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17화
세계 각국에는 온갖 방언이 존재한다.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도 많은 중국은 무려 100개가 넘는 방언이 있다고 전해졌다.
“표준어로 통일.”
Satisfy에 접속하자마자 그리드가 한 일은 통역 시스템의 <방언 구현 모드>를 종료하는 것이었다.
한국어로 번역해서 들을 경우 하필이면 연변족 말투가 되는 장췐의 방언이 듣기 영 거북했던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연변족을 싫어하거든.”
“뭐라는 거야?”
메마른 바람에 풍화되어 가는 무너진 성벽.
그 너머로부터 등장한 장췐은 노골적인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드 넌 곱게 죽을 생각 마라.”
장췐이 Satisfy를 시작한 것은 불과 2년 3개월 전이다.
대량의 정보와 막강한 재력을 이용해서 기존의 플레이어들을 따라잡고, 탁월한 재능으로 2세대 루키들마저 초월, 랭커로 급부상한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다.
그리드? 크라우젤?
사람들에게 지존이라고 인식되는 그들 또한 자신의 적수는 아니라고 믿을 정도였다.
“국대전에 참여한 후 더 큰 확신을 품었다. 기존의 플레이어들은 약해. 썩어 빠진 둔재투성이다. 그깟 쓰레기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라고 해 봤자 별것 없겠지. 안 그래?”
작금의 Satisfy를 표현하자면 사자 잃은 숲이다. 늑대와 여우가 활개를 치고 있는 실정이다.
장췐은 본인이야말로 부재중인 사자의 자리에 오를 인재라고 믿었다.
“내가 이 숲의 주인이 되어 주마.”
이길 수 있다.
장췐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구세대들이 천재라며 떠받들고 있던 2세대 루키들을 가볍게 뛰어넘는 재능, 그리고 그리드보다 뛰어난 템빨이 확신의 근거다.
“뭐로 썰어 줄까?”
큭큭, 오만하고 사악한 미소를 피어 올린 장췐이 8종의 레전드리급 무기를 순차적으로 스왑해 보였다.
각기 용도가 다른 최강의 무기들.
생김새부터 범상치 않은 것들이 강화조차 잘돼 있다.
“오오…….”
장췐이 무기를 바꿔 쥘 때마다 화려한 이팩트가 발생하자 관중들이 감탄하는 반면.
“어떤 무기를 꺼내 봤자 소용없어. 어차피 너에게는 휘두를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그리드는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장췐의 심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발언이었다.
“하찮은 들개들의 왕 따위가! 개새끼 따위가 감히 사자를 능멸하다니! 오늘 네게 현실을 주지시켜 주마! 여태까지 네가 왕으로 군림해 왔던 이 세상이 얼마나 하찮고 허황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겠다!!”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치는 장췐의 얼굴이 대춧빛으로 물들었다. 도끼눈이 치켜 올라가면서 삼백안이 더욱 도드라지자, 그 모습이 마치 악귀 같다.
그리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세대의 돌연변이라…….’
그리드는 일국의 왕이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범접조차 할 수 없는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는 그가 장췐에 대해서 모를 리 만무했다.
3세대 10인의 루키 중 독보적인 성장을 이룩한 귀재. 2세대 루키조차 초월한 지 오래라고 하던가.
‘나름 기대했었는데.’
국대전에서 실제로 목격한 장췐은 그저 오만덩어리에 불과했다.
자신을 포함한 구세대를 한데 뭉쳐서 폄하하는 그를 보면서 그리드는 책임감을 느꼈다.
저 우물 안 개구리가 구세대에게 품은 편견을 없애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이는 그리드 본인은 물론이고 소중한 동료들과 친구들을 위한 의무였다.
우리가 그동안 개척해 온 길, 쉽게 뒤따라온 누군가에게 하찮게 치부되는 것을 그리드는 원치 않았다.
스파아앗--
그리드의 등 뒤로 4개의 황금 손이 떠올랐다. 확정 경직을 유도하는 최강의 상태 이상 유발 무기, <묠니르>를 무장한 갓 핸드들이었다.
그 유명한 신의 손이 출현하자 장췐의 두 눈이 의욕적으로 번뜩였다.
“큭큭! 크하하하하!! 역시! 그럼 그렇지! 너도 나를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거구나!!”
역대 국가대항전 PvP에서 그리드가 갓 핸드를 사용한 경기는 드물었다. 크라우젤을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갓 핸드를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활용한 경우가 없다.
장췐의 입장에서는 들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드가 자신을 최대의 난적 크라우젤과 동급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으니까 말이다!
관중들도 흥분했다.
“그리드가 벌써부터 황금 손을 꺼내다니!”
“장췐이 강하긴 강한가 보네…….”
“과연 최강의 3세대인가!”
장췐은 구세대 최강 중 하나였던 부바트를 꺾었던 인물이다. 괴물 신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하던 상황에서 그리드가 처음부터 전력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장췐을 더욱더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국이 축제 분위기였다.
“드디어 우리 대국에도 영웅이 등장했구나!”
“매번 그리드에게 무릎 꿇었던 하오 따위와는 격이 다른 천재야!! 아직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저 운 좋은 그리드 한국 놈을 긴장시키다니 말이지!!”
“장췐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 대국에는 무수한 인구가 있고, 젊은 세대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대륙을 호령하였던 역사 속 영웅들의 후손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등장해 세계무대를 점령하게 될 거야!”
중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뽕이라는 이름의 마약에 취한 그들은 쉴 틈 없이 떠들어 대면서 찬란한 미래를 꿈꿨다. 중국이 세계 제일의 대국으로서 Satisfy 또한 장악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흥분한 그들 15억 인구에게.
“인정하고 두려워해? 내가? 너를?”
그리드가 절망을 선사한다.
“넌 날파리야. 너 따위를 잡는 데 내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지. 소환, 이야루그트.”
쿠르르르르르릉!!
그리드가 뽑아 쥔 이야루그트가 천둥처럼 포효한다.
혈빛의 마기를 사방으로 방출하며 날뛰는 녀석, 그리드의 근력으로도 붙잡아 놓을 수 없다.
파아앗-!
그리드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난 이야루그트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블러드스톤으로 제련되어 반투명한 붉은 빛깔을 띠던 검신이 칠흑으로 물든다. 그 위로 금색의 고대 문자들이 휘갈겨지는 광경, 신비롭고 아름답다.
‘뭐지?’
장췐을 비롯한 관중들이 놀라운 광경에 현혹되어 넋을 잃는 그때.
고오오오오…….
이야루그트는 더 이상 요동치지 않았다. 방출하던 혈빛의 마기 또한 모조리 갈무리하며 고요해졌다.
“…….”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흐른다.
짧은 정적이었다.
파아아앗-!
정적은 깨졌고, 여전히 허공에 떠올라 있는 이야루그트로부터 붉은 구슬 하나가 튀어나왔다.
지옥 제일 검사, 검귀, 검마, 대악마 제파르의 유일한 적수 등.
살아생전 온갖 광오한 수식어로 치장되었던 이야루그트의 영혼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무슨 수작을……!”
뒤늦게 불안을 감지한 장췐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저 검붉은 마검을 그대로 놔둬선 안 된다는 본능이 그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주의 별빛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던 이야루그트의 영혼, 빛을 폭사하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허리 굽은 노인.
혈빛의 마기를 타오르는 불꽃처럼 전신에 두른 그의 이마에는 날카로운 외뿔이 솟아 있었고, 눈두덩은 발달한 근육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늘진 눈가에 엿보이는 홍채는 심연의 바다처럼 검다.
“마족……!”
플레이어가 마족을 소환했다고?
아니, 소환사 계열의 히든 클래스 전직자라거나 3차 전직한 흑마법사라면 또 몰라도, 대장장이인 그리드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장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그 앞에 소환된 백발의 노인, 검귀 이야루그트는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달콤한 공기를 만끽했다.
“감미롭다.”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하급 악마 출신이나, 오로지 검술만을 연마하여 대악마와도 호각을 겨루었던 존재.
지옥의 유수한 권력자 마르바스로부터 지옥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자라고 평가받았던 그가.
서걱-!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이야루그트를 거머쥐더니 곧바로 장췐을 베었다.
“컥……!”
[지고한 검술에 약점이 노출됩니다.]
[회피율이 무시되고, 방어력이 하락하며,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12,1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 크윽……!”
일검.
단 일검에 생명력 5분의 1을 손실한 장췐이 혼란에 휩싸인다.
도대체 이 마족은 뭐란 말인가?
예상치 못한 괴물의 출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장췐의 얼굴을.
덥석!
왜소한 체구의 노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커다란 손으로 거머쥔 이야루그트가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
퍼어억-!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지면에 처박히는 장췐!
“…….”
무력한 장췐의 모습에 한껏 들떠 있던 중국인 관중들과 시청자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
[이름:이야루그트
나이:?? 성별:남
종족:외뿔 악마
칭호:지옥 제일 검사
*도검류 무기 장착 시 공격력 2배 상승. 100퍼센트 확률로 약점 공격과 크리티컬 발동. 회피율 50퍼센트 상승
근력:3,503 체력:1,090
민첩:3,201 지력:330
스킬:검사의 눈(S), 외길인생(SS-), 검기 폭발暗(S), 화산 부수기(SS), 지옥달 가르기(SS), 지고의 검(SS+)
하급 악마로 분류되는 외뿔 악마 출신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검술을 단련한 결과 살아생전 지옥 최강의 검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악마 제파르와 싸움에서 패배,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저주를 받아 마검에 영혼이 귀속된 상태입니다.
*강적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살아생전의 감을 아주 약간 되찾았습니다. 몇 번 더 반복하면 실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1/10)
*‘적’으로 인식하는 상대와의 승부에서 승리해야지만 횟수가 축적됩니다.
*이야루그트가 동료애 강한 당신에게 어렴풋한 호감을 품고 있습니다.]
‘아직 힘을 되찾지 못한’ 검귀 이야루그트의 스펙이다.
현재의 그리드와 일대일로 싸우면 매번 개처럼 얻어맞는 이야루그트였지만, 그래도 한때는 그리드를 압도했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히 강력한 마족이었다.
생명력과 방어력은 보통 플레이어와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확정 크리티컬을 위시하는 공격력은 거의 그리드와 필적했다.
템빨단 내에서도 이야루그트와 대련해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10명 내외밖에 안 됐다.
그를 이제 갓 3차 전직한 장췐이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장췐이 자랑하는 컨트롤 실력? 이야루그트의 지고한 검술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장췐이 자랑하는 템빨? 그리드의 템빨에 몇 번이나 당해 본 이야루그트에게는 하찮을 따름이다.
“크아아아아아!!”
땅에 굴욕적으로 처박혔던 장췐이 포효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족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는 성검을 무장한 뒤 휘둘러 보고자 하지만, 이야루그트가 재차 휘두른 검에 손목을 베여서 공격 자체가 수포로 돌아갔다.
허겁지겁 뒤로 물러선 장췐이 그리드를 노려보았다.
“너! 너 이 빵쯔 새끼! 이런 비겁한 수작을!! 나와 정정당당하게 승부해 봤자 질 것 같으니까,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을 데려오다니!!”
펫과 소환수의 전투력에는 한계가 있다.
일단 그 레벨이 주인의 레벨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능력치가 낮았다.
하지만 눈앞의 마족은 <흑패왕의 갑옷>을 무장한 자신에게 1만대의 피해를 입혔다.
장췐이 상정하고 있던 그리드의 공격력을 가뿐히 초월하는 것이다.
장췐은 그리드가 특수한 퀘스트를 클리어한 대가로 일시적으로 계약한 마족을 불러온 것이라고 믿었다. 즉, 비장의 수단이라고 해석했다. 이야루그트가 그리드 고유의 소환물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자신과 이야루그트에게 집중되는 카메라들을 의식한 그리드가 답한다.
“무지막지한 괴물은 무슨. 얘 그냥 내 펫이야.”
“뭐라고!! 무슨 개소리를!!”
부정한 장췐이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흑패왕의 갑옷>
등급:레전드리
내구력:299/299 방어력:699
*받는 피해를 7퍼센트 확률로 차단
*어두운 곳에서 30퍼센트 확률로 은신 효과
*어두운 곳에서 방어력 20퍼센트 상승
*어두운 곳에서 민첩성 +50
*받은 피해량이 3만 축적될 때마다 3배의 마법 데미지로 반사. 이때 갑옷의 내구력이 50 감소합니다. 또한 3만 이상의 데미지를 한꺼번에 입을 시에는 효과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장췐은 최강의 갑옷을 위시하여 그리드와 마족을 일거에 해치워 버릴 각오였다.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흑패왕의 갑옷이 반사하는 9만의 데미지는 플레이어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퍽퍽!
[경직됩니다.]
[경직됩니다.]
[경직…….]
“윽! 컥! 엑!”
그리드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갓 핸드들이 날아와 휘두르는 묠니르에 공격을 허용한 시점부터 무한 경직의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계속계속 망치에 머리통을 얻어맞으면서 비명만 내지르는 장췐. 망치에 얻어맞을 때마다 좌우로 돌아가는 고개 탓에 마치 저급한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다.
사기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한 CC기에 무력화된 그를 팔짱 끼고 선 그리드가 비웃었다.
“내가 말했지? 네게는 검을 휘두를 기회조차 없을 거라고.”
본래 그리드야말로 오만방자한 인물상의 대표 격이었다. 그가 마음먹고 잘난 척하면 장췐의 잘난 척 따위 애교 수준이었다.
“너……! 너 이 치사한 자식! 억! 컥!!”
얄밉게도 지껄이는 그리드의 태도에 분개하는 장췐이었지만, 그는 뭐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하필이면 100 단위로 서서히, 아주 천천히 소모되어 가는 장췐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하는 15억 중국 인구가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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