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11화 (606/1,794)

템빨 36권 - 18화

[1,9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경직됩니다. 행동이 불가능합니다.]

[879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경직…….]

[880의 피해를 입었…….]

“윽! 컥! 엑! 크으! 크아아아아아!!”

거미줄에 구속당한 하루살이나 느낄 법한 무력감이 아닐까.

벌써 몇 분 동안 꼼짝도 못하고 선 채 묠니르에 연타당하던 장췐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이 지독한 무력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일평생 승승장구해 온 자신이 왜 하필이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런 치욕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 로그아웃당했다가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모두 하찮다고 인터뷰한 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선 그리드에게 패배했다가는 타르마와 다를 게 없는, 주둥이만 산 쓰레기로 전락해 버린다.

꽈드득!

끔찍한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던 장췐.

이를 간 그가 시도해 보았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경직과 경직 사이의 간극을 노렸다.

‘집중하자!’

손 한 번만 까딱할 수 있으면 된다.

경직이 풀리는 찰나에 검을 휘둘러서 방어, 망치 한 자루의 공격만 막아 내면 계속되는 경직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린 장췐이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는 상상해 본 바 없는 무한 CC기의 지옥에 당황해서 냉정을 잃고 있었으나, Satisfy에서 무한한 효과를 자랑하는 스킬(?)은 본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니 이 지옥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퍽!

0.3초.

퍽퍽!

0.1초, 0.1초, 0.1초, 그리고 또 0.3초.

4자루 망치가 번갈아 가면서 거는 경직에 빈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장췐이 기껏 집중해 보았지만 부질없게도 경직으로부터 벗어날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사기다!

그리드는 필시 버그를 쓰고 있다!

장췐이 확신을 품는 순간.

[입은 피해량이 3만 누적되었습니다. 굴욕감을 느낀 <흑패왕의 갑옷>이 포효합니다!]

퍼어어어어어엉-!!

장췐이 무장하고 있던 칠흑의 갑옷이 붉게 점멸하더니 폭발했다.

반격의 서막이었다.

폭발에 휩쓸린 갓 핸드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경직되었고, 그제야 장췐은 무한 CC기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꿀꺽!

곧바로 생명력 회복 물약을 복용한 장췐이 그리드에게 몸을 날렸다.

“언제까지고 뒤에 숨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

무인의 질주는 호쾌하다.

힘차게 내달린 장췐이 그리드에게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푸욱-!

[13,0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팔짱 끼고 있는 그리드 옆에 뒷짐 지고 서 있던 이야루그트가 장췐을 저지했다.

“컥!”

그리드에게 눈이 멀었다가 이야루그트에게 허를 찔린 장췐이 피를 토한다.

또다시 지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퍽퍽! 퍽퍽퍽!!

“윽! 억! 켁!!”

경직에서 풀려난 갓 핸드들이 날아와서 장췐을 마구잡이로 폭행했다.

반격을 기대하였던 중국인 관중들을 김빠지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입은 피해량이 3만 누적되었습니다. 굴욕감을 느낀 <흑패왕의 갑옷>이 포효합니다!]

“키야아아아아아!! 개새끼! 죽인다! 죽인다아아!!”

갑옷빨로 재차 경직에서 벗어난 장췐이 이번에는 <쇠사슬>부터 꺼냈다.

촤르르르륵!!

사방으로 뻗어져 나간 쇠사슬들이 경직되어 있는 갓 핸드들을 구속한다.

‘됐다!’

씨익!

회심의 미소를 그린 장췐이 물약을 복용한 뒤, 이야루그트에게 돌진했다. 그리드에게 도달하려면 놈부터 꺾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채챙! 챙!!

접전!

검술을 교환하는 장췐과 이야루그트는 얼핏 호각으로 보였다.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장췐은 본인의 실력을 120퍼센트 발휘하고 있었다. 저 얄미운 그리드 놈을 박살 내고야 말겠다는 열망을 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장췐이 이야루그트와의 싸움에 열중하는 사이, 슬그머니 움직인 그리드가 갓 핸드들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들을 모조리 풀어 버린 까닭이었다.

퍽! 퍽퍽!!

“컥! 윽!! 억!!”

퍼어어어어어엉-!!

몇 차례 더 묠니르에 얻어맞은 장췐의 갑옷이 또다시 폭발했다. 이야루그트와의 교전 과정에서 이미 상당한 데미지가 누적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개새끼! 이 얄미운 새끼!! 비겁한 새끼이!!!”

재차 쇠사슬을 날려 갓 핸드들을 구속한 장췐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리드를 노려보았다.

끝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아이템과 펫으로만 싸워 대는 그리드가 얄밉지 않을 리 만무했다.

대전 격투 게임에서 얌생이만 쓰는 사람 같달까!

하지만 원한을 품고 분노하면 뭐하는가?

장췐의 실력으로는 이야루그트와 호각을 펼칠지언정 이야루그트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가 이야루그트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그리드는 갓 핸드들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풀면 그만이었다.

느긋하게 휘파람이나 불어 대면서 말이다!

“…….”

해설진 모두 침묵했다.

너무나도 일방적이고, 처참한 경기 내용을 굳이 입 밖에 꺼내기도 꺼림칙했던 것이다.

한편 그리드는.

‘역시 불완전하군.’

장췐의 갑옷을 주시하고 있었다.

‘맞을 때마다 반사’가 아니라 ‘일정량의 데미지가 누적될 때마다 반사’하는 옵션을 지닌 듯한 장췐의 갑옷은 한 번 폭발할 때마다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무려 3배의 반사 데미지를 입히는바, 장췐의 갑옷은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대신 그만큼 큰 페널티도 안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리드가 처음부터 예상했던 부분이다.

드롭 아이템보다 뛰어난 제작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그리드조차도 3배 데미지를 반사하는 갑옷을 만들 자신은 없었으니까.

부바트에게 장췐의 갑옷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시점부터, 그리드는 장췐의 갑옷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을 거라고 예견했었다.

퍼어어어어엉-!!

마침 흑패왕의 갑옷이 폭발하였고, 장췐은 곧바로 물약을 마셨다.

그리고 또 같은 짓을 반복했다.

퍼어어어어엉-!!

급기야 흑패왕의 갑옷이 다섯 번째 폭발을 맞이했다.

여기서 장췐이 또 물약을 마셨다.

어떻게든 버티고자 발악하는 그를 확인한 그리드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진다.

‘저 새끼가 웃……! 어?’

그리드의 재수 없는 낯짝을 목격한 장췐이 치를 떨다가 흠칫 놀랐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굴욕감 속에서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까닭에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갑옷의 내구력이!’

장췐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흑패왕의 갑옷, 어느새 5번이나 폭발하지 않았던가?

내구력이 250이나 손실된 상태다.

여기서 한 번 더 폭발했다가는……!

퍽! 퍽퍽!!

“아, 안 돼……!”

[1,6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930의 피해를…….]

[965의 피해를…….]

다시 시작되는 묠니르의 연타 속에서 장췐의 얼굴이 점차 사색이 되었다.

“멈춰! 제발!! 제발 멈춰어어어!!”

급기야 애원하기 시작하는 장췐의 처절한 절규가 도쿄돔에 울려 퍼지자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장췐이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애원하고 있었으니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드는.

“싫은데?”

멈추지 않았다.

장췐은 악이다.

그의 성격을 고려해 봤을 때 확실히 짓밟아 놓지 않으면 어떤 후환이 될지 모른다.

살면서 너무 많은 적들을 만나 온 그리드였기에 확실히 알고 있다. 자비를 베풀 대상과 베풀면 안 되는 대상의 차이를.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고 생각해.”

“너……!!”

무한 경직 탓에 아이템 스왑조차 불가능한 상황!

절망에 빠지는 장췐의 시야에 최악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입은 피해량이 3만 누적되었습니다. 굴욕감을 느낀 <흑패왕의 갑옷>이 포효합니다!]

퍼어어어어어엉-!!

[<흑패왕의 갑옷>의 내구력이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흑패왕의 갑옷>이 영구히 소멸합니다.]

“아, 안 돼!! 안 돼에에에에에에!!”

절규하는 장췐에게.

푸욱-!

이야루그트가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었다.

그제야 장췐은 지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

“승자 그리드!!”

진행자가 외침과 동시였다.

“네깟 놈이……! 네깟 놈이 감히!!”

로그아웃당하자마자 캡슐에서 뛰쳐나온 장췐이 그리드에게 달려들었다. 분노에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는 지금이 국가대항전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죽여 버린다!!”

광견병 걸린 개처럼 게거품을 물고 포효한 장췐이 주먹을 날렸다. 한발 늦게 캡슐에서 나온 그리드의 안면을 정확하게 노리는 주먹이었다.

불의의 기습이었다. 그리드가 얻어맞을 것으로 예상한 관중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의외로 그리드는 장췐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몸에 익은 보법을 본능적으로 활용, 장췐의 주먹을 회피하더니 역으로 발차기를 날려서 일격에 쓰러뜨려 버렸다.

Satisfy를 플레이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동작과 지난 수년 동안 쉬지 않고 단련해 온 육체 능력, 그리고 군 복무 시절 배웠던 태권도를 삼위일체로 완벽히 활용한 반격이었다.

“……!!”

장췐의 폭주를 목격하자마자 무대 위로 달려왔던 안전 요원 모두가 넋을 잃었다.

너무나도 깔끔한 움직임으로 스스로의 몸을 지키는 그리드의 모습에 감탄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리드는 당황하고 있었다.

‘와, 싸움 엄청 못하네.’

학창 시절 내내 얻어맞기만 하고 다녔던 그리드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세희와 예림이를 지킨답시고 양아치들을 상대하다가 얻어터지고, 도리어 예림에게 보호받았었다.

하다하다 여고생에게 보호받다니…….

그리드는 본인이 약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자신보다 싸움을 못하는 남자는 드물 거라고 믿었다.

한데, 그런 자신에게도 장췐의 주먹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세상에 나보다 싸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자신의 나약한(?) 발차기 한 방에 나가떨어진 장췐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에 측은지심이 깃든다.

그가 알 리 없다. 장췐이 중국 무술 유단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관중들은 환호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

“그리드 네가 그 망나니 같은 중국 놈을 오늘 아주 제대로 혼쭐 내주는구나!!”

“어떻게 너는 싸움도 잘하냐!!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저게 바로 엄친아……!”

“그리드! 그리드!! 그리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환호 속에 퇴장하는 그리드는 이 세상의 주인공 그 자체였다.

반면 장췐은 지속적인 욕설 사용과 폭력을 행사한 죄목으로 큰 징계를 받았다.

4개월 동안 Satisfy 계정 정지, 그리고 국가대항전에 두 번 다시는 참가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중징계였다.

중국의 새로운 별이 뜨자마자 진 것이다.

중국 전역이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리드를 원망하는 중국인은 의외로 드물었다. 이번 사태는 장췐 스스로가 자처한 일이었으므로 자업자득이라 여길 뿐이었다.

같은 시각, 한국 선수 대기실.

“…그리드가 나보다 싸움 잘하는 것 같은데?”

그리드의 보디가드를 자처해 왔던 툰은 직장을 잃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

제3회 국가대항전 PvP는 마치 그리드와 크라우젤 두 사람을 위해서 마련된 무대 같았다.

32강부터 결승에 오르기까지.

그리드가 압도적인 공격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일격에 해치우면 크라우젤 또한 똑같이 상대를 일격에 제압해 버렸고, 그리드가 손도 안 대고 상대를 농락하다가 해치워 버리면 크라우젤 또한 <이기어검술>을 전개하여 팔짱 낀 채 상대방을 제압했다.

이상하게 템빨단원들이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은 올해의 PvP는 오로지 두 사람의 경쟁 무대였다.

4번의 경기가 치러지는 과정에서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단 한 번의 위기 없이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었고, 대중은 두 사람의 독보적인 강함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압도당했다.

“그리드는 작년보다 몇 배나 더 강해진 것 같은데?”

“템빨단이 PvP에 출전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드 때문이 아닐까? 어차피 출전해 봤자 그리드한테 뻔히 질 걸 알고서 포기한 거지.”

“신빙성 있는 해석이군. 내 생각도 같다.”

“하지만 크라우젤도 훨씬 더 강해졌어. 그리드에게 조금도 밀리질 않아.”

“맞아. 특히 이기어검술이 대박이야. 손도 안 대고 검을 움직이는 모습 좀 봐. 올해의 크라우젤은 갓 핸드 대비책을 완벽하게 갖춘 셈이야.”

“과연 누가 이길까?”

누구도 섣불리 예상하지 못했다.

늘 말 많던 전문가들조차도 이번만큼은 함부로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기껏 방송에 출연해 놓고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는 그들이 과연 출연료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리드 탓에 점차 설 자리를 잃어 가는 전문가들은 예비 실직자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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