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09화 (604/1,794)

템빨 36권 - 16화

1.6초.

<그림자 이동>을 전개한 타르마가 그리드에게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이후 타르마의 단도가 그리드의 어깨를 찌르고, 그리드의 검붉은 장검이 타르마의 몸을 양단하기까지 또 0.5초가 걸렸다.

그래, 불과 2.1초다.

타르마가 패배하는데 걸린 시간은 막말로 찰나였다. 본인이 보유하고 있던 3초 패배 기록을 갱신해버린 것이다.

“.....”

도쿄돔이 침묵에 빠진 그때.

툭.

대한민국의 어떤 시청자가 손에 들고 있던 족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치킨 대신 시킨 포식이불족발이었다.

관중들, 시청자들과 마찬가지로 넋을 잃었던 TV 속 해설진이 뒤늦게 입을 열고 있었다.

『스킬.... 그리드 선수가 강력한 즉발 스킬을 습득해왔군요.』

『아....! 네! 마,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그리드가 사용하는 공격 스킬 대부분은 ‘검무’라는 준비 동작이 필요했다. 때때로 장점으로 승화되는 동작이었지만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전투 특화 클래스들의 즉발 스킬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맹점이 있었다.

그리드의 유일한 약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데 올해의 그리드는 약점을 극복해온 것이다.

『그리드 선수는 번헨 열도를 공략한 영웅이죠. 번헨 열도를 공략한 보상으로 최강의 스킬을 습득한 듯합니다.』

『완전체로 거듭난 것이군요....』

그리드가 타르마를 ‘평타’로 단칼에 죽였다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조차 못했다. 상식에 위반 되는 일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게 마련이니까.

전문가들은 그리드가 새로운 궁극기를 습득해온 것으로 해석했고, 몇 번이나 반복 재생 중인 리플레이 영상을 확인한 관중들과 시청자들 또한 이에 동의했다.

『신속을 자랑하는 어쌔신조차도 피하지 못하는 범위를 자랑하는 즉발 화염 스킬.... 아! 어쩌면 바로 저게 흑염룡...!!』

『흑염룡....? 설마 미국의 라우엘 선수가 몇 번이나 말했던 비장의 힘을 말하시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라우엘 선수가 각종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죠. 자신의 오른 손에는 흑염룡의 힘이 봉인되어 있으며, 자신이 섬기는 주인 그리드에게도 마찬가지로 그 힘이 봉인되어 있다고. 어쩌면 그리드는 그 힘의 봉인을 푼 걸 수도....』

『그 흑염룡이라는 게 어떤 히든 퀘스트의 보상인가 보군요. 이거 참 무시무시하네요....』

도중에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한 해석이 있었지만 그 부분을 문제 삼는 사람은 적었다.

저 검은 불꽃의 정체가 흑염룡이던, 그렇지 않던.

어찌됐든 그리드가 궁극의 스킬을 습득해온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완전체로 거듭난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결전을 더욱 더 기대하게 되었다.

***

“타르마 선수! 2초 만에 로그아웃 당한 심정을 말해주십시오!”

“닥쳐!!”

경기 종료 후.

타르마는 부끄럽다는 듯이 허겁지겁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겁에 질려있었다.

블러드 카니발을 단신으로 해산시켜버린 그리드에 대한 공포.... 잠시 망각하고 있던 두려움이 거머리처럼 스멀스멀 올라와 타르마의 몸과 마음을 옥죄어 왔다.

바들바들.

서둘러 대기실로 피신하는 타르마의 전신이 감당 안 될 정도로 떨린다. 타르마는 깨닫고 있었다.

본인이 발버둥쳐봤자 그리드와의 힘의 격차는 메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 괴물하고 마주쳐선 안 돼.’

코크로 섬 사건을 빌미로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

“비융신.”

“...?!”

창백한 얼굴로 도망치던 타르마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 한쪽에 기대고 선 장췐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까닭이었다.

“한 방에 죽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구세대 새끼들은 죄다 병신인기야?”

“네놈...!”

타르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드의 힘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는 애송이에 대한 그의 분노는 무척 컸다. 눈에 순식간에 살기가 깃들었다.

하지만 금방 잠재워질 살기였다.

장췐의 곁에 경호원들이 있는 모습을 확인한 타르마가 기세를 잃고 움츠려들었다.

그를 본 장췐이 콧방귀 뀌었다.

“꼬리 내리는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이니? 그냥 태생이 잔챙이인 것이야? 그 동안 네깟 놈이 설치고 다닐 수 있었던 걸 보면 세상이 미쳐 돌아간 게 아닌가 싶어.”

“너...! 3세대 루키라고 했나?”

매해 새롭게 탄생하는 10인의 루키.

선배 플레이어들이 쌓아올린 노하우와 세상에 공개 된 공략법을 토대로 광속의 성장을 이루는 그들의 성격은 대체적으로 기고만장했다. 선배 플레이어들보다 본인들의 성장이 빠른 이유가 순전히 본인들의 재능 덕분이라고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가소로울 뿐이다.

“내가 장담하지. 너도 2초다. 너도 그리드의 단 일격에 죽어버릴 거야. 그리드는 괴물이고, 네놈은 나보다 나은 부분 하나 없는 잔챙이니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타르마였다.

눈앞의 애송이가 그만큼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제길! 내가 그리드를 응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호언장담한 뒤 도망치듯 사라지는 타르마.

그의 초라한 뒷모습을 향해서 장췐이 소리쳤다.

“개새끼가 주둥이 하나는 잘 놀리구만! 너희들 구세대가 얼마나 무능했었는지를 똑똑히 지켜 보라우! 알갔니?”

시간과 발전은 비례하고 이는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법이다. 역사 속 위인보다 과학시대의 위인이 훨씬 더 많다.

구세대보다 신세대가 무조건 낫다.

장췐의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생각!

***

“그리드, 내가 네게 도전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다.”

“.....”

선수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그리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부바트와 1대1로 대면했다.

부바트의 얼굴에는 쓴 미소가 걸려있었다.

“장췐이라는 애송이에게 지고 나서야 확실하게 깨달았어. 1대1 전투에서는 내게 희망이 없단 사실을 말이지.”

제1회, 제2회 국가대항전 PvP 당시.

부바트는 그리드를 제외한 다른 상대들에게서 오직 승리만을 거두었었다. 그리드에게만 패배했었기 때문에 간과했다. 크러셔의 한계를 말이다.

크러셔는 결국 이니시에이터. 공격력이 약하다.

대상을 무력화시킬 수는 있으나, 무력화 된 대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결정력은 없는 것이다.

그 뼈아픈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어쩔 수 없지. 그리드 너를 제외하면 그저 그런 상대들하고밖에 싸워보지 못했었으니까. 나는 내가 정말로 강한 줄 알았어. 그래서 네게 도전의식을 불태워왔던 거야. 하지만 오늘 장췐과 싸우면서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정 경지에 도달한 상대를 내가 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야.”

“흠....”

그리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난처했다.

부바트와의 악연, 벌써 3년째인지라 미운정도 들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호감이 있을 이유도 없다.

파트리안을 침공해서 템빨단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던 부바트를 그리드는 확실히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상대가 굳이 자신을 찾아와서 말해봤자 반가운 마음은 없었다.

난감해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확인한 부바트가 손사래 쳤다.

“아니, 딱히 네게 부담 줄 생각은 없었어. 이제 와서 너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다는 염치없는 말을 할 생각도 없고. 그저.... 그저 나는.”

파르르.

몇 분 전 부인에게 걸려온 전화를 떠올린 부바트의 눈가가 경련했다.

자신을 잔인하게 해친 장췐 때문에 아이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통화 내용이 자꾸 귓전을 맴돈다.

“....그 잔인한 애송이에게만큼은 네가 지지 않기를 바란다.”

“장췐이라는 사람 말인가?”

“맞아. 제발 조심해. 그런 놈이 만에 하나라도 너를 이겨서 계속 경기에 나왔다가는....”

내 딸아이들을 비롯한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국대전은 더 이상 꿈의 무대가 아니게 된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린 부바트가 그리드의 승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보를 제공했다.

“신인이라고 해서 너무 방심하지 마. 장췐 그놈의 갑옷은 무려 3배의 데미지를 반사하는 옵션을 갖고 있으니까. 자칫하면 아무리 너라도 위험할 수도 있어.”

그리드처럼 공격력이 강한 사람이 3배의 반사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해보면 끔찍하다.

어쩌면 그리드가 질 수도 있다.

부바트는 이와 같은 염려를 품고 있었기에 굳이 그리드를 찾아왔던 것이다.

“3배의 반사 데미지라.... 흠, 알았다.”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부바트를 그냥 지나쳐갔다.

뚜벅뚜벅.

“.....”

점차 멀어지는 그리드의 발소리.

한때는 자신의 목표였던 그에게 부바트는 작별의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자신이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한 짓을 알고 있었으니까. 친숙하게 인사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조용히 서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귓가로 그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약해.”

“.....”

“당신의 말대로 1대1 대결에서는 말이지.”

“....?”

“언젠가 전쟁에서 다시 만날 때, 그때는 우리가 더 이상 적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리드.”

천하의 템빨왕이 최소한 전쟁에서만큼은 나를 인정해주었던 건가?

부바트가 전율했다. 침울했던 그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깃들었다.

***

PvP 32강은 빠르게 전개됐다.

상대적 약자들은 당연히 탈락했고, 자격이 있는 자들만이 16강에 진출했다.

개중에는 검성 크라우젤도 있었다.

우승 후보자 중 하나로 거론되었던 영혼 약탈자 수에론을 32강에서 만난 그는 작년보다 더 압도적인 솜씨로 수에론을 꺾었다.

작년보다 몇 배는 강력해진 크라우젤의 모습을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반면 그리드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크라우젤의 레벨이 작년보다 최소 50이상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300레벨도 안 될 텐데 저 정도라니....’

어쩌면. 아주 어쩌면 올해야말로 크라우젤에게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은 저 천재에게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생각하는 그리드.

두근! 두근!

본인도 모르게 웃고 있다.

크라우젤이라는 하늘이 보다 더 높아질수록, 자신 또한 노력이라는 이름의 탑을 보다 더 높이 쌓을 수 있다는 사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이, 빵쯔. 무슨 생각하니?”

장췐.

그리드의 16강 상대인 중국 선수가 눈앞에서 이죽거린다.

“짐 싸서 집에 갈 생각하는 거니?”

“개새끼가 무슨 개소리야?”

“....?”

그리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욕설을 지껄이자 장췐이 당황했다.

여태까지 자신이 만나온 ‘기존의 강자’들은 체통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했다. 어지간히 도발하지 않는 이상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들이 꾹꾹 인내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게 장췐의 취미였다.

한데 그리드는 무려 왕좌에 오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상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난 네가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할 생각이 없어. 존중 받고 싶으면 알아서 처신 잘 해라, 이 종간나 새끼야.”

딸칵.

할 말 다 하고 나서야 뒤늦게 마이크를 켜는 그리드였다.

콧방귀 뀌면서 캡슐에 눕는 그를 멍하니 지켜보던 장췐의 얼굴이 뒤늦게 붉게 달아올랐다.

“빵쯔...! 빵쯔 새끼가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할 생각 없다고?

말인 즉 내가 약하다는 건가?

“개새끼가!!”

흥분해서 소리친 장췐이 황급히 캡슐로 가서 누웠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리드와 싸워서 패배를 맛보여주고 싶었다.

“로그인! 로그이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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