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7권 - 3화
“우와아아아아!!”
“그리드 님이 결국 해냈어!!”
“최고야! 늘 짜릿해!!”
“크흑! 갓리드……! 갓리드 사랑한다아!! 허헝! 어허허헝!!”
크라우젤보다 더 높은 단상 위에 오른 그리드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자랑스럽다.
독보 지존으로 군림해 왔던 크라우젤을 꺾은 그다.
지난 2년, Satisfy 약소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던 한국을 국대전 2위국으로 이끌었던 그가 올해는 1위국이라는 영광까지 안겨 주었다.
한국 선수들이 그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리드를 증오해야 하는 포식이불족발조차도 너무 기뻐서 전율할 정도였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직 애국심이 잠재되어 있었음을 깨달은 그가 극검과 얼싸 안고 방방 뛰었다.
“그럴 거면 공주님 설득해서 템빨단에 들어가라니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비올라가 핀잔을 준다.
모니터 속 그리드는 인터뷰 중이었다.
“Satisfy를 플레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제게도 크라우젤은 우상이자 목표였습니다. 그의 영웅담을 들으면서 꿈을 키웠고, 그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입니다.”
말을 멈춘 그리드가 저 멀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자단에 둘러싸여 있는 크라우젤을 바라본다.
그리드의 눈빛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크라우젤이 있어 준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크라우젤은 앞으로도 영원히 저의 우상일 것이며, 경쟁자일 것입니다.”
눈을 감고 심호흡하는 그리드.
현실에서도, Satisfy에서도 늘 꼴찌를 다투는 위치에 있던 자신이 정점에 도달하기까지 겪은 모든 일들을 회상한다.
이내 눈을 뜬 그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수백 대의 카메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상념은 이미 훨훨 털어 냈다.
“그리고… 캡슐은 혜성그룹 제품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드는 올해도 혜성그룹의 스폰을 받은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 시점에 광고를 터뜨려 준 그리드 덕분에 혜성그룹의 매출이 껑충 뛰었다. TV와 인터넷, 그리고 신문 광고 전부를 합친 것보다 그리드의 말 한마디가 매출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혜성그룹 임직원 일동은 그리드에게 무한한 감사와 애정을 느꼈다. 혜성그룹 회장은 기필코 자신의 막내딸을 그리드에게 시집보내겠다며 계획을 세울 정도였다.
하지만 혜성그룹 막내딸이 완강히 거부했다. 유라와 지슈카라는 세계 최고의 여성들이 그리드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단지 재벌가 딸이라는 타이틀만을 지녔을 뿐인 그녀로서는 그리드를 감당할 수 없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근데… 내년부터는 어쩌지?”
“그러게요. 상상만 해도 지옥이네.”
“뭘 어째? 그냥 포기해야지.”
크리스, 데미안, 폰, 레가스, 카츠 등.
그리드의 저력을 알고 있는 인물들은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올해 PvP 우승자가 됨으로써 내년의 <영웅>으로 등장하게 될 그리드를 어떻게 이겨야 할지, 그들로서는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것이었다.
“무한 경직은 기본이고 온갖 아이템으로 변신하는 갓 핸드에다가.”
“흑화와 벨리알의 힘…….”
“그리고 열망의 무아검을 쓰는 그리드를 무슨 수로 이겨?”
“이야루그트랑 펫 소환은 안 하기만을 빌어야지. 그럼 한 2년 후쯤에는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
2년 후에는 가능할까?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이들은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다.
내년의 <영웅 깨기>에는 참전하지 않는다. 그게 속 편하다.
***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가?”
“응.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이 먹고 싶어.”
“…어머니의 밥상이라. 부럽군.”
“어? 크라우젤 너도 어머니 모시고 살잖아? 뭐야? 어머니께서 다시 편찮아지시기라도 한 거야?”
“아니다. 별말 아니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지난 3일 동안 국가대항전의 무대가 됐던 도쿄돔.
폐막식이 끝난 후 텅텅 빈 그곳 관중석에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나란히 앉았다.
희미한 조명이 비추는 두 사람 모두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너의 활동 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겠지.”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개인이고, 너는 왕이다. 너는 보다 많은 정보를 획득하게 될 테고, 보다 많은 곳을 방문하게 되겠지.”
“흐흐, 초조한 거야? 걱정 마. 나는 왕의 책임을 짊어졌잖아? 나의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서가 봤자, 결국 너의 경쾌한 걸음걸이에 따라잡히고 말 거라고.”
“…이렇게 말하다가는 끝도 없겠군. 그리드, 한 가지만 명심해라.”
“뭔데?”
크라우젤의 눈빛이 무척 진중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그리드가 헤실헤실 웃고 있던 표정을 정리했다. 진지하게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크라우젤은 말하고 있었다.
“만약 왕의 자격으로 동대륙에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는 필시 환국과 엮이게 될 거다.”
크라우젤에게도 눈과 귀가 있다.
그리드보다 훨씬 앞서 동대륙을 방문했던 그는, 후에 동대륙을 찾았던 그리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단, 그리드가 이미 양반과 조우했다는 디테일한 정보까지는 모른다. 그저 판게아에서 활약하고, 그 주민 일부(?)를 템빨국에 이주시켰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너도 환국에 대해서는 들어 봤을 거다. 환국은 동대륙의 유일한 종교이며 지배자다.”
“사하란 제국보다 더한 놈들인가 보군.”
진지하게 말해 주는 크라우젤이다.
이미 아는 이야기니까 본론이나 꺼내라며, 싸가지 없게 반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맞장구쳐 주는 그리드에게 크라우젤이 고개를 저었다.
“사하란 제국은 비교 대상이 아니야. 말하지 않았느냐? 환국은 동대륙의 유일한 종교이기도 하다고. 환국의 주민들은 동대륙의 신이다.”
“…….”
그리드의 뇌리를 양반 가람이 스쳐 지나간다.
역시나, 크라우젤의 입에서 양반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양반……. 그들은 스스로 신을 자처하는 사이비가 아니다. 저절로 신이라 추앙받는 존재들이며, 그럴 만한 자격, 아니 정확히는 솜씨를 지닌 자들이다.”
크라우젤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최소 500레벨을 찍기 전까지는 그들과 엮이지 마. 부득이하게 동대륙을 방문해야 한다면, 그때는 꼭 개인으로서 방문해라. 혹시 너의 나라가 환국과 엮이게 되었다가는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니까.”
“뭐야? 어지간히도 위험한 놈들인가 보지?”
“엄밀히 따지자면 악은 아니다. 하지만 사상이 비상식적으로 어긋나 있어. 말 안 통하는 괴물쯤이라고 생각하면 돼.”
가람이 어떤 놈이었는지 떠올려 보면, 크라우젤의 이와 같은 표현이 충분히 공감된다.
실소를 터뜨리고 만 그리드가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놈들 강해? 너를 이렇게 쫄게 만들 정도로 말이야.”
크라우젤은 지체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다. 지금의 너에게도 그들은 태산이며, 태산 위에 또 태산이 있고, 그 위에 하늘이 있다.”
“…….”
가람이 언급했던 오존과 치우 등을 표현함일까.
크라우젤은 그들을 어디까지 만나 봤을까?
순수한 호기심을 품기 시작하는 그리드의 귓가로 크라우젤의 이어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
“번헬리어만큼은 아니야.”
“흐흐.”
크라우젤의 말뜻을 이해한 그리드가 기지개를 펴면서 일어났다.
“좋아. 알아들었어. 경계는 하되 쫄지는 않을게.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대니까 말이야. 드래곤에게도 쫄지 않는 내가 고작 그딴 놈들에게 위축될 일은 없을 거다.”
“알아들었으면 됐다.”
그래, 그저 경계만 하면 된다.
그 소시오패스 놈들은 괜히 먼저 관심 갖지 않는 이상 엮일 일 없을 거다. 그리드는 안전하다.
이처럼 믿는 크라우젤, 그는 모른다. 그리드가 이미 진즉에 양반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이만. 집밥 먹으러 찢어지자고.”
그리드가 이별의 악수를 건넸다. 소주 한 잔 걸치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크라우젤과 마음껏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날은…….
“삼세판.”
“……?”
“남자의 승부는 삼세판이라며? 내가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싸웠던 건 역시 무효 처리하는 게 맞아.”
“이제 와서 무슨 소리지?”
“너, 그때 피아로와 싸운 직후였잖아. 정상적인 상태로 싸웠으면 나를 이겼을 거잖아?”
“이미 지나간 일에 가정을 붙여 봤자 무의미하다. 나는 그때 졌고, 그게 바로 진실이다.”
“아니, 내가 납득 못해.”
그리드가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그리고 곧바로 크라우젤에게 등을 돌렸다.
“남은 세 번째 승부, 내년 국가대항전에서 치르자고. 그리고 그날 소주 한잔하자.”
“너……!”
그리드는 크라우젤의 외침을 무시했다. 대기하고 있던 툰의 경호를 받으면서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드는 눈치챈 것이다. 지존이라는 막중한 자리에서 해방된 크라우젤, 홀가분한 기분으로 속세를 떠날 생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시 예전처럼, 그는 두 번 다시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혼자서 은퇴하면 안 되지.”
너는 내 시야 안에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아직 내 뒤인지, 아니면 이미 나를 앞서갔는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냥 속 편하게 나랑 계속 놀자, 크라우젤.”
삼세판을 무효화시킬 방법이야 많다.
비단 첫 번째 승부뿐만이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승부에서도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태였으니까. 그건 너무 불공평했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싱글벙글.
미소 짓는 그리드를 룸미러로 확인하는 툰이 흠칫 놀랐다.
그리드가 짓는 표정으로부터 여태까지와는 다른 관록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오늘 오전과 비교해도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지존… 인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일개 전사에서 대장장이가 되었고, 체다카 길드원에서 템빨단 마스터가, 그리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템빨국 왕과 지존의 자리에 동시에 앉은 그리드.
그의 진화는 아직도 계속되는 중이었다.
1년 뒤의 그리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벌써부터 기대하던 툰이 갑자기 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
최악의 소식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툰이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피곤했던 것인지, 그리드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질문하는 운전기사에게.
“일단 어서 공항으로.”
툰이 재촉했다. 그리드가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좋은 꿈을 꾸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이다.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시점은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PvP 결승전 시작을 앞뒀을 때다.
“여긴가.”
베라딘이 이끄는 임모탈의 정예들이 라인하르트 중앙의 대장간 앞에 섰다.
엄청난 규모의 대장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장간 단지다.
최소 30개의 용광로를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대장간이 라인하르트 중앙에 다섯 채나 있었다. 아직 건설 중인 대장간도 많다는 게 경악스러운 부분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밤이 없는 도시라고 하더니, 그 모든 게 이 대장간 단지 때문이었군요.”
혀를 내두르는 임모탈의 네크로맨서들.
반면 베라딘은 미소 짓고 있었다.
‘이곳의 대장간을 모조리 불태우면 그리드가 어지간히 분노하겠군.’
세이렌에 머물던 전설의 농부 피아로는 뱀파이어 원정 이후 실종됐고, 그리드의 첫 번째 기사 쥬드는 여전히 바이란에 있다. 또한 대마법사 아슈르는 국경을 지키는 중이다.
그리드의 삼천왕, 이곳 라인하르트에는 없는 것이다.
황비 마리에게 받은 정보였으니 확실했다.
또한 지금은 중요한 국가대항전.
삼천왕을 대신해야 할 템빨단원들조차 대부분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때 라인하르트의 경비가 허술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중해야겠죠? 우선은 목표였던 칸부터 암살합니다.”
스르르륵.
은밀하게 소환되는 데스나이트가 어둠에 동화된다. <어둠 속 사신>이라는 이름을 날렸던 어쌔신 레반의 시체로 제작한 데스나이트다.
베라딘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임모탈의 미래를 위해서는 템빨국의 전력을 약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와 같은 명분으로 임모탈의 정예를 이끌어 온 그였으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분노하게 될 그리드.
그가 흑막이 아그너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뻔하다. 척살령이 떨어질 것이다.
긴박한 위기 속에서 아그너스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베라딘은 그게 너무 궁금했다. 그는 미친놈의 모든 면을 관찰하고 싶었다.
그렇다.
이미 과거에 라우엘이 추측한 바 있듯이, 베라딘은 아그너스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었다. 아그너스를 흥미로운 실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드는 실험의 제물로 선택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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