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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99화 (594/1,794)

템빨 36권 - 6화

강한 맹수일수록 교만하지 않다. 맹수는 어린 토끼를 사냥할지언정 신중했다. 인내와 전력이 기본이었다.

하물며 같은 맹수와 겨룰 때면 사력을 다하는 것이 불가결이다.

철컥!!

성검 뽑기 후반.

크라우젤은 유라를 저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검을 뽑을 자격을 획득한 그녀를 그는 무척 경계했다.

‘기본 스탯의 차이 때문에 이동 속도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녀가 세이프티 존에 진입하기 전에 꼭 처리해야 돼.’

크라우젤은 300레벨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로 국가대항전에 참가했다. 스탯의 3차 각성을 이루지 못한 그의 능력치는 전반적으로 부족했고, 바로 이 부분이 그를 집요하고 잔혹하게 만들었다.

허리춤의 칼집에 손을 얹은 크라우젤.

자신이 예측한 경로에 나타난 유라를 조준하고 백아도를 뽑는다.

검성의 궁극기 중 하나 <우주 검>의 발현이었다.

스파앗-!

“....!”

크라우젤이 쏘아낸 은빛의 검광이 대지와 강, 나무와 바위, 산과 하늘을 베어버렸다.

그의 시야에 담기는 풍경이 모조리 양분됐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

바로 유라였다.

그녀는 크라우젤의 검격이 자신에게 도달하는 순간 <지옥 도약>을 사용, 크라우젤의 궁극기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와....!

-어떻게 저렇게 타이밍을 딱 맞추지?

-소름 돋네.

관중들과 시청자들은 유라의 실력에 벌써 몇 번이나 감탄하고 있었다. 그들이 봤을 때 유라가 크라우젤보다 부족한 소양은 단 하나, 클래스의 차이밖에 없었다.

만약 데빌 슬레이어라는 클래스가 검성과 호각의 전투능력을 발휘했다면, 그녀는 도망자의 입장이 아니었을 거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범인의 시각이다.

크라우젤이라는 정점은 미세하게나마 모든 면에서 유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도망치지 못합니다.”

“.....!!”

블랙홀을 타고 재등장한 유라가 흠칫 놀랐다. 자신의 눈앞에 크라우젤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경로를 읽혔어?’

유라는 아차 싶었다.

‘실수야!’

성검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달하고자 최단의 경로를 선택한 것이 문제였다. 크라우젤에게 심리를 훤히 꿰뚫리고 말았다.

초조함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다.

서걱-!

유라의 떨리는 눈동자에 벼락처럼 떨어지는 백아도가 투영됐고.

[5,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라의 가슴을 벤 백아도는 재차 승천하였다.

서걱-!

츠카카카카칵!!

유라에게 공격을 한 번 적중시킨 크라우젤은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까다로운 궤도의 연격을 난무하여 유라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윽....!”

계속해서 베이는 유라의 시야가 붉게 점멸한다.

그녀는 크라우젤의 공격을 회피하고 방어하고자 시도해봤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크라우젤은 그녀의 행동 패턴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있었고 초감각 패시브 스킬이 그의 분석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결국 유라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반격이었다.

탕-!

탕탕탕!!

검광의 폭풍에 휩쓸린 채, 유라는 본인이 흩뿌리는 붉은 피의 틈새로 크라우젤을 포착하고 마법총을 연사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그녀의 시선과 총구가 겨누는 방향을 읽고 이를 토대로 미리 움직여서 총탄을 피했다.

결국 유라가 쏜 10발의 총탄 중 8발이 빗나가고 말았다. 반면 유라는 크라우젤이 휘두른 8번의 검격 중 7번을 허용했다.

두 사람의 생명력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이대로 끝날 듯하군요.』

『아아, 유라 선수 정말로 아깝게 됐습니다. 그토록 선전해놓고도 메달을 놓치게 생겼네요.』

성검 뽑기 내내 유라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녀는 뛰어난 지략으로 성검이 원하는 조건들을 빠르게 충족시켜나갔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난관들을 지략 이상의 무력과 재치로 극복했다.

해설진과 관중들은 그녀가 자신의 조국에 메달을 안기리라고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이라는 미국의 새로운 거두가 그녀와 한국인들의 꿈을 무참히 짓밟기 직전이다.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한국의 선수층은 무척 얕죠. 그리드, 유라, 극검, 툰 정도를 제외하면 참가선수 전부 다 무명입니다.』

『한국에 은메달 이상의 메달을 안겨줄 수 있는 선수는 그리드와 유라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측이었죠.』

『유라가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하고 탈락한다는 것은 한국 입장에서는 실로 절망적인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네요. 한국 국민들의 상심이 크겠어요.』

해설진은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다.

한 명의 선수가 2개 종목에밖에 참가하지 못하게끔 규칙이 개정된 현 시점에서 유라의 무메달 탈락은 한국에 뼈아픈 손실이었다.

이후 그리드가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한다고 해도 한국은 세간의 예상대로 종합순위 하위권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럼 한국인 플레이어들은 버프 혜택을 받지 못한다.

“유성 검.”

콰쾅!!

쿠콰콰콰콰쾅!!

운석처럼 떨어지는 크라우젤의 검기가 유라의 상처투성이 몸을 연속적으로 강타한다.

유라 또한 계속 스킬을 전개하여 항거했지만, 이제 그녀의 생명력 게이지는 고갈 직전까지 떨어지고 있는 반면 크라우젤은 여전히 최대치에 가까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검성으로 전직하지 못했던 작년과 비교해서 몇 배나 강력해진 크라우젤의 무력은 유라와 급이 달랐다.

이쯤 되면 올해 1대1 PvP 우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 아니겠느냐, 사람들은 아직 시작도 안 한 대회의 결과를 점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크라우젤은 유라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끝낸다.’

유라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하는 크라우젤.

전투 과정에서 그녀의 총 생명력 수치와 방어력 수치를 정밀하게 계산해 놓은 그가 차징 스킬을 전개했다.

유라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리고, 그녀를 불사 상태에 진입시킴과 동시에 거리를 벌려서 불의의 역습에 대비하려는 심산이었다.

“자진모리.”

뻐억-!!

동대륙에서 습득한 비기.

아무런 예비 동작 없이 전개되어 적을 강타하고 멀리 밀쳐내는 발차기가 유라의 배를 걷어찼다.

동시에 생명력이 고갈 된 유라가 불사 상태에 돌입, 그대로 크라우젤과 멀찍이 떨어졌다.

크라우젤은 당연히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5초 불사 시간 동안 그녀가 세이프티 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만하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후훗.”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유라는 미소 지었다.

크라우젤이 자진모리로 자신을 날려버리는 것, 그녀의 상정 범위 내였다. 크라우젤과 멀리 떨어진 그녀가 캐스팅에 다소 시간이 소요되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지옥 소환.”

“....?!”

쿠르르르르르릉-!!

지옥이라는 특정 공간에서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데빌 슬레이어는 중간계에서 페널티를 안은 채 활동하고 있는 셈이나 다름이 없다. 지옥이 아니면 본 실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클래스라니,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불합리하다.

그렇기에 안배 된 고유 스킬이 바로 지옥 소환이다.

지옥의 특정 구역을 ‘무작위’로 인계에 현신시킴으로써 데빌 슬레이어의 능력을 100퍼센트 발현시킬 기반을 마련해주는 필드 마법이었다.

쏴아아아아아아---

어둠의 장막이 내린다.

유라를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가 마기로 들끓었고 칠흑으로 변질됐다.

빛으로 찬란했던 브뤠톤 섬의 일각이 오염되는 순간이었다.

『헙....!』

세계가 경악했다.

지옥 소환은 벨리알이 사용했던 대악마 고유의 필드 마법 아닌가!! 한데 어찌 일개 플레이어가 그 마법을....!!

“음....”

크라우젤 또한 적잖게 놀랐다. 끓어오르는 마기와 열기에 지배당한 그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지옥에 입장하였습니다.]

[강력한 마기가 폐부를 꿰뚫습니다.]

[몸에서 기운이 빠집니다. 공격력, 방어력, 민첩성이 30퍼센트 하락합니다.]

[생명력이 자연 회복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마나 회복 속도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상태이상에 저항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유라가 강해졌다.

경계심을 품은 크라우젤이 백아도를 고쳐 쥐는 것과 동시에.

쩌쩡!! 쩌저저정-!!

펄펄 끓는 지옥불 강을 도약해서 뛰어넘은 유라가 순식간에 크라우젤에게 도달, 3연격을 날렸다.

이전과 비할 바 없이 빠르고 강력해진 공격이었다.

‘큭...! 이런 비장의 수를 여태까지 숨겨놓고 있었다고?’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세상사람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국가대항전에서 본인의 전력을 드러낸다는 것이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무척 꺼려지는 일이었으니까. 저력은 되도록 숨기는 편이 낫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식으로 공개할 거였다면 차라리 진즉에 공개하는 편이 좋았던 거 아닌가?

크라우젤은 유라가 지옥을 소환한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어차피 패배가 결정 된 상황에서 숨겨놨던 패를 공개하다니.... 그녀답지 않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유라의 지옥 소환 타이밍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지옥에서 유라가 강해졌다고 해도 두 사람의 생명력 격차는 이제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있었다. 전투의 결과 또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유라는 지옥을 보다 빨리 소환하거나 끝까지 소환하지 말았어야했다.

생각하며, 크라우젤은 안개처럼 번져있는 칠흑의 마기 틈새로 날아오는 유라의 총탄 2발을 회피했다. 그리고 발치에 흐르는 지옥불의 열기를 인내하며 검으로 월광을 그렸다.

유라의 불사 지속시간이 끝난 타이밍을 정확히 노린 반격이었다.

하지만.

서걱-!

크라우젤은 유라를 베지 못했다.

급변한 풍경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그가 다소 혼선을 빚고 있는 지금.

유라는 지옥 도약을 전개, 전장에서부터 이탈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마나를 쥐어짠 퇴각이었다.

‘이제 와서 놓칠 리가!’

백광보를 전개한 크라우젤이 유라를 뒤쫓으려하는 순간이었다.

키야오오오오오오!!

“....?!”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수천, 수만 개의 눈을 지닌 지옥달이 떠올라있는 새카만 하늘을 꿰뚫고 등장한 <헬 본드래곤>이 크라우젤에게 자욱한 독브레스를 날렸다.

유라가 소환한 지옥이 하필이면 헬 본드래곤의 서식처였던 것이다.

유라의 입장에서는 천운이었다.

“큭!”

헬 본드래곤은 현재 시점의 플레이어 따위 초라하게 만드는 강력한 고레벨 네임드 몬스터였다.

놈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한 크라우젤이 드물게 비명을 토했다. 치명상을 입은 그가 멀찍이 날아가 피를 쏟아냈다.

그제야.

스르르르르륵-

지옥이 소멸했다.

유라가 소환한 지옥의 유지 시간은 고작 1분 남짓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성검 뽑기의 전개는 급변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유라가 가장 먼저 세이프티 존에 도달했다.

유일하게 PvP가 불가능한 지역.

성검이 꽂혀있는 중앙 지대였다.

『유....유라가....!!』

『한국의 유라 선수가 첫 번째로 성검의 주인이 되기 직전입니다!!!』

그리드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가 천외천 크라우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금메달을 차지할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니, 애초에 그리드라도 크라우젤을 꺾지는 못할 거라는 게 세상사람 대부분의 견해였다.

한데 그 힘든 일을 유라가 해내는 것....

푹-!

“....!”

『....!!』

단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부족했다.

유라가 세이프티 존에 진입하기 직전, 수십 개의 검이 쇄도하여 그녀를 덮쳤다.

인벤토리에 보유 중인 검을 최대 10개 방출하여 표적에 적중시키는 검성의 원거리 스킬 <이기어검>이었다.

크라우젤이 그리드를 만나기 전까지 숨겨놓고 싶어 했던 비장의 기술 중 하나다.

“윽!”

유라가 날아온 검에 하필이면 발목을 꿰뚫리고 말았다. 물약으로 생명력을 확보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녀는 세이프티 존에 진입함과 동시에 제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를.

터억!

크라우젤이 뛰어넘었다.

성검 앞에 먼저 도달한 사람은 그가 되었다.

『우, 우승 크라우젤!! 크라우젤이 첫 번째로 성검을 뽑음으로써 금메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아아, 유라 선수, 분전하였지만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군요. 정말로 아깝습니다. 하지만 잘 싸웠습니다. 그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가 도쿄돔을 들썩이게 만든다.

제3회 국가대항전의 서막, 치열하고 화려했다.

***

한국 선수 대기실.

“잘 싸웠어. 정말로 잘 싸웠어.”

초원 위에 널브러진 유라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늘 당당했던 그녀가 이토록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크라우젤보다 먼저 전설이 되었고, 실제로 더 높은 성장을 이루었으나 결국에는 고배를 마시고 만 그녀.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 사실, 누구보다 그리드가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순전히.

‘재능의 차이....’

인간이란 상대적이다.

최고라고 칭송받던 사람도 결국 자신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초라해지는 법이다.

그 뼈아픈 현실, 그리드는 살면서 셀 수 없이 많이 겪어왔다. 그래서 그는 유라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의 분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복수해줄게.’

재능?

‘템빨로 찍어눌러줄게.’

그리드의 피가 끓어오른다.

자신과 같은 재능의 피해자를 목도한 그는 크라우젤에게 더욱 더 이기고 싶어졌다.

이후.

4개 종목이 더 진행되는 동안 한국은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다.

국가대항전 첫날 한국의 메달 현황은 은메달 하나에 그쳤다. 하지만 그 하나의 은메달이 무척 값졌다.

본래라면 최하위권에 머물러서 순위권에 보이지 말았어야할 한국이 종합순위표에서 비교적 상단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이 작은 이변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지,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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