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6권 - 3화
『도쿄에 역사상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인 가운데 Satisfy 개막식이 열렸습니다.』
『만석을 이룬 도쿄돔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네요. 국가대항전에 참가한 50개국의 1,500명 대표들은 하나같이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으며, 관중들은 그들에게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국가대항전은 의미가 크죠. 선수들의 입장에서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기회이고, 그들을 응원하는 각국의 국민들에게는 대규모 버프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요.』
『올해는 어떤 국가와 선수가 활약을 펼치게 될지 궁금합니다.』
『저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 기대되는군요.』
『기존 상위권 실력자들의 존재감이 워낙 커서 새로운 스타가 배출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세상이 넓다는 걸 잊어선 안 되죠.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은둔 고수가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레스와 아그너스 같은.... 그런 사람들 말이죠.』
Satisfy는 전 세계인이 즐기는 게임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는 바, 국가대항전의 규모는 매해 필연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서 참가 선수들의 마음가짐 또한 보다 진지해졌다.
대회 규모가 커진 만큼 보상도 커진 까닭이다.
금메달 획득자는 레전드리 등급 이하의 드롭 아이템, 혹은 신화 등급 이하의 제작 재료를 선택해서 얻을 수 있었으며, 은메달 획득자는 유니크 등급 이하의 드롭 아이템, 혹은 레전드리 등급 이하의 제작 재료를. 동메달 획득자는 에픽 등급 이하의 드롭 아이템, 혹은 유니크 등급 이하의 제작 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
얼핏 봤을 때는 동메달 획득자에게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보상 내역에 ‘성장형 아이템은 고를 수 없다’는 명시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메달 획득자는 최소 에픽 등급의 ‘성장형’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에픽 등급부터 시작하는 성장형 아이템은 대부분 레전드리 등급까지 성장이 가능했다.
‘반드시 메달을 따고 말겠다!’
이글이글!
선수 대표로 단상에 오른 통합 랭킹 1위 크리스가 선서를 진행하는 동안, 대열을 맞추고 선 각국의 선수들은 눈빛을 불태웠다.
그들 대부분은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그리고 지슈카가 며칠 전 진행된 이벤트에서 우승하고 금메달 보상과 동급의 보상을 획득한 까닭이다.
안 그래도 강력한 그들 세 사람이 한발 더 앞서 나가게 됐단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압박감이 되었다. 지존이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벽들이 더욱더 높아졌으니 초조했다.
‘특히 그리드의 아이템 제작 기술이 문제야.’
높은 등급의 제작 재료를 쓴다고 해서 무조건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되는 건 아니다. 제작 결과는 결국 확률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예외라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전설의 대장장이인 그는 설령 레전드리 등급의 제작 재료를 쓰더라도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으리라고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템빨단이 다량의 메달을 확보했다가는 템빨단의 전략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거라는 것이 사람들의 우려였다.
물론 그건 크나큰 오해였다.
‘나도 차라리 완제품을 얻을까?’
본래 그리드는 <신수의 부산물>을 원했었다. 주작궁의 재료가 된 주작의 숨결과 동급의 재료 말이다. 그리드의 목표는 제2, 제3의 주작궁과 열망의 무아경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화급 제작 재료를 쓴다고 해서 무조건 신화급 아이템이 탄생하는 건 아니다. 대악마 벨리알의 부산물로 템빨단원들의 아이템을 제작해 줄 당시, 그는 신화급 아이템을 단 하나도 제작하지 못했고 운 좋아야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했을 뿐이다. 재수 없을 때는 유니크 아이템을 제작했을 때도 있었다.
망할 수 있단 뜻이다.
‘반면 레전드리 아이템을 성장형으로 얻을 수 있으면 확정적으로 신화급 아이템을 확보하게 되는 셈인데.’
개막식이 끝난 이후.
여전히 보상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지슈카가 다가왔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구릿빛 피부는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나는 주작의 숨결을 달라고 할 거야. 그리드 네가 그걸로 주작궁과 시너지가 좋은 아이템을 제작해 줬으면 좋겠어.”
“주작의 숨결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신화급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괜찮겠어?”
“난 너를 믿어.”
“.....”
그리드의 심장이 두근 뛰었다.
미소 짓는 지슈카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다.
그녀가 보내 주는 절대적인 신뢰가 그리드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녀 덕분에 그리드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좋아... 나는 청룡의 숨결을 받아야겠다.”
그리고.
“2개의 메달을 더 따서 현무의 숨결과 백호의 숨결까지 얻어야지. 지슈카 너도 응원하마.”
“응... 나도 항상 응원할게. 고마워.”
지슈카의 미소가 더욱더 화사해졌다. 그리드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큰 힘이었다.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토록 의지해 본 적이 또 있을까? 그녀는 행복했다. 자신 또한 그리드에게 의지가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을 해야 하는데.”
“응? 뭐라고? 시끄러워서 못 들었어.”
“아, 아니야. 못 들었으면 됐어. 혼잣말이니까.”
지슈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현실은 Satisfy와 달라서 그리드의 실물을 마주하자 더욱더 긴장되는 그녀였다.
“그리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또 다른 미녀가 다가왔다. 태양처럼 밝은 지슈카와 달리 달처럼 고고한 유라였다.
“타국 선수들의 참가 희망 종목이 공개됐어요.”
유라의 차가운 시선이 지슈카를 살핀다. 언제나처럼 가슴골이 훤하게 드러나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지슈카가 그녀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가죠.”
선수들은 3시간 내에 참가 희망 종목을 교체할 수 있었다. 타국 선수들의 희망 종목을 확인하고 보다 나은 결과를 창출할 수 있게끔 회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은근슬쩍 그리드의 손목을 낚아채는 유라의 모습을 확인한 지슈카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미소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분명한 적의가 깃들었다.
“헤에, 같은 팀이라서 그런지 사이가 좋아 보이네.”
“먼 이국땅에 사는 당신보다야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죠.”
“단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이가 좋은 거라면 긴장해야 할걸? 내 한국 이민 프로젝트는 현재진행형이니까.”
“대량의 빚을 떠안고 있는 당신을 나라에서 쉽게 받아줄지 의문이네요. 설마 불법체류자를 꿈꾸고 있는 건 아니겠죠?”
“웃...!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금메달 따고 빚쟁이 신세 면할 거라구!!”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아마 같은 종목에서 경쟁하게 될 테니까요.”
“방해하겠다는 거야? 흥, 좋아! 얼마든지 덤벼!! 지옥에서 얼마나 대단해져서 돌아왔는지 확인해 주겠어!!”
“당신, 숨도 못 쉴 걸요?”
파직!
파지지직!!
얼음장처럼 서늘한 유라의 시선과 불꽃처럼 뜨거운 지슈카의 시선이 허공에 얽히자 전류가 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그녀들의 중간에 선 그리드가 어리둥절해졌다.
‘왜들 이래?’
그리드는 모른다.
지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주변의 남성들이 어떤 심정일지.
***
올해 국가대항전의 종목은 총 27개였다. 한 국가가 모든 종목에 참가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각국의 선수들은 각자 자신 있는 종목에 참가하거나 비교적 경쟁률이 낮은 종목에 참가하는 식으로 메달을 넘봐야 했다.
그리고 S.A 그룹이 선수들의 참가 희망 종목을 공개한 이유는 보다 다양한 전략과 변수가 창출되게끔 의도하기 위해서였다.
그 탓에 선수들만 골치가 아팠다.
다른 선수들이 희망 종목에 그대로 참가할지, 아니면 속임수일지.
이를 구분하여 출전 종목을 확정 짓기까지 선수들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회의에 임해야했다.
“그리드, 너는 어느 종목에 참가할 거야?”
한국 팀 대기실.
선수들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집중됐다.
메달 획득률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 종목 결정권을 우선적으로 넘기는 건 당연했다.
“음....”
미국 팀 선수들의 참가 희망 종목을 살피는 그리드의 고민이 깊어진다.
크라우젤이 참가를 희망한 종목이 영 거슬리는 그였다.
“PvP 참가는 당연한 거라지만, 성검 뽑기는 뭔데?”
<성검 뽑기>는 3년 동안 꾸준히 국가대항전 종목으로 채택되고 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비주류 종목으로 분류됐다. 게임 방식이 복잡하고 전개가 느려서 대중성이 낮았다.
“이거 머리 엄청 써야 하는 종목 아닌가?”
맞다.
성검 뽑기의 참가자들은 우선 성검의 스토리를 확인한 후, 스토리 속에 숨겨진 힌트를 쫓아서 성검이 원하는 인물상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성검이 원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퀘스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그 퀘스트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전투 위주의 퀘스트뿐만 아니라 수수께끼 위주의 퀘스트도 많았다. 지식의 저변이 얕으면 섣불리 참가할 수 없는 종목이었다. 그리드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종목이었다.
“크라우젤하고도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이건 어디까지나 참가 ‘희망’ 종목일 뿐이다.
그리드는 크라우젤이 실제로 성검 뽑기에 참가할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왜 페이크를.... 으음, 과연 크라우젤은 어느 종목에 참가할까?”
그리드는 크라우젤과 2개 종목 전부에서 승부를 겨루고 싶었다. 데미안의 기자회견 때문만이 아니다. 작년 PvP에서 패배한 설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작년에는 크라우젤에게 금메달 하나를 빼앗겼으니, 올해에는 배로 갚아서 2개의 금메달을 빼앗고 싶은 것이 그리드의 심리였다.
크라우젤의 참가 종목을 예상하고자 노력하는 그에게 유라와 극검이 말했다.
“크라우젤은 영리한 인물이에요. 성검 뽑기에 그보다 적합한 인물도 적죠.”
“현재 레벨이 낮아서 온전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크라우젤의 입장에서는 성검 뽑기가 딱이지. 부족한 무력을 지력으로 충당할 수 있는 종목이 바로 성검 뽑기니까.”
“....크라우젤이 똑똑해?”
“당연하지. 그가 랭킹 1위를 유지하던 기간에 보여 줬던 행보를 떠올려 봐. 보통 비범한 게 아니야.”
“.....”
아니, 그럼 진짜로 성검 뽑기에 출전하는 건가?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에 내가 나가면 어떻게 되지?”
“...그러지 마.”
“.....”
아무래도 올해의 설욕은 PvP에서밖에 할 수 없을 듯하다.
그리드는 아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사실 크라우젤과 대결해서 100프로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다른 한 개 종목은 무조건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는 쪽으로 나가자.’
뭐겠는가?
당연히.
“그럼 난 PvP랑 대장장이 종목에 출전한다.”
대장장이 종목에 출전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비웃을 수도 있다. 크라우젤과의 승부를 너무 대놓고 피하는 것 아니냐면서 말이다.
‘뭐, 비웃으려면 비웃으라지.’
그런 놈들은 어차피 뭘 해도 비웃기 마련이다.
결정한 그리드가 유라의 선택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유라가 성검 뽑기와 표적 맞추기 종목을 선택한 까닭이었다.
표적 맞추기는 1 대 1 PvP만큼이나 강자가 많이 출전하기로 유명한 메이저 경기였고, 성검 뽑기는 크라우젤이 출전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려는 걸까?
당황하는 그리드와 선수들에게 유라가 설명했다.
“금메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과 경쟁해서 승리해야지만 한국의 종합 순위를 높일 수 있으니까요.”
마음이야 알겠다.
“하지만 승산은? 유라 너는 우리 최대의 전력이야. 네가 금메달을 놓쳤다가는 타격이 너무 크다고. 너무 깊이 생각해서 괜히 승산 없는 싸움하지 말고... 웁! 우웁!!”
우려하는 극검의 입을 그리드가 가로막았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빛을 하고 있는 유라에게 웃어 주었다.
“지옥에서 엄청 강해졌나 보네?”
그것도 크라우젤을 맞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믿고 응원할게.”
그리드는 유라가 허풍을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자신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믿음에 보답할게요.”
유라가 미소로 화답한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쁜 나머지 그리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포식이불족발이 거수하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단체전 2개 종목에 참가하도록 하지.”
“오오, 그거 좋군!”
간신히 그리드를 떼어 낸 극검이 열광했다.
던전 제작자 포식이불족발의 능력이 단체전에서 상상불허의 위력을 발휘할 것임을 쉽게 예상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올해 한국의 종합 순위가 하위권에 머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극검의 생각은 달랐다.
‘대한민국은 올해도 상위권 성적을 지킬 거야!’
희망찬 기대에 쐐기를 박는 인물이 있었다.
“나도 최소 동메달 하나쯤은 딸 수 있게끔 노력해 보마.”
작년에 한국으로 이민 온 뒤부터 그리드의 곁을 지키고 있는 야수 인간 툰이었다.
“푸하하하하!! 대한민국 만세다!!”
극검이 신나서 춤을 췄다. 정작 자신은 무슨 종목에 참가해야 할지 결정도 못해 놓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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