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21화 (616/1,794)

템빨 37권 - 6화

뮐러, 파그마, 브라함, 마드라, 란스티어, 포비아, 크루제, 기스, 알렉스.

전대 전설 9인의 이름이다.

플레이어 대부분이 그들을 알고 있었다. Satisfy 세계관에서 전대 전설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전대 전설들은? 전전전대의 전설들은?

모른다.

플레이어가 역대 모든 전설의 정보를 수집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제는 역사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 너무 먼 과거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포기븐, 텐, 아린……. 나 또한 머나먼 과거의 전설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전대 전설이었던 란스티어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지. 우리의 스승께서 그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거든.

서론이 길다.

데스나이트 카일로와 스켈레톤 나이트의 공격을 피하고, 막아 내는 페이커가 카심에게 작은 원망을 품기 시작했다.

“우선은 칸 님부터 구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의 스승 또한 란스티어라는 이름을 사용했었다.

“……?”

-란스티어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야. 천 년도 더 전부터 존재해 온 그림자 집단 이클립스의 수장에게 내려지는 호칭이다. 우리… 그러니까 나와 도란의 스승은 32대 란스티어셨지. 알겠나?

푸욱-!

카일로의 단도가 페이커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아찔한 고통을 느낀 페이커가 이를 악물고 반격했으나, 스켈레톤 나이트가 카일로를 보호했다.

카심의 방관이 계속됐다.

-지금부터 내가 네게 전해 줄 술법은 전설의 어쌔신이 사용하던 술법과 동일한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온전한 것은 아니지.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많은 묘리가 소실된 술법이다.

이 힘을.

-전설의 경지까지 끌어 올리는가, 아니면 우리의 스승과 나, 그리고 도란처럼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무르게끔 하는가. 그건 순전히 너의 몫이다.

채챙! 챙!!

도대체 왜 나서 주지 않는가?

칸이 그리드에게 어떤 존재인지 카심 또한 모르지 않을 텐데?

아주 중요한 히든 퀘스트의 전조에 기뻐하기는커녕 카심에 대한 원망만 깊어지는 페이커였다. 그는 본인의 발전보다 칸의 안위를 더 우선순위로 두고 있었다. 설령 히든 퀘스트의 발동이 멈출지라도 카심이 그만 나서 주길 원했다.

“카심……!”

급기야 재촉하는 페이커의 귓가로.

-초조해하지 마라. ‘나’는 곧 도착한다.

카심의 의미심장한 대사와,

“근성만큼은 칭찬해 드리죠.”

베라딘의 이죽거림이 동시에 들려왔다.

사령의 탑 때문에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인 페이커는 스켈레톤 나이트에게 구속당했다. 날아드는 카일로의 단도를 확인한 그가 죽음을 직감했다.

베라딘.

보통의 네크로맨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생존력과 지배력을 겸비한 그는 페이커에게 뼈아픈 절망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달 찌르기>에 당하고도 멀쩡했던 베라딘을 목도한 시점부터 페이커는 깨달았다. 베라딘에게는 숨겨진 힘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베라딘이 자신보다 몇 수나 위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임모탈은 템빨국이 측량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세력이 아닐까?

‘죄송합니다, 칸.’

코앞까지 도달해 온 카일로의 단도가 페이커의 시야에 투영된다.

칼날의 형태는 물론이고, 녹색 손잡이에 양각된 뱀의 비늘 개수까지도 그의 두 눈에 똑똑히 각인됐다.

죽음을 앞둔 지금.

페이커는 초월적인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의 사고력이 시간의 속도를 초월한다.

꿀꺽!

단도가 미간에 박히기 직전.

페이커가 어금니의 틈새에 끼워 놓고 있던 작은 약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과거, 히든 퀘스트 <어쌔신의 마음가짐>을 클리어하고 얻었던 자폭용 환단이었다.

환단을 복용한 사람은 그 즉시 폭사(爆死)하며, 그 대가로 자신의 반경 2미터에 있는 대상을 ‘즉사’시킬 수 있다.

단, 사망 페널티가 3배 상승한다.

경험치를 3배 더 잃고, 아이템을 드롭할 확률이 3배 더 높아진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게임 접을 각오한 사람이 아닌 이상 자폭용 환단을 복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커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환단을 복용했다. 순전히 칸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데스나이트와 스켈레톤 나이트를 길동무로 삼는다면, 수애와 주작단이 남은 적들을 처리하고 칸을 구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을 페이커는 품고 있었다.

그리고.

푸화하하학!!

페이커의 그림자가 역행하는 폭포처럼 솟구쳤다.

그림자 왕 카심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로드와 아이린이 기거하는 왕궁에서부터 이곳까지, <그림자 이동>을 몇 번이나 사용해서 도착한 그가 페이커의 등짝을 후려침과 동시에 카일로의 단도를 그림자로 방어했다.

“쿨럭!”

“지독한 놈. 역시 네게는 자격이 충분하다.”

페이커가 환단을 토해 내는 모습을 확인한 카심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베라딘은 당황하고 있었다.

“당신은 또 누굽니까?”

페이커와 주작단, 그리고 이제는 카심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훼방꾼이 베라딘은 치가 떨리도록 거슬렸다.

“방해하지 말고 퇴장해 주시죠!”

소리치는 베라딘.

그의 의지에 호응한 카일로와 스켈레톤 나이트가 카심을 공격했다.

카일로는 여태까지보다 더 많은 독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베라딘의 마나가 빠르게 소모됐다. 마나 물약이 마나의 소모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이건 베라딘의 의도가 아니었다. 카일로의 폭주였다.

왜?

아직 지배력은 충분한데?

베라딘의 뇌리로 의문이 스쳐 지나가는 그때.

채챙! 챙!!

페이커만큼 빠르고, 카일로보다 더 흉포한 기세로 단도를 휘두른 카심이 카일로와 스켈레톤 나이트의 공격을 맞받아치고 있었다.

카일로와 스켈레톤 나이트의 발밑 그림자가 솟구친다.

푸우욱-!

콰자자작!!

“뭣……!”

베라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창처럼 솟구친 그림자에 꿰뚫린 카일로의 생명력이 일격에 대폭 하락했고, 스켈레톤 나이트는 재가 되어서 폭삭 주저앉은 까닭이었다.

키익……! 키이이이이이!!

카일로의 폭주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기이한 음성과 막대한 양의 독기를 토해 내면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도대체 왜?

그 해답, 카심이 준다.

“이 녀석, 내게 살해당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건가?”

“……!!!”

베라딘이 경악했다.

독귀의 에피소드를 꿰고 있는 그가 카심의 정체를 드디어 눈치챘다.

“그림자 왕……!”

현존 최강의 어쌔신.

세상 모든 그림자를 넘나드는 그의 신출귀몰함은 해방될 수 없는 죽음의 선고이며.

“그림자 병사여.”

10만의 대군에 10만의 그림자 병사로 맞서는 그의 위엄은 여느 왕 못지않으니.

“표적이 되지 말지어다…….”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베라딘의 진이 빠졌다.

저 거물 중의 거물, 아니 괴물 중의 괴물이 어째서 템빨국에 있는가?

이와 같은 의문도 품지 못한 채 그는 그저 공포에 떨었다.

거대한 대장간은 이미 수백, 수천 기의 그림자 병사로 가득했다.

“이, 이게 뭐야?”

“어……? 어어? 으아아아악!!”

임모탈 소속 네크로맨서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신의 숫자가 곧 권속의 숫자.

물량을 위시하는 네크로맨서에게 있어서 ‘그림자의 숫자가 곧 병력의 숫자’인 카심은 극악의 카운터였다.

물량에 압도당하는 네크로맨서처럼 무력한 존재도 없었다.

서걱!

츠카카카칵!!

어느새 수십 구로 불어나 있던 구울과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그림자 병사의 칼과 창에 난도질당하고 주저앉는다.

온통 검게 물든 대장간의 중심에서, 카심은 페이커에게 한 권의 책자를 건네주었다.

<란스티어의 술법 지식> 중 일부를 서술해 놓은 책자였다.

“스승님께 도란이 이어받았던 기술이다. 나의 재능과 정서로는 계승할 수 없었던 기술이지. 하지만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로드의 곁을 지키면서 페이커를 주시해 왔던 카심이다. 그가 봤을 때 페이커의 재능은 자신을 초월했다.

“네게 있어서 그 힘은 시작에 불과할 게다. 우선 도란을 넘어서라. 그리고…….”

힐끔.

카심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베라딘에게 꽂혔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베라딘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고 있었다.

어리석다.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선고를 당했음을 모르는가?

피식.

조소한 카심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나의 기술을 계승해라.”

도란의 기술과 카심의 기술이 합쳐지는 순간 란스티어의 술법이 완성된다.

전설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노말 클래스 전직자임에도 불구하고 태양급 강자 흑요를 쓰러뜨렸던 페이커에게 날개가 달리는 셈이었다.

하지만 페이커는 기쁨을 뒤로했다.

눈앞에 떠오르는 히든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접은 그가 칸에게 달려갔다.

“감사의 인사는 다음에.”

어차피 한집에 사는 식구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카심에게 가볍게 목례한 페이커가 칸을 데리고 대장간을 탈출했다. 스틱세이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심은.

푸화하하하학…….

베라딘의 발밑 그림자에서 등장, 곧바로 살수를 펼쳤다.

비장의 한 수 <죽음 극복>으로 카심의 공격을 몇 차례나 버텨 내는 베라딘이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조금 전 재가 된 데스나이트 카일로를 다시 소환하려면 무려 18시간이 지나야 했고, 설령 카일로를 소환하더라도 승리를 점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피를 토하고 쓰러진 그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심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왜 웃는 거냐는 질문조차 던지지 않고 비수를 꽂으려는 그에게 베라딘이 황급히 소리쳤다.

“저를 죽였다가는 후회할 겁니다!”

“왜지?”

드디어 관심을 보이는 카심에게 베라딘이 설명했다.

“제가 설마 아무런 보험도 없이 이곳을 침략했을까요? 제가 죽으면 템빨 왕비와 왕자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당연히 허풍이다.

제아무리 베라딘이라도 아이린과 로드를 해칠 생각은 감히 품지 못했다. 그들이 그리드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도의적인 문제를 감안해서 표적에서 제외한 게 아니다. 그들이 만전의 안전을 확보하고 있을 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에 제외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사실대로 고할 이유가 없다.

베라딘은 죽음으로 발생할 페널티를 원하지 않았다. 베라딘이 감당해야 할 페널티는 평범한 플레이어와 차원이 달랐다.

“그래? 로드 왕자와 아이린 왕비에게도 병력을 보냈어?”

“당연합니다. 무려 20기의 데스나이트를 당장에라도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죠. 제가 죽으면 그들도 무사하지 못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입에 담던 베라딘이 말을 멈췄다. 카심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배까지 부여잡고 웃었다.

‘너무 과장했나?’

데스나이트 20기는 너무 심했다. 뻔히 허풍으로 들릴 것이다. 10기쯤이라고 할 걸 그랬다.

불안해하는 베라딘에게.

“데스나이트 20기라……. 지금쯤 모조리 흙으로 돌아갔겠구나.”

로드의 곁에는 레베카의 딸 후보가 무려 200명이나 있다. 데스나이트가 정말로 떼거리로 덤비더라도 상성상 그녀들의 상대가 못 된다.

그리고 애초에 카심은 로드와 아이린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페이커를 지원 올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위험의 여지가 있었다면 카심은 결코 자리를 비우지 않았을 것이다.

푸욱!!

카심의 검이 괘씸한 놈의 심장을 찔렀다.

[사망하였습니다.]

[경험치 32.3퍼센트를 잃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환국 백성의 조건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동안 얻은 부가 효과가 전부 사라집니다. 효과를 다시 얻으려면 조건을 처음부터 다시 충족하십시오.]

막대한 피해다.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날려 버린 셈이다.

베라딘은 Satisfy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다.

정작 목표였던 칸은 놓치고, 젊은 대장장이 몇 명 죽인 대가라기엔 너무 컸다.

같은 시각, 스틱세이의 집무실.

“이 독을 치료할 만한 해독제를 구하려면 엘프의 나라를 다녀와야 한다네. 서두를 터이니 여기서 기다리시게.”

“칸 님을 모시고 가는 편이 더 빠른 치유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엘프의 나라에 인간이 출입하려면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해. 이 부분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네.”

“하다못해 정확한 시간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다녀오시는 데 얼마나 걸리는 겁니까?”

“6시간… 아니, 7시간…….”

“더 빨리는 안 됩니까? 칸 님의 고통이 너무 큽니다.”

“…노력해 봄세.”

칸을 진찰한 스틱세이는 무척 서둘렀다. 곧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사라졌다.

페이커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7시간이라니?

노쇠한 칸이 앞으로 7시간이나 중독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다.

안타까워하는 페이커에게 칸이 부탁했다.

“나를… 나를 대장간으로 데려다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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