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14화 (609/1,794)

템빨 36권 - 21화

‘이제부터가 진짠가.’

고오오오오오오-

그리드가 몸에 두른 적색과 자색의 기운.

크라우젤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검성 뮐러가 전대 영웅왕이었니까.

‘투기…….’

그리드가 파그마에 대해서 알아 가고 있듯이, 검성으로 전직한 크라우젤 또한 뮐러에 대해서 알아 가는 중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뮐러의 에피소드를 다양하게 꿰고 있었다. 그런 그가 투기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영웅 중의 영웅에게 내려지는 힘.’

뮐러는 투기와 검기의 조합을 얻음으로써 완전해졌다고 전해진다.

그리드가 영웅왕의 칭호를 얻은 시점부터 크라우젤은 뮐러를 재현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만약 크라우젤이 뮐러의 그림자를 쫓는 입장이었다면 절망하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뮐러의 뒤를 쫓지 않았기에 영웅왕의 칭호에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하여, 그리드가 영웅왕으로 등극하였을 때 순수하게 축하해 줄 수 있던 것이다.

철컥!

작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힘든 싸움이 되리라.

투기를 두른 그리드를 마주하며 검을 고쳐 쥐는 크라우젤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차분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백아도를 거머쥔 그의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대악마 드라시온을 홀로 마주했을 때와 비견되는 긴장감이 그를 억압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존재감이 약화된 대악마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뜻이다.

“이제부터는 다를 거다!”

한껏 들뜬 그리드가 덤벼들었다. 상승하는 투기 덕분에 그는 보다 빠르고 강해진 상태였다.

쩌어어어엉-!!

“큭……!”

최고속을 향해 가는 그리드의 쾌검!

방어하는 크라우젤의 이가 악물린다. 그리드의 공격에 실린 무게는 마치 태산 같았다. 크라우젤의 육체를, 정신을 극한으로 내몰았다.

쩌엉-!

쩌정! 쩌저저정!!

크라우젤과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그리드의 투기가 상승했고, 이에 따라서 연격의 속도 또한 빨라졌다.

호선과 직선을 쉴 새 없이 그리는 흑적색 검광이 크라우젤을 전방위로부터 압박하였고, 크라우젤은 이를 막아 낼 때마다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급기야.

턱!

크라우젤의 등이 낡은 기둥에 막혔다. 그리드는 전진하는 과정에서 이미 보법을 밟은 상태였다.

“극(極)!”

파그마의 기본 검무 중 몇 안 되는 확정 스킬.

대상의 방어력을 일정량 무시하기까지 하는 강력한 종베기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다.

찰나, 크라우젤의 뇌리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극(極)은 과거에 이미 두 번이나 자신에게 반격당했던 기술이 아닌가?

극(極)을 사용할 때마다 <하늘 찢기>에 반격당하고 큰 피해를 입었던 그리드가 그 사실을 망각했을 리 만무하다.

‘따로 유도하는 바가 있는 건가?’

크라우젤의 직감이 <하늘 찢기>의 사용을 거부한다.

어느새 미간까지 떨어져 내리는 그리드의 검을, 크라우젤은 <검막>을 펼쳐서 방어하였다.

그러자,

‘칫!’

회(回)의 전개를 미리 준비하고 있던 그리드가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다.

그리드는 극(極)이 하늘 찢기에 반격당하는 순간을 역으로 노려서 회(回)를 전개, 크라우젤에게 치명적인 카운터를 먹일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쩌정-! 쩌저적!!

쿠와아아아아아앙!!

은빛의 검막과 극(極)의 충돌이 강력한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크라우젤이 등지고 서 있던 기둥은 물론이고 3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좌우의 기둥들조차 충격파에 휩쓸려 쓰러졌다.

고성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르르릉-!

무너지는 지붕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자욱한 흙먼지가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모습을 숨긴다.

자취를 감춘 둘의 모습을 찾아내고자 해설진과 관중들의 시선이 사방팔방으로 돌아가는 그때.

쿠웅-!

연기 속에서부터 튀어나온 그리드가 멀찍이 날아가 나뒹굴었다.

벌떡!

곧바로 몸을 일으킨 그가 다급히 마법을 전개했다.

“마력 탐지!”

[<마력 탐지(강화)> Lv.3을 전개합니다.]

스파아아앗-!

그리드의 몸으로부터 방출된 마나가 그의 주위를 스캔하자,

이름:크라우젤

레벨:???

직업:???

능력치:???

종족:인간

상태:플레이어

동대륙에서 3레벨을 달성한 이후부터 대상의 정보를 극히 일부 표기하는 <마력 탐지(강화)>가 크라우젤의 위치를 그리드에게 알려 주었다.

바로 코앞이었다.

채애애앵-!

그리드가 다급히 휘두른 검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막혀 멈췄고,

스르륵-

높은 첨탑 위에 떠 있는 보름달을 먹구름이 잠식했다. 그리고 <백광보>의 묘리로 달빛에 몸을 가렸던 크라우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악문 채 그리드의 검을 막아 내고 있는 그의 호흡이 가쁘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해설진과 관중들, 그리고 시청자들이 위화감에 휩싸였다.

『크라우젤 선수의 상태가 이상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크라우젤은 그리드와 다르다.

육체 능력이나 스킬, 그리고 아이템의 위력을 위시하여 상대를 제압하기보다 순수한 컨트롤 솜씨로 대상을 무력화시켜 왔다.

한데 그리드와 싸우는 동안은 그 고유의 컨트롤 솜씨가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전투 내내 스킬에만 의존하는 모습이 마치 그리드와 닮아 있었다.

사람들이 추측하기 시작한다.

“크라우젤의 컨트롤 솜씨가 예전만 못해진 건가?”

“아니면 그리드의 컨트롤 솜씨가 크라우젤과 비등해졌다거나……?”

“아무튼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군.”

사람들이 크라우젤을 선망해 온 이유는 그의 솜씨를 닮고 싶어서였다.

나 또한 저만큼 움직일 수 있다면.

저 상황에 저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면.

어떤 점이라도 크라우젤의 반만 따라가면 랭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늘 이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크라우젤을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품지 못했다.

그리드와 대결 중인 크라우젤은 평소보다 많이 부족해 보였다.

‘검성으로 전직한 여파가 아닐까?’

레전드리 클래스.

그중에서도 최강이라는 검성의 스킬은 하나같이 위력이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단편적인 예가 바로 ‘세상을 가르는’ 우주 검이다.

어쩌면 크라우젤은 그 스킬들의 위력에 도취되어 본인의 강점을 망각한 상태가 아닐까? 저도 모르게 스킬에만 의존하다 보니 컨트롤 실력이 저하된 게 아닐까?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지금의 크라우젤, 경기 초반에 사용한 <이기어검>으로 방출한 4자루의 검을 실시간으로 조작 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작년과 비교해서 갓 핸드의 사용에 능숙해진 그리드의 강점을 차단하고자 크라우젤은 4자루의 검에 신경을 분산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드를 상대함에 있어서 섬세함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기어검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크라우젤의 속사정을 알아줄 리 만무했다.

반면.

‘힘들지?’

그리드는 크라우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파그마의 후예의 전용 아이템인 갓 핸드마저도 퀄리티 높은 동작을 수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섬세한 명령 체계가 필요한바.

크라우젤의 이기어검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그리드의 추측이었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이기어검을 전개 중인 크라우젤은 정신력의 소모가 평소보다 배 이상 빨랐다.

‘갓 핸드! 계속해서 크라우젤을 공격해라!! 쉬지 말고 몰아붙여!!’

그리드가 갓 핸드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 대략적인 명령만 내려도 스스로 행동하는 ‘자아를 가진 아이템’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크라우젤은 아직 획득하지 못한, 레전드리 클래스 전용 아이템의 위엄이 십분 발휘된다.

펑-! 퍼퍼퍼펑!!

표적을 오로지 크라우젤로 정한 갓 핸드들이 매직 미사일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접근해서 묠니르를 휘두르기에는 4자루 검의 방해를 받았으니, 차라리 묠니르를 버리고 원거리에서 그리드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슈슉! 슉!!

지그재그로 이동하며 매직 미사일을 회피, 이때 발생하는 허점을 노리고 옆구리를 베어 오는 그리드의 공격은 <초감각>에 의존하여 방어한 크라우젤이 반격하려다가 멈췄다.

후방으로부터 새로운 그리드가 나타난 까닭이다.

도플갱어 <랜디>였다.

벌써 3회째인 크라우젤과의 대결 중에 그리드가 최초로 펫을 소환한 것이다.

<배틀 필드>의 영향이다.

이제 그리드는 인지하고 있었다. 펫 또한 자신의 실력임을. 정정당당한 승부를 하겠답시고 펫의 사용을 자제하는 행위, 쓸데없는 오기임을 깨달았다.

“살(殺)!”

등장과 동시에 보법을 전개, 과연 네임드급 펫답게 주인의 스킬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랜디였으나.

“하늘 찢기.”

콰작! 콰자작-!

등장과 동시에 크라우젤의 반격기에 당하고 잿빛으로 산화하고 만다.

그리드가 긴 세월 동안 의지해 왔던 쌍두마차 중 하나가 허무하게 소멸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미안……!”

등장하자마자 잿빛으로 산화하며 사죄하는 랜디에게.

“충분히 잘했다!”

격려를 보내는 그리드.

“극살(極殺)!!”

융합 스킬의 보법을 드디어 완성한다.

전투 내내 크라우젤에게 차단당해서 완성시키지 못했던 보법이다. 랜디가 크라우젤의 시선을 끌어 주지 못했다면 영영 완성시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쿠오오오오오오!!

궁극의 살의가 담긴 극한의 베기.

이것은 곧 찌르기로 연계된다.

번헨 열도에서, 그리드가 자신의 분신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연마하였던 이 스킬은 대상에게 필중하며 방어력을 무시한다. 파그마의 검무 중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궁극기였다.

크라우젤이 자랑하는 반격기, 하늘 찢기로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이 내포된 스킬이다.

작년, 지근거리에서 ‘즉시 발동’하는 <자진모리>를 전개함으로써 이 공격을 차단하였던 크라우젤이지만.

‘늦었다……!’

올해의 크라우젤은 랜디라는 미끼에 당해 버렸다. 랜디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뒤를 돌아봤던 크라우젤, 극살(極殺)에 대한 반응이 늦고 말았다.

서걱-!

직선으로 떨어진 흑적색의 검광이 크라우젤을 양단한 후.

푸욱-!!

이어서 찌른다.

필중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최강의 스킬.

근육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사용자의 생명력 4,500을 손실하게끔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대상에게 69,3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천하의 크라우젤에게 치명상을 안기는데 고작 4,500의 생명력이 문제겠는가?

그리드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그때,

덥석!

품에서 금색 복숭아를 꺼낸 크라우젤이 그것을 한입 베어 먹었다. 크라우젤이 판게아의 <작은 영웅>으로 활약한 대가로 얻었던 궁극의 생명력 회복 아이템이다. 이 황금 복숭아는 복용자의 생명력을 최대치까지 회복시켜 버린다.

대상을 일격, 이격에 해치워 버리는 까닭에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PvP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그리드.

그를 저격한 S.A그룹이 올해부터 새롭게 적용시킨 PvP 룰, ‘물약 복용 가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크라우젤이었다.

“뭐……!”

크라우젤의 생명력 게이지가 최대치로 회복돼 버리자 당황하는 그리드.

그를 <자진모리>로 날려 버린 크라우젤이 검성의 고유 궁극기 중 하나인 <단죄 검>을 전개하였다. 광역기인 우주 검과 달리 단일 대상을 노리는 이 스킬의 위력은 우주 검을 가뿐히 초월한다. 본격적인 역습의 서막이었다.

초반부터 우주 검을 사용함으로써 그리드의 <종횡무진>을 의도적으로 소모시켰던 크라우젤.

그는 충분한 승산을 엿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설령 1퍼센트의 승산이라고 할지언정 크라우젤은 희망을 품었다. 본인이 앞으로 1년 동안, 정말 단 1년 동안만이라도 더 그리드의 목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단죄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이 있듯이, 하늘은 천재를 사랑하지 않는다.

빛나는 재능을 내려 준 대가로 치명적인 저주를 안긴다.

[<진(眞) 백아도>가 공명합니다!]

[§저주§ <번헬리어의 시선>이 발동합니다!!]

[후퇴하십시오!!]

<번헬리어의 시선>

악룡 번헬리어가 당신을 감시합니다.

번헬리어가 괜한 심술을 부리고 싶어 하는 날, 당신은 불의의 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발동 조건:무작위

진 백아도에 귀속된 저주 옵션.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발동한 적 없던 그것이 하필이면 지금, 크라우젤이 지난 1년 3개월 동안 꿈꿔 왔던 승부에서 발동하고 만다.

크롸롸롸롸라라!!

지축을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보름달을, 아니 하늘 그 자체를 지워 버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등장하자.

“피해라!!”

단죄 검의 전개를 멈춘 크라우젤이 그리드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극악의 확률로 발동한 최악의 상황.

이에 대해서 원망할 겨를도 없이 크라우젤은 그저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드가 자신이 아닌 변덕쟁이 용에게,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이때 무참히 짓밟히는 결과를 그는 간과할 수 없었다. 작금의 상황에 대한 책임, 그저 자신이 짊어질 뿐이다.

“종횡무진!”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네임드 보스를 ‘혼자서’ 3마리 사냥할 경우 획득하는 칭호, 은밀한 영웅.

그리드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그리드보다 한발 늦기는 했지만 크라우젤 또한 올해 이 칭호를 획득했다.

이로 인해서 종횡무진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스파앗-!

회색 비늘로 뒤덮인 악룡 번헬리어가 쏘아 낸 브레스를 회피하고 상승, 놈의 거대한 대가리 앞에 도달한 크라우젤.

나부끼는 흑발 아래로 번뜩이는 눈동자로 드래곤을 마주하고 선 그를, 세상 사람들은 그저 넋 나간 채 지켜봤다.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단 두 명밖에 없었다.

진 백아도의 옵션을 알고 있는 자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리드다.

“저 썩을 도마뱀이……!”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타나 우리의 승부를 방해하다니?

꽈드득! 이를 가는 그리드의 몸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투기, 완연한 자색을 띠고 있다.

그의 시선이 오로지 번헬리어만을 좇는다. 크라우젤은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십만대군 학살검.”

무패의 힘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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