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5화
툭.
맥없이 떨어진 검은 이물질이 대리석 바닥을 더럽힌다.
그리드가 쉴 새 없이 떠먹고 있던 초코 푸딩이었다.
“.....”
한국 대표 팀 대기실.
그리드의 넋이 나가 버렸다. 평소에는 비싸서 사 먹지도 못했던 푸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갓리드? 이봐, 갓리드!!”
극검이 그리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사색이 된 그가 그리드의 어깨를 붙잡더니 마구잡이로 흔들어 댔다.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다.
대기실에 구비되어 있는 수많은 간식 중에서도 가장 비싼 초코 푸딩만 골라 챙긴 그리드. 녀석, 그걸 벌써 6개 연속으로 꾸역꾸역 퍼먹고 있었으니까!
“거봐! 내가 뭐랬어!!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당분을 한꺼번에 섭취하면 위험하다고 말했잖아!! 근데 넌...! 근데 넌 그저 공짜라고 좋아서....!! 이봐!! 갓리드!! 정신 차려!! 내 눈을 보라고!!!”
‘...상상하던 이미지랑 너무 달라.’
템빨왕 그리드와 그의 최측근 극검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은 무척 컸다. 특히 올해 한국 팀 대표로 참가한 젊은 랭커들에게 있어서 그리드와 극검은 영웅이자 우상이었다. 고상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기대했다.
한데 실제로 보니 상상과는 정반대의 인물들이었다. 동네에 꼭 한 명씩 있는 바보 형들 같았다.
하지만 실망감이 들지 않는 건 왜일까?
권위적이지 않아서일까?
친근감 있는 모습이 편해서 도리어 더 좋다.
“괜찮아.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야.”
소란 속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다시금 모니터에 집중했다. 몬스터를 사냥해서 <강함의 증명>을 수집 중인 유라를 지켜보는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로.... 정말로 강해졌구나.”
사실, 함부로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그리드는 유라를 걱정했었다.
톱클래스의 자리를 고수해 왔던 그녀가 데빌 슬레이어로 전직한 이후 1년 이상 슬럼프에 빠졌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는가?
‘데빌 슬레이어....’
특정 콘텐츠에서만 독보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조건부 클래스.
그것은 그리드 같은 무재(無才)와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힘이었다. 유라처럼 다재다능한 인물에게는 도리어 독이었다. 다방면으로 활약할 수 있는 유라의 재능을 한 개 분야에 규제시켜 버리는 맹독.
그리드는 유라가 전직을 후회하고 있는 게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하며 걱정해 왔다.
‘...필시 후회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인내했다. 그리고 급기야 스스로를 지옥의 구렁텅이에 떨어뜨렸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유라는 국가를, 성별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최강자로 회귀하는데 성공했다.
“수고했다.”
그리드 또한 늘 노력해 온 인물이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유라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 왔을지. 그렇기에 경외를 보냈다.
“갓리드....”
엄숙한 표정의 그리드에게 극검이 티슈를 건넸다. 손수건 따윈 없었다.
“입 닦아....”
***
[크리스탈 스켈레톤을 해치웠습니다.]
[<강함의 증명>을 모두 모았습니다. 앤드류 마을을 찾아가서 촌장을 만나십시오. 그가 <성검의 노래>의 2번째 구절을 알려 줄 것입니다.]
‘크라우젤하고 동선이 겹쳐선 안 돼.’
크라우젤은 이미 증명을 다 모았을까? 아니면 아직 모으는 단계에 있을까?
유라의 계산에 따르면 당연히 전자였다.
‘이대로 마을로 직행했다가는 크라우젤과 마주치고 말 거야.’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같은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라고 해도 검성인 크라우젤 쪽의 전투 능력이 월등히 높았다. 앞서 잠시 충돌하였을 때 유라가 느꼈던 압박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유라는 총을 조금만 늦게 뽑았어도 자신이 그대로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크라우젤의 강함은 그녀가 상정한 것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지옥 도약이 조금만 더 안정적이었어도....’
유라가 데빌 슬레이어의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습득한 비장의 스킬 <지옥 도약>은 안타깝게도 자주 사용하기 어려웠다.
시전자의 몸을 일시적으로 지옥 ‘어딘가’로 이동시키는 스킬.
시전자가 지옥의 어디에 떨어지게 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대악마의 품속에 떨어질 수도 있었고, 지옥불 바로 위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30분 전, 크라우젤과의 대결 중에 지옥 도약을 사용했던 유라는 제15위 대악마의 성 바로 앞에 떨어졌었다. 성문을 지키는 적색 괴물과 눈을 마주쳤을 때 걸린 상태 이상 <절대 석화>는 전설인 그녀조차도 완벽히 저항할 수 없었다. 신체 일부가 굳어서 민첩성이 큰 폭으로 떨어졌었다.
“하.”
유라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같은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임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젤의 눈치나 살피는 본인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쪽이 레벨도 더 높았다. 그녀는 국가대항전이 시작되기 전에 300레벨을 넘긴 반면 크라우젤은 여전히 200 중후반대 레벨로 추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면 대결에 승산이 적었으니 유라의 입장에서는 허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 핑계야.’
클래스보다는 파일럿이 더 중요하다. 그 냉혹한 진실, 노말 클래스 전직자였을 당시의 크라우젤은 그리드를 꺾음으로써 증명해 보인 바 있다.
‘서두르자.’
일일이 크라우젤의 눈치를 살피면서 행동했다가는 성검의 첫 번째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크라우젤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다가 금메달을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럼 굳이 성검 뽑기에 참가한 의미가 없다.
‘크라우젤과의 승부는 피할 수 없어.’
현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마음을 다진 유라가 앤드류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드의 응원이 행운을 불러 주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
“아, 저 둘 또 만났어.”
“유라 불쌍해서 어쩌냐.”
“이번엔 진짜로 위험한 거 아닌가?”
성검 뽑기가 시작되고 2시간 반이 지났을 무렵.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성검의 노래>의 3번째 구절을 습득하고 있는 그때, 벌써 마지막 구절을 습득한 크라우젤과 유라는 또다시 조우하고 있었다.
어느덧 6번째 격돌이었다. 유라가 아무리 피해 다녀도 크라우젤이 끈질기게 쫓아왔다.
그리고 대결이 거듭될수록 크라우젤쪽이 유라를 압도했다.
크라우젤의 전투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 반복되는 전투 속에서 그는 데빌 슬레이어 고유의 특성을 완전히 파악했고, 이를 역으로 이용해서 유라를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이제 유라는 잠시도 항거하기 힘들었다. 인외의 규격에 들어선 크라우젤의 검술 앞에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후퇴밖에 없었다. 크라우젤을 마주치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옥 도약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헉! 뭐야?”
“지금 마족을 소환한 거야?”
유라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을 연출했다.
붉은 광체와 함께 사라졌다가 블랙홀을 통해서 재등장한 그녀의 어깨 위에 마물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가 소환한 마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마물은 그녀의 어깨를 물어뜯고 있었다.
‘뭐지?’
해설진과 관중들은 물론이고 크라우젤조차도 작금의 상황에 당황했다. 유라가 어째서 저런 꼴이 된 건지 그는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어렴풋이 눈치챘다.
‘설마, 그녀는 스킬을 쓸 때마다 이계에 다녀오고 있는 건가?’
처음부터 수상하기는 했다.
붉은 광체와 함께 사라졌다가 재등장할 때, 유라는 종종 상처를 입거나 상태 이상에 걸린 상태로 나타났으니까. 그녀가 사용하는 순간 이동 스킬은 일반적인 순간 이동과 궤를 달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너무 위험한 스킬 아닙니까?”
크라우젤이 다 알았다는 듯이 말하면서 유라를 떠보았다. 하지만 유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시치미 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서걱-!
자신의 어깨를 물어뜯고 있는 마물을 베어 버린 유라가 총을 꺼내 크라우젤을 겨눴다. 그녀는 지옥 도약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자원이 회복되기까지 거리를 벌리고 시간을 끌 요량이었다.
그녀의 의도를 읽은 크라우젤이 거리를 좁히고자 시도했지만, 유라는 여류 플레이어계의 천외천이었다. 그에게 쉽게 거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
“아오! 크라우젤 저거 완전히 나쁜 놈이네!!”
그리드가 극도로 흥분했다.
그냥 퀘스트를 진행하면 될 것을, 자꾸 굳이 유라를 해치려고 드는 크라우젤이 너무 얄미웠기 때문이다.
“그냥 둘이 금메달이랑 은메달 나눠 가지면 되잖아? 근데 왜 못 잡아먹어서 저렇게 안달이야?”
“유라의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이겠지. 그녀를 살려 뒀다가는 자신이 금메달을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경기에 집중하고 있던 포식이불족발의 견해였다. 그의 곁에 나란히 앉은 한복 차림의 여성 비올라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가씨, 너무 강하니까 말이지.”
크라우젤이 한 수 위라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을 상대로 이토록 버텼던 사람이 여태껏 그리드밖에 없었다는 게 문제다. 사람들이 봤을 때는 둘의 실력 차이가 미미해 보였다.
“근데 저 지옥 도약이라는 스킬은 도대체 뭐지?”
“그러게. 단순히 사기급 이동 스킬이라고 생각했더니 몬스터를 달고 오고 말이야.”
유라는 또 한 번 후퇴에 성공하고 있었다. 크라우젤로부터 달아나 숲에 숨어든 그녀는 일단 큰 위기를 모면한 듯 보였다.
안도한 그리드가 목이 바짝 마른 것을 느꼈다. 탄산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생수로 손을 가져가는 그에게 안전 요원이 다가왔다.
“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누굽니까?”
한참 국가대항전이 진행되고 있는 이때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누굴까?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요원이 답했다.
“미국 팀의 판미르 선수입니다.”
“....?”
Satisfy 오픈 이래 쭉 대장일만 해 왔던 대장장이 랭킹 1위.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가 대장장이 승부에 참가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올해에는 참가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러 왔나?’
작년 사건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은 그리드가 대기실을 나갔다. 아무래도 판미르는 무시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의 입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존중이었다.
그리드는 판미르의 장인 정신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전설의 대장장이로 전직한 자신 때문에 그가 느꼈을 박탈감도 헤아리고 있다.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상대다.
“오래간만이군요.”
복도에 있는 판미르를 발견한 그리드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판미르는 작년보다 흰머리가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워낙 탄탄한 몸매와 강인한 눈빛을 지닌 덕분인지 나이가 들어 보이진 않았다. 칸이 15년 정도 젊었으면 이랬을까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리드의 인사에 목례로 화답한 판미르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올해 승부에서는 내가 이길 걸세.”
“.....”
아니, 기껏 찾아온 이유가 고작 이거였어?
쓸데없는 일로 경기 관람을 방해받고 말았다.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에게 판미르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이기더라도 그건 내가 자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야. 아이템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해 온 자네의 장인 정신, 그리고 끈기, 이를 바탕으로 쌓아 올린 실력은 필시 나보다 몇 수나 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네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말을 멈춘 판미르가 얇은 책자를 꺼냈다. 대장장이 승부 종목에 대한 규칙이 서술된 가이드였다.
“주최 측의 농간 때문이지.”
올해부터 대장장이 승부의 규칙이 바뀌었다.
작년까지는 모든 참가자가 ‘똑같은 도안’을 가지고 ‘똑같은 아이템’을 제작하는 방식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참가자 개인이 ‘본인이 소유한 도안’을 가지고 ‘각자 원하는 아이템’을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심사 기준의 변경이었다.
아이템의 능력치를 토대로 ‘종합적인 가치’를 심사했던 작년과 달리, 올해의 대장장이 승부는 아이템의 ‘등급’만을 본다. 무조건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는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게끔 심사 기준이 변경됐다.
성장형 아이템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레전드리 등급까지 성장 가능한 아이템일지라도 완성될 때 등급이 노말이라면 메달과 작별하게 된다.
판미르가 올곧은 눈으로 말했다.
“자넨 이미 눈치채고 있겠지? 올해 대장장이 대회의 규칙과 평가 기준이 바뀐 이유는 순전히 자네를 견제하기 위함일세.”
똑같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지라도 그리드가 제작한 아이템의 능력치가 평균적으로 더 뛰어나다. 아이템 평가 기준을 능력치에 둘 경우 대장장이 승부에서 우승하는 사람은 그리드가 될 공산이 컸다.
주최측이 아이템 평가 기준을 등급으로 바꿔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특정 선수를 견제하는 용도로 대회의 규칙을 바꿔 버리다니.... 자네의 입장에서는 부당하다고 느낄 만한 처사지.”
“말씀하시고자 하는 게 뭡니까?”
“이번 대회에서 내게 지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었네. 자네는 나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주최 측의 농간 때문에 패배하게 되는 거니까.”
“.....”
대체 이게 무슨 자신감일까.
판미르가 선의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드는 뭐라고 대꾸하기 난처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판미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생산직 클래스 최초로 280레벨을 달성했고, 히든 퀘스트도 무려 3개나 클리어했어. 이제 나 또한 0.01퍼센트 확률로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자격이 생겼지. 그리고 내게는 최소 에픽 등급의 아이템부터 제작되는.... 말도 안 되는 사기급 아이템 제작법이 있다네.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시게나. 그럼 이만.”
한참을 실컷 떠든 판미르가 자리를 떠났고, 혼자가 된 그리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판미르가 숭고한 장인 정신을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자비롭고 섬세한 인물인 줄은 또 몰랐다.
‘근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자비를 베풀 쪽은 판미르가 아니었다.
현재 시점의 판미르는 상상조차 못할 아이템 제작법을 그리드는 수두룩하게 보유 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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