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5화
삐이이이이이이-!!
페이커가 휘파람을 불었다.
바깥에서 대기 중인 템빨그림자단을 소집하는 신호였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우리 임모탈 또한 거대한 세력입니다. 당신 못지않은 인재가 수두룩하죠. 그들에게 당신의 부하들 따위는 크게 어렵지 않은 상대입니다.”
지상의 베라딘이 말한다. 데스나이트를 뿌리치고자 기둥을 넘나드는 묘기를 선보이는 페이커를, 마치 우리 안 원숭이 보듯이 감상하면서 말이다.
10여 기의 새로운 스켈레톤 나이트가 대장간에 진입하고 있었다.
바깥에 대기 중이던 템빨그림자단을 박살 내고 합류한 네크로맨서들의 권속이었다.
더군다나.
워어- 우워어어…….
대장장이들의 시체가 구울로 변해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채챙! 채채챙!!
집요하게 쫓아오는 데스나이트의 단도를 막아 내는 페이커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중독된 칸의 생명력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고, 자신은 혼자인 반면 적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입장이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최우선 과제였으나, <카일로>라는 이름의 데스나이트가 예상 이상으로 강했다.
독과 환술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침식자> 계열 어쌔신이면서 근접 전투 능력까지 탁월하다. 살아생전 굉장한 실력자였음이 분명했다.
“쿨럭! 쿨럭쿨럭!!”
데스나이트 카일로는 베라딘의 마나를 근원으로 삼아서 끊임없는 독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놈이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칸의 중독 증세가 심해졌고, 생명력이 소모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촤르르르르륵!!
간헐적으로 발동하는 환술은 페이커의 실력에 제약을 주었다. 안 그래도 칸을 보호하면서 싸워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양팔이 꽁꽁 묶인 심정이었다.
{페이커:제1대장간으로 지원 바람.}
악착같이 버티면서 길드창에 외쳐 보지만,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다.
템빨단원 전원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결승전을 관람하고자 자리를 비운 게 분명했다.
그들을 원망해야 하는가?
아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칸을 지켜 달라는 라우엘의 당부가 없었더라면, 자신 또한 남들과 마찬가지로 로그아웃한 상태였을 거다.
채챙! 채채채채챙!!
스아아아아악-!
페이커가 환술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카일로가 환술의 발동 횟수를 늘렸다. 주인 베라딘의 마나 사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연속적으로 스킬을 전개, 페이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큭……!”
환술에 빠진 페이커는 무엇이 실체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됐다.
카일로의 단도가 수백 개로 보였고, 품에 안은 칸이 해골로 보였다. 발판으로 삼고 있는 사방의 기둥들은 뱀의 대가리로 변해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푸욱-!
서걱!!
혼란에 빠진 페이커의 몸에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급기야 지상으로 추락하는 그의 곁으로 스켈레톤 나이트들과 구울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베라딘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페이커가 추락하면서 본인의 몸을 돌보기는커녕 칸을 보호하는 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템빨국 내에서 칸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좋아. 표적을 제대로 정했다.’
벌써부터 눈앞에 선하다.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템빨국과 이로 인해 분노할 그리드의 모습이.
그에게 사냥당하고 배의 분노를 품게 될 아그너스의 광기는 과연 어디까지 도달할까?
두근! 두근!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는 베라딘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당장 행동을 멈추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무장한 여성과 사내들이 대장간에 나타났다.
수애와 주작단이었다.
라우엘의 안배다.
판게아를 수호했던 무사들.
서대륙의 기사보다 평균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그들에게 라우엘은 대장간 단지의 수호를 맡겼다. 안전장치는 페이커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호오, 좋은데?”
임모탈의 네크로맨서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들은 고양이처럼 요염한 수애의 눈빛에 매혹되었다. Satisfy에 미인 NPC가 수두룩하다지만, 수애는 그중에서도 특출했다. 최소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미인이었다.
“속살 너머를 보고 싶어. 흐흐! 데스나이트로 만들어 버리고 싶구만.”
거구의 네크로맨서가 대놓고 군침을 흘렸다. 네크로맨서 랭킹 7위 드루였다.
수애가 네임드급 NPC임을 한눈에 알아본 그는 진심으로 수애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그가 현재 보유 중인 데스나이트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베라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좋았어!”
허가가 떨어졌으니 저건 내 거다.
다른 네크로맨서들의 야유를 뒤로한 드루가 자신의 스켈레톤 나이트에게 수애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키야아아!!
기성을 토한 스켈레톤 나이트가 수애에게 달려가 언월도를 휘둘렀다.
판게아에서 철갑귀를 상대하던 수애에게 스켈레톤 나이트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
키엑!
“뭐라고!!”
“……!”
스켈레톤 나이트가 일격에 나가떨어지자 네크로맨서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이커급?’
고작 NPC가?
템빨국이 숨겨 놨던 정예다!
빠르게 파악한 드루가 황급히 데스나이트를 소환했다. 아직 베라딘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해서 소환 유지 시간이 짧다지만, 그래도 데스나이트다. 스켈레톤 나이트보다 몇 배는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권속이었다.
상대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수애가 주작단원들을 재촉했다.
“저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어서 칸 님을 구출하세요!”
“예!”
혼전이 빚어졌다.
아스모펠에게 검술을 사사하고 더욱더 강해진 주작단원 수십 명이 구울을 도륙하고, 스켈레톤 나이트를 넘어뜨리면서 진격했다.
수애는 데스나이트의 발을 묶었다. 그녀 또한 다른 주작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아스모펠에게 검술을 배웠으므로 판게아에 있던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더 강했다.
그들 덕분에 숨통이 트인 페이커가 베라딘의 데스나이트를 뿌리칠 수 있었다.
칸을 안전한 장소로 옮긴 그가 해독제를 꺼내 먹였다.
하지만 칸의 중독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생명력이 하락하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는 게 전부였다.
베라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독귀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
“20종류가 넘는 독을 배합한 극독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자신의 몸에 투여한 사내가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요. 전해지기로는 독물로 목욕까지 했다죠?”
그 결과.
“사내는 숨만 쉬어도 독을 내뿜는 체질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걷는 길은 오로지 죽음밖에 없었다고 하죠. 암살이 아니라 대량 살상을 일삼은 그는 보통의 어쌔신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가 바로.
“저의 데스나이트, 카일로입니다. 그의 백골에 스며들어 있는 극독을 보통의 방법으로 해독하는 건 불가능하죠.”
“…….”
거짓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칸은 해독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독의 데미지가 높지 않아서 생명력 회복 물약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겠으나, 칸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NPC들이 느끼는 고통의 수위는 현실의 인간과 같다고.
‘스틱세이에게 모시고 가야 한다.’
대현자의 지식과 지혜라면 필시 해독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은 페이커가 칸에게 몇 개의 생명력 회복 물약을 건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호흡하면서 카일로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에 베라딘은 코웃음 쳤다.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는 겁니까.”
수애와 주작단은 분명히 강했다. 애초에 페이커가 등장한 시점부터 적의 전력은 베라딘의 상정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베라딘과 임모탈의 전력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커야 베라딘 혼자서 제압할 수 있었고, 수애와 주작단은 임모탈의 정예만으로 충분했다.
지금 당장은 양측의 전력이 비등해 보일지 모르나 균형의 추는 금방 무너질 것이었다. 주작단원 한 명이 죽는 순간 저울은 기운다.
딱!
느긋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튕긴 베라딘이 카일로에게 명령했다.
“마무리하세요.”
크워어-
저벅저벅.
카일로가 독의 숨결을 뱉으면서 페이커에게 접근했다.
페이커가 경계하는 건 놈의 독보다 환술이었다. 어쌔신이라는 직업 특성상 독에 대한 내성은 높은 편이었지만 환술에 대한 보정 효과가 없었다.
‘눈을 마주쳐선 안 된다.’
시선과 공격의 경로는 이어지는 법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고수들은 상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놓치지 않는 것을 전투의 기본으로 삼았다.
페이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데스나이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환술이 발동했으므로 놈의 보랏빛 안광을 고의적으로 외면했다.
같은 고수로서 페이커의 의도를 읽어 낸 베라딘은 혀를 찼다. 환술을 너무 의식해서 도리어 더 불리한 싸움을 자처하는 페이커의 판단력이 저급해 보였고, 실망감을 느꼈다.
서걱!
페이커는 금방 위기에 빠졌다.
칸을 보호하는 와중에도 카일로의 공격을 10회 중 8회는 방어하고 회피하던 페이커가 이제는 대부분의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곧 끝나겠군.’
고작 저런 수준의 사람들이 아그너스를 해친다고 덤벼들어 봤자 위협이나 될까?
템빨국이라고 해 봤자 결국 그리드와 크리스를 제외하면 다 고만고만해 보인다.
“……!”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베라딘이 흠칫 놀랐다.
“달 찌르기.”
베라딘이 잠시 상념에 빠진 틈을 노리고 귀신같이 접근한 페이커의 단도가 베라딘의 심장을 꿰뚫었다.
“큭……!”
무려 4만대에 육박하는 데미지!
<가속>과 연계되어 발동한 페이커의 궁극기가 베라딘의 시야를 붉게 점멸하게 만들었다.
황급히 생명력 회복 물약을 꺼내 마시는 그의 가슴을 페이커의 단도가 연속적으로 찔렀다.
뒤늦게 그를 쫓아온 카일로가 저지하지 않았다면, 베라딘은 그대로 잿빛으로 산화했을 것이다.
페이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네크로맨서와 싸워서 이기려면 하수인이 아니라 술자를 제압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베라딘이 방심하게끔 유도하고자 일부러 수세에 몰렸던 것이다.
“이런… 자칫하면 당할 뻔했군요. 최후의 저항이 제법 매섭네요.”
베라딘은 다양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신속의 주인이 <가속>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면 안전하다.’
사령의 탑을 소환, 페이커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카일로를 강화시킨 베라딘이 <망령의 손>을 전개했다. 대상에게 적은 데미지를 입힘과 동시에 각종 디버프를 유발하는 공격 스킬이었다.
카일로에게 발이 묶여 있는 상태로 망령의 손까지 얻어맞자 페이커는 점차 힘을 잃어 갔다.
입구 쪽에서 전투 중인 주작단 또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사망하는 즉시 적이 되어 덤비는 동료들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은 급격히 무너졌다.
“허억… 허억…….”
카일로의 공세를 견디는 페이커의 호흡이 가쁘다. 신속의 주인이라는 클래스 자체가 본래 지구력이 나빴다. <가속>을 사용할 때마다 급속도로 하락하는 스태미나가 문제였다.
“카일로를 지원해라.”
더 이상 시간을 끌기에는 조금 불안했던 것일까?
베라딘이 스켈레톤 나이트를 추가로 소환했다. 이제 페이커는 데스나이트와 스켈레톤 나이트를 동시에 상대해야만 했다.
“페이커……!”
뒤편에서 칸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온다.
그는 자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자신을 지키겠답시고 희생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카일로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 내고 반격한 페이커가 칸에게 고개를 돌렸다. 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당신이 나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라.
페이커의 눈빛에 이와 같은 뜻이 담겼음을 확인한 칸이 울컥했다. 이를 악문 그가 생명력 회복 물약을 마시는 모습을 확인한 페이커가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베라딘은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언제까지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할 셈이지?’
승부는 곧 난다. 페이커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력의 차이를 떠나서 상성 자체가 베라딘이 너무 유리했다. 베라딘이 분석하기로 페이커는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캐릭 육성 초기부터 PvP를 감안했던 베라딘은 체력에 많은 스탯을 투자했고, 이로 인해서 높은 생존력을 확보했다. 직업 특성상 대상을 빠르게 제압해야 하는 어쌔신을 바보로 만들기에 딱 좋은 스펙을 보유한 것이다. 어쌔신의 공격을 버티고 스태미나 소모를 유도한 뒤, 데스나이트로 역공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베라딘이 지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어쌔신은 정말로 드물 게다. 대부분의 어쌔신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거든.
“……!”
페이커의 귓가로 음성이 들려왔다. 음성의 근원은 페이커의 그림자였다.
-그래, 네게는 도란의 술법이 어울리겠다.
‘카심……!’
페이커는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히든 퀘스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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