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19화
압도적인 무위를 기반으로 결승전에 직행한 그리드와 크라우젤.
경기 시작까지 30분 남은 시간을 확인한 그들이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
‘이길 수 있을까?’
‘이겨야 한다.’
‘올해가 아니면.’
‘더 이상은 이길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서로의 실력을 목도한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가늠하기 어려운 서로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품었다.
두근, 두근, 두근…….
한국 선수 대기실.
평소보다 빨라진 심장 소리에 귀를 맡긴 채, 소파에 기대어 앉은 그리드는 회상한다.
크라우젤과 처음 만났던 그날을.
감히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쉽지 않던 하늘 위의 하늘이 ‘나’를 온전히 마주하던 순간의 감격을 떠올린다.
‘…좋았다.’
그 감격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을까.
크라우젤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리드는 격변했다. 보다 넓은 세상을 알았고, 성장하였으며, 본인의 저력을 알았고, 올곧은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크라우젤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다.
‘내가 그때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여기까지 성장하지 못했겠지.’
그래, 그리드에게 있어서 크라우젤은 각별한 사람이었다. 때때로 은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번 헨 열도의 정보를 공유받았으니 실제로도 은인인 셈인가.’
피식, 미소 지은 그리드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크라우젤, 네게는 나의 성장을 확인할 의무가 있다.”
이긴다.
이번에는 기필코 이긴다.
열망하는 그리드.
지금의 그는 깨닫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은 누군가의 뒤를 쫓는 사람이 아니라, 보다 앞서 나가야 하는 사람임을.
자신을 보고 꿈을 키우는 중인 템빨국 백성들과 한국의 젊은 플레이어들을 위해서라도, 그리드는 진화해야만 했다.
크라우젤이라는 하늘을 꺾음으로써 말이다.
‘여태까지 네가 맡아 왔던 역할… 앞으로는 내가 대신해 주마.’
꾸욱.
떨리는 손을 말아 쥐는 그리드의 얼굴, 그 어느 때보다 더 비장하다.
***
상념에 젖은 그리드를 혹 방해라도 할까 염려한 다른 한국 선수들은 대기실 바깥에 나와 있는 상태였다.
“누가 이길까?”
다른 이들은 함부로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그 의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성격의 비올라가 가장 먼저 거론한다.
그러자,
“당연히 갓리드가 이기지.”
극검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반면.
“…….”
다른 선수들은 섣불리 추측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무려 1년 3개월 만에 성사된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리매치.
여기에는 두 사람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운명까지 걸려 있었다. 이번 경기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종합 순위 1위 국가가 결정됐고, 종합 1순위 국가의 국민들은 대량의 경험치 버프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한국 선수들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그리드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천외천이라는 점이었다.
Satisfy가 오픈한 이래 쭉 지존으로 군림해 온 인물.
제아무리 그리드가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과연 크라우젤을 꺾을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결국 부딪쳐 봐야 알겠지.”
포식이불족발이 말한다.
“검성이 된 크라우젤의 저력을 가늠할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리드 또한 아직 모든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어. 누가 이길지는 그들 본인도 모를 거다.”
<검성>이 최강의 전투 특화 클래스라는 사실은 아마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크라우젤을 앞서는 템빨과 렙빨이 있었다.
“…뭐, 개인적으로는 그리드를 응원한다.”
단지 버프가 탐나서가 아니다.
자신을 꺾었던 그리드가 이제 와서 크라우젤에게 진다면?
‘나도 덩달아 크라우젤 아래라는 소리가 되는 거잖아. 젠장!’
의문의 1패만큼은 사양한다!
간절히 바라는 포식이불족발의 속마음도 모른 채, 극검은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리드의 승리를 바란다고? 족발 친구! 자네도 드디어 갓리드의 매력에 빠진 겐가!!”
“무슨 헛소리를……! 그저 버프가 탐나서 그런 거다!!”
결승전 시작까지 20분 남았다.
***
미국 선수 대기실.
“…….”
눈 감은 채 정좌하고 앉은 크라우젤이 떠올린다.
지독한 광기를 품었던 아그너스와 처음으로 조우하였던 날을.
속세에 전혀 관심이 없던 하스터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우하였던 날을.
검은 눈동자에 불꽃을 품고 있던 그리드와 처음으로 조우하였던 날을.
S.A그룹이 <기적의 5인방>이라고 칭하는 그들 중에서 크라우젤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피아로와 싸운 직후였다고는 하나, 그리드는 그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긴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때부터.’
크라우젤의 시선과 의식은 늘 그리드를 좇아왔다.
그리드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크라우젤은 더 큰 의욕을 품었고, 이를 토대로 더 빠른 성장을 이룩해 왔다.
크라우젤은 깨닫고 있었다.
만약 그리드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자신은 도태되지 않았을지언정 허무라는 이름의 저주에 빠져 공허해졌을 거라고.
‘그때부터 쭉 즐겁다.’
슬그머니 눈을 뜨는 크라우젤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크라우젤 선수, 경기 시작 15분 전입니다. 무대로 이동해 주십시오.”
대기실 바깥에서 진행 요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부름에 응하는 그에게 라우엘이 말했다.
“무운을 빕니다.”
라우엘이 크라우젤의 승리를 바랄 리 만무하다. 라우엘은 당연히 그리드가 승리하기를 바랐다. 자신이 섬기는 자가 지존으로 우뚝 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20억 유저의 정점이었고, 수십억 인구의 우상이었다.
정작 그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이 복잡할 것 같았다.
씁쓸한 표정을 짓는 라우엘의 심정을 읽은 크라우젤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상대는 그리드입니다. 그에게 패배한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가 부정당할 일은 없겠죠.”
그리드에게 하늘을 무너뜨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 이제 세상 모두가 알고 있다.
이때 크라우젤이 패배한다고 해서 크라우젤에게 실망하거나 비난을 보내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 생각은 없지만.”
이긴다.
이번에도 기필코 이긴다.
열망하는 크라우젤.
그는 자신이 언제까지고 그리드의 목표이길 바랐다. 앞으로도 계속 그리드가 자신을 의식하길 원했다. 일방적인 사랑처럼 슬픈 건 없었으니까.
***
“호랑이 울음.”
퍼어어어엉-!
제2회 국가대항전 PvP 결승전 영상이 스크린에 재생되고 있다.
백발의 그리드가 소환한 실드를 꿰뚫는 크라우젤의 발경과, 동시에 크라우젤을 불태우는 불꽃.
불과 0.1초 차이로 승자가 정해졌던 역대 최고의 명경기가 관중들과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아아…….”
“저 장면은 몇 번을 다시 봐도 멋져.”
한 해 동안 무려 50억 재생 횟수를 기록한 영상이다.
80억 인구 중에서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대결 영상을 보지 못한 사람은 갓난아기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영상을 단 한 번만 재생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 의욕적인 마음가짐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청년들, 삶에 지쳐 가고 있는 중년들, 황혼의 노년들.
그들 모두가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대결 영상을 반복해 보면서 새로운 꿈과 의욕을 품어 왔다.
자신들 또한 언젠가는 저들과 한 무대에 서기를 희망하며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우상이 된 플레이어들.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무대 위에 입장한다.
『무려 1년 3개월 만에 성사되는 대결의 주인공! 미국의 크라우젤 선수와 한국의 그리드 선수가 무대 위로 입장하고 있습니다!!』
『이야! 환호가 엄청나군요! 게임 해설 15년 차에 이런 광경은 처음 봅니다. 이러다가 도쿄돔 무너지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이 순간만큼은 국적과 인종, 그리고 성별과 종교의 차이 없이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된 것 같군요. 두 선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납니다.』
『이번 경기의 결과로 종합 순위 1위국이 결정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군요. 관중들 모두 그저 두 사람에게만 열중하고 있네요.』
“그리드!! 당신은 최초의 전설이잖아!! 최초의 왕이잖아!! 당신이야말로 최고라는 걸 이제 그만 입증해 줘!!”
“크라우젤!! 무너지지 마라!! 당신이 지난 몇 년 동안 어째서 정상에 군림해 올 수 있던 건지 그리드에게 똑똑히 새겨 줘!!”
“그리드으!!!”
“크라우젤!!!”
“우와아아아아아아!!!”
고막을 찢을 듯한 함성 소리가 도쿄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현장의 열기가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고요한 세상 속에 있었다.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외침은 그들의 귀에 닿지 않았다.
“남자의 승부는 삼세판이라고 했지?”
“그래.”
“이번에 이기는 사람이 진짜 승자인 거지?”
“맞다.”
“승패가 어떻게 나도 우리는 계속 친구지?”
“당연하다.”
“그럼 사양 않고 이겨 주마.”
“나 또한 최선을 다하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각자의 캡슐 앞에 섰다. 허겁지겁 달려온 진행자가 크라우젤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경기에 앞서서 현재 심정을 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
크라우젤이 마이크를 건네받음과 동시였다. 그토록 열기가 뜨겁던 도쿄돔에 적막이 깃들었다.
동경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만 관중들.
자신의 대답을 기대하는 그들의 면면을 천천히 살펴본 크라우젤이 입을 열었다.
“두렵습니다.”
“…예?”
독보 지존으로 군림해 왔던 천하의 천외천이 두렵다고?
귀를 의심하는 진행자와 관중들에게.
“그래서 더욱더 기대됩니다.”
말을 잇는 크라우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늘 무표정하던 그가 이토록 화사한 미소를 그리다니?
“아아…….”
난생처음 보는 크라우젤의 모습에 사람들이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을 누구보다도 기다려 왔던 사람, 다름 아닌 크라우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꺄아아아악!! 크라우젤!!”
“그래, 즐겨!! 즐겨라, 크라우젤!!”
“크라우젤! 크라우젤! 크라우젤!!”
“우와아아아아!!”
현장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다.
같은 시각, Satisfy.
“슬슬 움직일까요.”
베라딘이 직접 이끄는 임모탈의 정예가 템빨국 수도 라인하르트에 입장했다.
플레이어들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가하는 것을 넘어서 환영하는 템빨국의 특성상 잠입은 쉬운 일이었다.
“곧바로 대장간으로 이동하세요.”
“예!”
국가대항전 내내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것은 물론이고,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의 섭외까지 성공한 그리드이다.
그를 적대하는 입장에 놓인 임모탈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템빨국이 이대로 승승장구하는 것을 잠자코 간과하기 어려웠다.
하여.
“표적은 대장장이 칸. 찾아내는 즉시 죽이면 됩니다.”
임모탈은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PvP 결승전이 시작된 지금, 템빨단원 대부분이 로그아웃한 상태였고, 라인하르트는 텅텅 빈 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
“별이 참 밝구나.”
나의 망치질 한 번이 그리드 전하께 큰 힘이 된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오늘도 열심히 대장일 하였던 칸.
주름 가득한 얼굴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그리움이 깃든다.
오늘따라 더욱더 그리드가 보고 싶은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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