이상을 모두 치유하는 정화 스킬까지 사용했다.

[대상을 회복시킵니다.]

[대상이 노쇠하였습니다. 육체가 한계 상태입니다.]

[회복 효과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해독 효과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

매일 선행을 베푸는 과정에서 루비가 구한 목숨은 한둘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한데 정작 소중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게 생긴 것이다.

성녀의 권능을 의심 없이 의지해 왔던 루비는 충격이 무척 컸다.

“저, 정화……! 정화! 정화!!”

루비는 Satisfy 플레이 경험이 짧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NPC의 천수 개념이 낯설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계속해서 스킬을 사용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칸이 손을 얹었다.

“진정하거라.”

“하, 할아버지…….”

“미안하구나. 이 할아비가 너무 늙은 탓에 우리 공주님에게 아픔을 주게 생겼어. 허허.”

“읏……!”

와락!

루비가 칸의 품에 안겨 들었다.

늘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칸의 품이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웠다.

그녀의 가늘게 떨리는 등을 칸이 토닥여 주었다.

“너무 아파하지 말거라. 슬퍼할 필요 없다. 아직 어린 청년이었던 그리드 전하께서 훌륭한 성인이 되었고, 소녀였던 우리 루비 공주께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가고 있으니, 이 늙은 노인네는 이만 흙으로 돌아가야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으아아앙!!”

루비가 결국 오열하기 시작했다. 성녀의 막중한 책임을 의식해서였는지 늘 온화하고 차분한 모습만 보였던 그녀가 처음으로 소녀처럼 굴었다.

꾸욱.

입술을 깨문 칸이 심호흡한 후 말했다.

“허허, 슬퍼하지 말래도. 천수를 누리고 떠나는 게다. 도리어 축하를 해 줘야……. 쿨럭! 쿨럭쿨럭!!”

각혈하는 칸의 생명력 게이지가 대폭 떨어졌다.

중독 증세가 심해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루비가 경악성을 토하는 그때 마침 페이커가 돌아왔다. 그는 원정을 나갔다가 막 복귀한 성직자들을 데리고 오는 길이었다.

“빛의 여신께 기도합니다.”

“당신의 아들에게 평온을.”

두 손을 모은 성직자들이 기도를 시작했다. 17명 이상의 레베카교 사제가 하나의 기도를 외워서 전개하는 궁극 치유기, <빛의 기도>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칸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페이커에게 다가온 성직자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떠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앞으로 4시간, 4시간만 더 버티면 됩니다.”

4시간 후면 스틱세이가 돌아온다. 아니, 더 빠를 수도 있다. 대현자의 지혜가 칸을 살릴 것이다.

믿으며 외치는 페이커의 시선을 성직자들이 조용히 외면했다.

페이커의 믿음이 헛된 희망임을 알리는 태도나 다름이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주며 엉엉 우는 루비를 다독인 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용광로 앞에 놓인 모루에 다가가 섰다.

모루 위에는 갑옷이 놓여 있었다.

칼과 창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 플레이트 아머였다. 검정색 철판과 철판을 연결하는 황금색 고리와 경첩, 그리고 붉은색 버클 하나하나까지 모두 다 섬세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설계부터가 뛰어난 갑옷이었다. 착용자의 안전을 책임지되 행동에 제약이 없게끔 궁리한 흔적이 곳곳에 역력했다.

“조금만 더…….”

“…….”

따앙, 따앙, 따앙.

루비와 페이커는 칸을 말리지 못했다.

갑옷에 새로운 철판을 덧대고, 다시 또 단련하고.

경첩을 연결하고, 고리를 연결하고, 다시 또 단련하고.

따스한 눈길로 갑옷을 살피면서 작업에 정성을 다하는 칸의 모습,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독에 고통스러워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말이다.

“…진정한 장인이시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성직자들이 떨리는 음성으로 감탄한다. 칸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가짐은 마치 레베카 여신상을 앞에 두고 기도할 때처럼 경건했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흐… 흐흐.”

작업이 후반에 이를수록 고도의 기술을 뽐내던 칸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깨달은 것이다.

금색과 적색 디테일이 들어간 묵색의 갑옷.

이 색상, 그리드 전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고 있지 않은가?

이 갑옷이 부디 전하의 마음에 들기를, 전하께서 한 번쯤은 착용해 주시기를, 나도 참 간절히도 바라고 있었나 보다.

“…커헉!”

“할아버지!!”

생명력 물약을 입으로 가져가던 칸이 또 한 번 피를 토해 냈다. 여태까지와는 비교가 안 되는 대량의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작업 내내 루비와 성직자들의 힐이 칸의 몸을 감쌌지만 부질없었던 것이다.

‘보내 드려야 할 때인가.’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페이커가 칸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했다. 10분의 1도 남지 않은 상태로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드.’

페이커는 초조해졌다.

지금쯤이면 칸의 소식을 접했을 그리드가 부디 늦지 않고 도착해 주기를 그는 바랐다.

칸에게도, 그리드에게도 작별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은가.

‘제발, 어서.’

어서 도착해라, 그리드.

페이커의 마음이 더욱더 간절해지는 그때였다.

따아아아앙-!

“……!”

페이커도, 루비도, 수십 명의 성직자들도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놀랐다.

마지막으로 갑옷을 연결하고 단련하는 칸의 망치질 소리가 가슴을, 영혼을 울려 온 까닭이다.

“오, 오오오…….”

“칸…….”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렀다.

대장일에 문외한이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칸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따앙… 따앙… 따앙…….

“…….”

모두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칸의 망치질 소리가 잦아들더니 급기야 끝을 고했다.

칸의 생명력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순간.

[새로운 전설의 대장장이가 탄생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대장장이가 그를 칭송하며 우러러볼 것입니다!]

5초.

현재 Satisfy에 접속 중인 모든 플레이어에게 이와 같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월드 메시지였다.

그리고.

“허억! 허억! 칸!!!”

그리드가 달려왔다.

3초.

숨 돌릴 틈도 없이, 그저 망연자실한 얼굴로 칸을 바라보는 그에게.

“왔는가.”

1초.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칸이 두 팔을 벌렸다.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하는 그의 품으로 그리드가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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