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13화
총 6개 국가에서 7인의 선수가 <영웅 깨기>에 출전했다.
무대의 중앙에 <영웅>이 있었다.
“내게 도전하는가?”
무심한 얼굴로 질문하는 흑발의 사내.
그가 바로 <영웅>이었다.
***
<영웅 깨기>
극검이 참가한 종목이다.
참가자들은 각자 <영웅>과 1대1로 싸우게 되고, <영웅>을 가장 빨리 쓰러뜨린 참가자가 우승하게 된다.
평범한 타임어택 게임인 것이다.
하지만 올해 첫 선을 보이게 된 이 종목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은 무척 컸다.
<영웅>의 정체 때문이었다.
제2회 국가대항전 PvP 우승자, 크라우젤.
바로 그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작년 기준’ 크라우젤의 능력치와 생김새를 ‘고스란히 복제’한 도플갱어가 바로 <영웅>의 정체였으니까.
작년의 최강자를 상대로 올해의 참가자들은 얼마만큼 싸울 수 있을까?
<영웅 깨기>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종목이었고, 그래서 제3회 국가대항전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아온 것이다.
『캐나다의 크리스, 일본의 데미안과 카츠, 스페인의 폰, 영국의 레가스 등.... 참가자들의 면면이 무척 화려하군요. 하지만 참가자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더 적은 것 같습니다. 왜 이런 걸까요?』
『그게 바로 크라우젤의 위엄이라는 겁니다. 비록 1년 전의 크라우젤이라고는 하지만, 그 1년 전의 크라우젤이야말로 대중이 인식하는 <지존>인바. 그에게 감히 함부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일곱 명이나 되는 것도 사실 대단하다고 봅니다.』
일부 전문가가 이와 같이 해석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다른 강자들이 <영웅 깨기>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크라우젤의 도플갱어 따위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과거의 망령 따위를 쓰러뜨려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아르헨티나 선수 대기실.
<영웅 깨기>의 참가자 면면을 확인한 영혼 약탈자 수에론이 흥, 콧방귀 뀌었다.
“한심한 패배자 놈들. 진정한 영웅으로 등극하고 싶다면 PvP에 출전했어야지.”
비단 수에론 뿐만이 아니다.
타국의 최강자들 또한 <영웅 깨기>의 참가자들을 비웃고 있었다.
1년 전의 크라우젤과 싸워서 이기면 뭐하는가?
무려 검성으로 전직한 올해의 크라우젤은 작년과 비할 바 없이 강할 것이 분명했다.
올해의 크라우젤과 싸워 이겨야만 비로소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쟁취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영웅 깨기>는 진정한 크라우젤에게는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비겁한 겁쟁이들의 도피처밖에 안 돼.’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 <영웅 깨기>의 참가자 전원이 템빨단 소속이거나 템빨단과 관계가 깊은 인물이라는 점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결국 여기서 이렇게 모이게 됐군.”
통합랭킹 1위 크리스.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PvP가 아닌 <영웅 깨기>에 참가한 그가 다른 참가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폰, 레가스, 극검, 카츠, 이벨린, 그리고 데미안.
데미안을 제외한 참가자 전원이 템빨단 소속이었고 데미안은 유명한 그리드 빠돌이다.
PvP가 아닌 영웅 깨기에 도전한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드가 최근에 새롭게 제작한 신검(神劍), <열망의 무아검>의 위력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데미안은 <열망의 무아검>에 직접 반 죽어본 경험도 있었다.
그렇다.
이들이 PvP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 다른 강자들의 예상과 달리 크라우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리드가 무서웠던 거다.
“근데....”
말없이 참가자들의 면면을 살피던 카츠가 극검과 이벨린에게 질문했다.
“너희들이 크라우젤에게 도전하는 건 다소 무리 아닌가?”
괜히 기분 상하라고 비꼬는 질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극검과 이벨린은 크라우젤에게 취약한 부분이 있었다.
발검 후 큰 딜레이가 생기는 극검이 크라우젤처럼 민첩한 인물을 상대로 1대1 승부를 겨룬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고, 재능은 뛰어나지만 아직 어려 미숙한 점이 많은 이벨린은 크라우젤의 노련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벨린이 패기 넘치게 대답했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실력을 가늠해보기에 이번처럼 좋은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늘의 도전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각오입니다!”
반면 극검은.
“훗.... 일본인들에게는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취미라도 있는 거냐? 내 걱정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라.”
무척 기고만장하게 대답했다.
크리스가 허허 웃었다.
“믿는 구석이 있나보군.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알고 있지? 나를 상대로 금메달을 빼앗는다는 건 무척 어려울 거다.”
크리스는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가 이번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경우 캐나다의 종합순위 1위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크리스에게는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의무가 있었고 이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기대 말라는 크리스의 눈빛은 다른 참가자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글이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 만큼 더욱 더 선의의 경쟁심을 불태우는 참가자들!
극검과 이벨린을 제외하면 전원 지존에 근접한 인물이라고 평가 받는 이들답게 신경전도 엄청났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마치 불꽃이 깃든 것처럼 보였다.
단, 극검과 이벨린을 바라볼 때만큼은 눈빛이 한없이 상냥해졌다. 측은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적어도 이 종목에서만큼은 명백히 한 수 아래로 보는 태도!
소외감을 느낀 극검이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 오늘 한국인의 기상을 보여줘야겠군.”
***
『크리스와 데미안은 <영웅>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이 8할 이상이라고 봅니다.』
『그렇죠. 작년부터 이미 크라우젤과 비견되는 강자로 손꼽혔던 그들이니까요. 결국 통합랭킹 1위에 등극한 크리스와 벌써 몇 년 째 교황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미안이라면 작년 기준 크라우젤을 꺾는 게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관건은 시간이겠죠.』
『폭발적인 공격력을 발휘하는 대검술사 크리스가 데미안보다 더 빠르게 <영웅>을 처치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네요. 그 두 사람 다음으로 카츠가 승산이 높아 보이고요. 카츠가 혈액을 조종하는 고유의 능력으로 <영웅>의 기민함을 봉쇄할 수만 있다면 높은 확률로 승기를 잡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폰과 레가스는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지 다소 의문이네요. 컨트롤 실력을 강함의 기반으로 삼는 그들은 크라우젤과 동류. 동류의 정점인 크라우젤에게 그들이 선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 것 같습니다.』
『그 외 극검과 이벨린은 탈락할 가능성이 무척 높지요.』
경기를 앞두고 전문가들의 추측이 시작됐다.
극검에 대한 평가가 무척 냉담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참가자들보다 존재감이 약한 극검은 클래스 특성부터가 크라우젤에게 불리했다.
강력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대신 공격과 공격 사이에 간극이 큰 그가 신속한 크라우젤에게 농락당할 것으로 분석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한국인들 모두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극검은 힘들 거야.”
“극검이 좀 애매한 부분이 있어. 팀원이 받쳐줄 때는 압도적인 딜량을 뽑을 수 있겠지만 개인일 때는 취약점이 너무 많아. 하물며 상대가 크라우젤이라면 답이 없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극검의 선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한국의 종합순위 1위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극검의 우승 확률이 가장 높아.’
작년 기준 크라우젤의 실력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리드다.
‘종이 몸이야. 그냥 때려 부셔버려.’
블러드스톤.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보상으로 획득한 마계 최고의 광물.
그것으로 제작한 <이야루그트집>은 극검과 상성이 무척 좋았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만들고 보니 그랬다.
두근! 두근!
그리드의 기대감이 증폭됐다.
***
『우와아아앗! 압도적인 공격력입니다!!』
쩌정-!
쩌저저저정!!
<영웅 깨기>의 첫 도전자 크리스가 모두의 예상대로 선전하는 중이었다.
일검으로 <영웅>의 신속한 공격을 차단함과 동시에 반격하는 그의 대검에 깃든 공격력은 <영웅>을 검과 함께 통째로 허공에 띄워버리는 수준이었다.
푸욱-!
결국 자세가 무너진 <영웅>의 몸을 대검이 갈랐고.
“쿨럭....!”
위험을 감지한 <영웅>은 초감각을 전개했다.
순간적으로 증폭되는 <영웅>의 회피율과 명중률.
작년의 크리스였다면 이 상태의 <영웅>을 감당하지 못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사냥하고 경험을 쌓아온 크리스이다. 그렇기에 통합랭킹 1위가 될 수 있었다.
히든 퀘스트 <검호 사냥>에서 이미 초감각을 여러 번 상대해봤던 그는 세컨드 클래스 <폭군>의 광역기를 위시하여 <영웅>의 신속을 차단해버렸다.
결국.
콰자작-!
접전 끝에 크리스가 <영웅> 깨기에 성공했다.
그가 <영웅>을 잿빛으로 산화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9분.
작년의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패배하기까지 걸린 시간보다 무려 20분이나 짧았다.
강력한 우승후보다운 기록이었다.
“와, 엄청나네.”
“이렇게 보니까 1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큰지 절실히 깨닫게 되네.”
작년.
사람들은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대결을 보면서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한 크라우젤을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지존으로 보았다.
한데 1년. 아니, 정확하게는 1년 3개월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작년의 크라우젤은 더 이상 지존이 아니었다. 당대의 통합랭킹 1위 크리스 앞에서는 무척 초라해보였다.
시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모두가 깨닫고 있는 그때, 이어서 데미안이 <영웅>에게 도전했다.
성기사의 높은 방어력과 다양한 버프, 그리고 교황 고유의 스킬을 난사하는 데미안에게 <영웅>은 또 한 번 패배하고 말았다.
데미안이 <영웅>을 쓰러뜨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20분 55초였다. 크리스보다 2분가량 늦은 기록이었다.
“윽, 금메달....”
1등이 물 건너갔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데미안이었지만.
‘무슨 저런 괴물이....’
크리스를 비롯한 다른 참가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발휘하는 공격력이 성기사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극딜러인 대검술사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었다. 방어력은 몇 배나 더 높은 주제에 말이다.
‘그리드한테 얻어터지는 모습만 봐갖고....’
‘....저렇게까지 강해진 줄은 몰랐네.’
템빨단원들은 만에 하나라도 데미안과 적이 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됐다.
그리고.
“다음은 난가.”
세 번째 도전자는 극검이었다.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하고 무대에 오른 그가 <영웅>을 마주한다.
찌릿! 찌릿!!
‘무슨 위압감이....’
1년 3개월 전의 크라우젤을 재현한 <영웅>은 벌써 2차례 패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그와 1대1로 시선을 마주친 순간 바짝 긴장한 극검은 호흡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순간 흐트러지는 자세.
<영웅>에게 간파 당한다.
터엉-!
지면을 박찬 <영웅>이 극검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왔고.
철컥-!
극검이 발검술을 전개했다.
그 또한 일국을 대표하는 강자.
흐트러졌던 호흡을 추스른 지 오래다.
“섬(殲).”
번쩍!!
붉고 투명한 칼집으로부터 마검 이야루그트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순간.
[마력을 100퍼센트 충전한 <이야루그트>가 <도취> 상태에 있습니다. 자아를 상실하여 폭주합니다.]
[이야루그트의 사용 조건이 ‘제물이 될 자’로 변경 됩니다.]
[이야루그트의 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이야루그트의 공격력이 500퍼센트 상승합니다.]
<이야루그트집>의 영향을 받은 <이야루그트>의 상태가 극검에게 전달되었고.
서걱-!
Satisfy에 존재하는 모든 스킬 중에 공격력과 빠르기로 수위를 다투는 <발검>이 붉은 색의 검광을 그렸다.
“뭣....!”
“저게 무슨....!”
크리스를 비롯한 참가자들과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 그리고 관중들과 시청자들이 동시에 경악했다.
붉은 검광에 베인 <영웅>의 생명력 게이지가 단 일격에 바닥을 기었기 때문이다.
“....!”
누구보다 놀란 <영웅>이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대량의 데미지를 일격에 입은 현재 자신의 상태를 위험하다고 판단, 방어모드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인공지능의 한계였다.
원본 크라우젤이라면 결코 범하지 않았을 어리석은 실수다.
철컥!
<영웅>이 반격하지 않자 손쉽게 검을 회수할 수 있었던 극검.
[이야루그트에게 집어삼켜집니다! 생명력을 50퍼센트 손실하였습니다!]
떠오르는 알림창을 무시하고 재차 발검을 전개한다.
서걱-!
초감각을 전개한 <영웅>은 회피를 시도했지만 이미 극검에게 발검을 허용한 시점부터 회피는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재차 공격을 허용한 <영웅>이 사망에 이르렀다.
단 2분.
극검이 <영웅>을 쓰러뜨리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리고.
쏴아아아아아--
극검 또한 잿빛으로 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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