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4화
『전 세계 20억 Satisfy 플레이어 여러분! 여러분께서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셨던 제3회 국가대항전이 지금! 드디어!! 시작!!! 합니다!!!! 그 첫 번째 경기를 지금부터 함께 감상하시죠!!!!』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제3회 국가대항전의 서막을 올리는 종목은 <성검 뽑기>였다.
성검 뽑기는 본래 대중의 관심이 적은 종목이었으나 올해만큼은 달랐다.
예년보다 3개월이나 늦게 열린 국가대항전을 기다린 사람이 워낙 많아서였기도 하고, 성검 뽑기 참가자 목록에 검성 크라우젤이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막전부터 크라우젤을 볼 수 있다니! 이거 완전 두근거리잖아!!
-개막전이랑 패막전만 골라서 출전하는 갓라우젤 님.... 괜히 주인공이 아니심....ㅎㅎ
-근데 성검 뽑기는 성검을 먼저 뽑는 사람이 이기는 경기 아닌가요? 검성이면 당연히 성검의 선택을 받을 테니까 시작하자마자 크라우젤이 성검 뽑고 우승하는 거예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그럼 경기가 성립이 안 되잖음.
성검 뽑기는 아서왕 전설의 유명한 일화 <바위에 박힌 검>을 모티브로 삼은 종목이다.
바위에 박혀 있는 성검을 먼저 뽑는 사람이 우승하는 단순 규칙의 경기였다.
하지만 과정은 쉽지가 않았다.
성검을 뽑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 했고, 그 조건이란 <성검이 원하는 인물상>이 되는 것이었다. 성검이 원하는 인물상이 되기까지 참가자들은 무력과 지력, 임기응변으로 미션을 돌파해 나가야 했다.
문무 양쪽에 능통해야 했기 때문에 참가자 입장에서는 무척 난이도 높은 종목이었으나, 전개가 루즈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대중의 흥미는 쉽게 끌지 못했다. 아무래도 쉴 틈 없는 액션이 펼쳐지는 자극적인 종목보다야 인기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성검 뽑기에 참가하려는 사람은 드물었고, 제2회 국가대항전 당시 성검 뽑기는 무명 랭커들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한데 올해 성검 뽑기에는 검성 크라우젤과 데빌슬레이어 유라가 참가한 것이다.
사람들의 기대감이 고조됐다.
“내가 성검 뽑기를 보면서 두근거리는 날이 올 줄이야!”
“근데 말이지. 크라우젤이야 검성이니까 성검 뽑기하고 왠지 잘 어울린다고 쳐도, 유라는 굳이 왜 성검 뽑기에 참가한 걸까? 그녀가 활약할 수 있는 종목은 따로 있지 않나?”
“흠.... 아무래도 성검 뽑기가 경쟁률이 낮은 종목이다 보니까 메달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 아닐까? 올해 한국은 하위권에 머물게 될 텐데 메달 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겠어.”
“지옥 달리기가 형평성 문제로 폐지된 게 그녀한텐 큰 타격이네.”
“고르고 골라서 출전한 게 성검 뽑기인데 하필이면 크라우젤을 만난 거네. 재수도 없지. 저쯤 되면 불쌍하다.”
대악마 벨리알 레이드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유라였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악마에 한해서만 강력하다는 것이 세간의 추측이었다.
또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는.
***
성검 뽑기의 무대가 되는 <브뤠톤 섬>은 크게 3개의 구획으로 나뉜다.
첫째, 세이프티 존.
PvP가 불가능한 안전지대다.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바위에 박힌 검>이 있는 중앙 구역이 세이프티 존에 속했다.
둘째, 라우풀 존.
PvP가 가능하지만 플레이어를 공격할 경우 <범법자>로 분류되어 <수호자>들에게 체포, 혹은 살해당할 수 있는 중립지대다. 성검의 힌트를 주는 NPC들이 살아가는 <마을>과 자원 회복 속도를 높여 주는 <신전> 등이 중립지대에 속했다. 브뤠톤 섬에는 총 9개의 마을이 있으며 마을간 간격은 약 3킬로미터다. 신전의 위치는 미니 맵에 표기되어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카오틱 존.
아무런 제약 없이 PvP가 가능한 혼돈 지대다. 세이프티 존과 라우풀 존을 제외한 브뤠톤 섬 전역이 카오틱 존이라고 보면 된다. 카오틱 존에는 네임드 보스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대거 서식하므로 플레이어는 항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검은 중요치 않다.}
“....?”
브뤠톤 섬 중앙.
성검 뽑기에 입장한 42명의 참가자들이 시작과 동시에 혼란에 빠졌다.
반짝이는 대리석에 직각으로 꽂힌 검.
은은한 광채를 흩뿌리는 그 성스러운 검의 하단에 떠올라 있는 한 문장, ‘검은 중요치 않다.’가 그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아니, 명색이 성검을 장식하고 있는 구절이 왜 검의 필요성을 부정한단 말인가?
‘아귀가 맞질 않잖아?’
참가자들의 머리가 잠시 굳어 버렸으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주인을 원한다는 뜻인가?’
‘자신을 쥐어서 강한 자가 아니라, 본래부터 강한 자가 자신의 주인이길 바라는 건가요?’
크라우젤과 유라는 문장에 숨은 뜻을 즉시 파악하고 있었다.
스팟-!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스스로가 ‘강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무엇이겠는가?
간단하다.
전투다.
이와 같은 판단 하에 안전지대를 벗어난 크라우젤과 유라는 혼돈 지대를 향해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 눈길이 마주치고 말았다.
스릉-!
자신과 반대편의 숲으로 진입하는 유라를 발견한 크라우젤이 무기를 뽑았다. 용의 뼈로 만든 은빛의 병기, 백아도였다.
‘그녀는 위험하다.’
유라는 오랜 세월 동안 열 손가락 안에 꼽혀온 강자다. 크라우젤 또한 당연히 그녀의 실력을 인정했고 경계했다. 초반에 처치해 두지 못했다가는 후환이 될 것을 뻔히 알았다.
하여.
스팟-!
유라가 그늘진 숲에 몸을 숨기기 직전.
백광보를 전개한 크라우젤이 그녀에게 몸을 날렸다. 햇빛의 굴절을 이용해서 반 은신 상태에 돌입한 그는 은밀했다.
“앗! 유라가!!”
관중들이 사색이 되었다.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녀가 대회 개시와 동시에 탈락하게 생겼으니 관중들의 입장에서는 낭패였다.
“크라우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놈!!”
“그 냉혹한 면이 좋은 거야! 크라우젤 이겨라!!”
시작과 동시에 최대의 경쟁자를 척살하려드는 크라우젤에게 누군가는 비난을, 누군가는 응원을 보낸다. 그들이 깔고 있는 전제는 공통 됐다. 유라가 곧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관중들은 크라우젤이 유라를 손쉽게 해치울 것으로 예상했다. 크라우젤의 PvP 능력이 워낙 월등한데다가, 그의 은신 보법이 은밀함을 더해서 신속하였기 때문이다. 유라는 눈치채지도 못하고 크라우젤의 접근을 허용, 그대로 치명상을 입게 될 것으로 보였다.
대기실에서 경기를 모니터링 중인 한국 팀 대표 대부분도 생각이 같았다.
“크라우젤의 대인전 능력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 끝이야.”
극검이 손톱을 깨물었다. 그는 유라가 어서 크라우젤의 접근을 눈치 채고 총을 뽑아 들기를 바랐다. 그녀가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크라우젤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 그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그리드는 달랐다.
‘보여 주는 거지?’
그리드는 여전히 믿고 있었다. 소중한 동료가 표출했던 자신감을 말이다.
‘힘내.’
유라는 지난 수개월 동안 지옥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녀는 고생한 만큼 반드시 성장해 있어야만 했다. 노력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만약 증명하지 못한다면, 누구보다 충격 받는 것은 그녀 본인이 될 것이었다.
그리드가 유라를 응원하였고.
‘당신의 믿음에 보답하기로 했지요.’
우연인지, 운명인지.
유라는 그리드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팟-!
싸움의 양상은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유라에게 접근한 크라우젤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지옥 도약.”
유라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반응했다. 스킬을 전개한 그녀의 몸이 적색 광체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신?’
텔레포트 계열 마법이 아닌 이상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텔레포트 계열의 마법은 마법사의 전유물이었다.
이를 토대로, 크라우젤은 유라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 단순한 눈속임이라고 판단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검의 궤적을 그렸다.
유라가 서 있던 지점이다.
크라우젤은 유라가 곧 피를 분출하면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리라 여겼다.
하지만.
부웅-!
“....?!”
베는 감촉이 없다?
백아도는 허공에 괜한 잔광만 남겼고, 크라우젤의 가는 눈썹은 치켜져 올라갔다.
동시에.
스륵-!
크라우젤의 등 뒤에 작은 블랙홀이 생성됐다. 아무런 전조도, 소리도 없었기 때문에 천하의 크라우젤이라도 눈치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라가 블랙홀 안에서 튀어나왔다.
“?!”
옷깃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뒤늦게 이변을 감지한 크라우젤이 반사적으로 백아도를 뒤로 휘둘렀으나.
푹-!
크라우젤은 괴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의 뒤통수에는 눈이 달리지 않았다. 그가 휘두른 백아도는 유라를 베지 못했다. 초감각이 발동되기에는 유라의 기척을 너무 늦게 감지한 것이 문제였다.
반면 유라의 검은 크라우젤의 등을 정확히 꿰뚫었다.
“....!!!”
“!!!!”
『!!!!』
경기를 지켜보는 중인 선수들과 관중들, 그리고 해설진과 시청자 전원의 입이 동시다발적으로 크게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놀란 사람은 크라우젤 본인이었다.
선공을 당한 것.
배틀 필드에서 라우엘과 폰에게 협공당했을 때와는 의미가 달랐다.
이곳은 Satisfy.
이곳에서 크라우젤은 완연한 존재였다. 하늘 위의 하늘이었다. 절대자였다.
한데 암습을 당한 것도 아니고 정면전에서 선수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플레이어간의 대결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휘리릭-!
크라우젤이 드물게 당황하고 있는 사이, 유라는 검을 회수하는 동작에 회전을 싣고 있었다. 한 마리 백조처럼 우아한 동작이었다.
쐐애애액-!!
원심력이 더해진 그녀의 연격이 크라우젤을 찌른다. 지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습득한, 군더더기 없는 연속기였다.
까강-!
크라우젤이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다.
유라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지금, 그의 초감각 패시브는 왕성한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백아도를 세워서 유라의 공격을 막아 낸 그가 검성의 저력을 발휘했다. 검성이 되고 새롭게 습득한 <무기 삼키기>를 전개, 백아도와 맞물린 유라의 검을 회전시켜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 탓에 상체가 앞으로 기울고 만 유라의 얼굴이 크라우젤의 얼굴과 맞닿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입술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좁혀졌다.
“우오오오오오!!”
“그리드보다는 크라우젤이랑 잘 어울리네!!”
관중들이 선남선녀의 아찔한 연출에 흥분했다. 하지만 정작 크라우젤과 유라 사이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다.
얼굴을 맞댄 두 사람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에게 속삭였다.
“그리드 외의 인물에게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를 각별하게 여기지 마세요. 영우 씨는 저에게만 특별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하...?”
타앙-!!
크라우젤의 검 삼키기 탓에 균형을 잃은 유라.
사람들은 크라우젤이 그대로 승기를 잡으리라고 판단했다. 유라가 반격을 허용하고 치명상을 입은 뒤, 기세를 탄 크라우젤에게 그대로 제압당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라는 어느새 왼손에 총을 꺼내 쥐고 있었고,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크라우젤의 검보다 총알이 날아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큭....!”
지근거리에서 쏘아진 총알은 제아무리 크라우젤이라도 피하지 못했다. 이마에 흐르는 피가 그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붉어진 시야에 담기는 유라.
그녀의 한 손에는 검이, 다른 한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다.
데빌 슬레이어의 레벨이 300을 달성한 시점부터 습득한 <양손 사용>패시브 스킬의 위용이다.
“....재밌군.”
연달아 2회의 공격을 허용한 크라우젤이 푸른 검기를 몸에 둘렀다.
이제 그는 유라를 ‘긴장해야 하는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동급의 수준으로 상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라와 전력을 겨룰 수 없었다.
“지옥 도약.”
아무리 그래도 검성과의 정면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한 유라가 즉시 자리에서 이탈한 까닭이다.
적색 광체에 휩싸이며 사라졌다가 전혀 다른 구역에 생성되는 블랙홀을 토대로 재등장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크라우젤의 초감각으로도 쫓을 수 없었다.
마치 공간 그 자체를 도약하는 듯, 광체에 휩싸이는 순간 그녀의 기척은 완전히 삭제됐다. 블랙홀의 생성 전조도 없었다.
“....데빌 슬레이어.”
멀어지는 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크라우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그리드와 처음 겨뤘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그리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유라!! 유라!! 유라!!”
“아!! 나의 여신님께서 드디어 돌아오셨다!!”
전설 클래스로 전직한 이후 개성을 잃고 한동안 방황하던 유라가 옛 명성을 되찾았다.
더없이 화려한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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