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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93화 (588/1,794)

템빨 35권 - 22화

‘왜 보지 못했지?’

칼질에도, 톱질에도 잘려 나가지 않는 질긴 빨랫줄.

창가에 선 크라우젤은 그 빨랫줄을 타고 넘어오는 적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말인 즉, 건너편 건물과 연결되어 있는 빨랫줄 전부를 시야에 넣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폰과 라우엘은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귀신처럼 창틀을 타고 넘어왔다.

‘이거군.’

의아해하던 크라우젤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단창에 꽂힌다. 내구도가 바닥난 듯 날이 완전히 무뎌져 있는 창이었다.

‘외벽을 기어 올라온 건가.’

현재 모두가 모여 있는 이 건물은 5층 높이였으나 낡고 볼품없었다. 외벽이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균열이 심했다. 도구의 힘을 이용하면 충분히 등반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보통 이상의 민첩성과 인내심, 그리고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스윽.

크라우젤이 자신을 포위하고 선 두 사내를 차례대로 살폈다.

한 명은 장창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철로 만든 부채를 쥐고 있었다.

‘누굴까.’

경계하는 크라우젤에게 라우엘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거짓 없이 솔직하게.

“템빨국 재상 라우엘입니다. 아, 지금은 당신과 같은 미국 팀 대표 라우엘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좋을까요? 국대전과 관계없는 별도의 이벤트라고는 하지만 함께 싸우지 못하고 적이 돼서 유감....”

라우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슈욱!

크라우젤이 검을 내질렀다. 표적은 떠드느라 바쁜 라우엘이었다.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라우엘 옆에 창을 쥔 사내, 정체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폰일 것이다.

‘폰은 강해.’

반면 라우엘은 책사다. 그의 전투 능력은 미약할 것이었다. 크라우젤은 우선 라우엘을 처리한 후 폰과의 전투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날린 기습이다.

한데,

쩌정!

“....!”

라우엘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손쉽게 크라우젤의 공격을 막아 냈다. 검이 떨어지는 타이밍을 아슬아슬하게나마 읽어 내고 철선을 펼쳐서 방어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솜씨에 크라우젤은 깜짝 놀랐다. 표정의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시 접은 철선을 입가로 가져간 라우엘이 말한다.

“이래 봬도 저 또한 정점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뭐, 20억의 정점인 당신과는 규모가 다르긴 하지만요.”

약 3년 전,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10인의 천재가 있다. 뒤늦게 게임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상위권 랭커에 올랐던 소년, 소녀, 청년들. 바로 1세대 10인의 루키다.

그리고 라우엘이 그들 중 최고의 실력자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었다.

템빨단에 가입한 이후에는 흐름의 주인으로 전직하여 직접적인 전투 능력이 퇴화되었다지만,

“기본 실력은 조금 있는 편이죠.”

배틀 필드의 캐릭터 능력치는 모두 같은바, 순수한 컨트롤 실력으로 강함의 척도가 정해지는 이곳에서 라우엘은 최상위권 실력자였다.

큭큭!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은 그가 크라우젤에게 철선을 겨눈다.

“또한 당신의 행동 패턴을 예측할 수 있는 명석한 두뇌까지 겸비했지요. 크라우젤 님 당신, 꽤 힘든 싸움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제 몸 속의 혈류가 들끓기 시작했거든요. 후후후훗....!”

“.....”

오글오글!

역시 템빨단원들은 하나같이 상대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피부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고 있는 크라우젤의 등을 노리고 장창이 날아들었다. 폰의 공격이었다.

몸을 옆으로 굴려서 피한 크라우젤이 곧바로 일어나 반격하려고 했으나,

쩌정!

뒤쫓아 온 라우엘이 내리찍은 철선이 그의 행동을 제약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방어하는 크라우젤의 목덜미에 다시 폰의 창이 꽂힌다.

둘 모두 빠르고, 예리했다. 완벽한 협공이었다.

푸욱!

크라우젤이 피를 흘렸다. 세상을 충격에 빠뜨리는 장면이었다.

『크라우젤이 적에게 먼저 타격을 입다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광경이로군요!』

세계 각국 방송사 해설진이 난리다. 크라우젤이 선공을 허용하는 경우는 그만큼 드물었다.

“크라우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란 지슈카가 원호를 시도하지만,

푹! 푹푹!

“윽....!”

건너편 건물에서 자꾸만 날아오는 화살이 그녀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커다란 가죽 소파 뒤에 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나!’

작금의 상황에 분노를 느끼는 지슈카였다.

자신의 본래 역할이 무엇인가?

외부의 적들을 저격해서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힌 후, 내부에 진입하는 적들을 쏘아 맞추면서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들이 연합한 탓에 상황이 너무 어렵다.

‘그리드와 함께 우승하고 싶었는데.’

그와 나란히 단상에 올라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옹하고 싶었다. 분위기 타서 키스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려울 듯하다.

‘무능해....! 나, 너무 무능해!’

푸욱!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지슈카의 눈앞에 화살이 날아와 멈춘다. 가죽 소파를 꿰뚫은 화살의 촉이 일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슈카의 몸을 숨겨 주고 있는 가죽 소파는 이제 완전히 고슴도치 꼴이었다.

‘사각이 거의 없어.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났다가는 나도 고슴도치가 될 거야.’

건물 내부가 너무 휑하고 창문은 많아서 문제다. 활을 쏘려면 눈으로 표적을 쫓아야 하건만, 소파 바깥으로 눈만 배꼼 내밀어도 화살 세례가 쏟아지니 뭘 어찌할 도리가 없다.

‘....눈으로 좇을 수 없다?’

그러면,

‘귀로 좇자.’

묘안을 떠올린 지슈카가 차분하게 심호흡한 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뒤엉켜 싸우는 중인 크라우젤과 폰, 라우엘의 발소리에 집중하며 활시위를 당겼다.

순간,

푹푹푹!

또 여러 발의 화살이 날아와 그녀를 위협했다.

‘아, 저쪽에 있는 거울 때문에 내가 뭘 하는지 볼 수 있나 보구나.’

거의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빈 건물에 하필이면 저딴 전신 거울이 놓여 있을 건 또 뭐람?

“맵 디자이너 뇌에다가 화살 하나 박아 주고 싶네. 하.”

깊은 한숨과 함께 시위를 내려놓는 그녀. 의외로 절망하지는 않는다.

‘괜찮아. 화살의 개수에는 한도가 있으니까.’

그리드와 합류한 이후 화살과 경전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지슈카는 화살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찾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찾더라도 꼭 1개, 2개씩밖에 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모품에 가까운 주제에 그렇게 조금씩 드롭되어 있었으니 모으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저들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지슈카는 현재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이 화살 비가 머잖아 멈추리라 보았다.

반면 자신은?

‘내 화살은 이제 거의 무한이지.’

먼지 가득한 거울 속에서도 빛나는 지슈카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소파와 벽 곳곳에 가득 박힌 화살들이 그녀를 흐뭇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

‘그나마 지슈카가 있어서 다행이군.’

건너편 건물의 궁수들은 이제 더 이상 크라우젤을 노리지 않았다. 크라우젤의 회피율이 너무 높은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혹시라도 폰과 라우엘을 공격하게 될까 봐 염려해서였다. 궁수들의 어그로는 지슈카에게 완전히 집중되어 있었다.

‘문제는.’

근거리 딜러들이다.

앞서 빨랫줄을 건너오려다가 실패하고 추락했던 그들이 다시 이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은 한시라도 빨리 폰과 라우엘을 해치우고 그들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폰과 라우엘은 템빨왕 그리드의 최측근답게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채챙! 챙!

길이가 채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철선.

크라우젤에게 바짝 붙은 라우엘은 철선의 짧은 리치를 활용해 빠른 연타를 날렸고,

쐐애애액!

폰은 중거리를 유지한 채 자꾸 창을 크게 찔렀다.

점차 더 견고해지는 두 사람의 합격이 크라우젤의 발목을 완전히 붙잡고 있었다.

퍽!

크라우젤의 검에 연타를 가로막히고 주먹을 얻어맞은 라우엘이 당황하기는커녕 후훗 웃는다.

“1의 데미지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시간은 당신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에 초조하시지요?”

빨랫줄을 건너오기 시작하는 아군의 모습을 확인한 라우엘은 뻔히 예상했다. 크라우젤의 평정심, 조만간 끝이라고. 그 또한 결국에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었다.

곁에서 그리드를 섬겨 온 라우엘이기에 더 확실히 안다. 크라우젤과 마찬가지로 지존에 근접한 그리드 또한 자주 평정심을 잃지 않던가?

‘당신들 또한 결국 사람... 어라?’

철선 휘두르기에 열중하고 있던 라우엘이 어리둥절해졌다. 시야가 갑자기 빙글 돌더니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뭣....!”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붙잡혀서 날려졌다고?

우당탕!

뒤늦게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 라우엘, 이미 바닥에 등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가 된 그를 크라우젤이 검으로 찔렀다.

푸욱!

“쿨럭!”

라우엘의 가슴이 검에 꿰뚫리는 이때, 횡을 그린 폰의 창이 크라우젤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크라우젤이 꺼내 든 방패에 가로막혔다.

[방어 성공!]

[받는 데미지가 경감됩니다.]

[1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방패의 내구도가 1 떨어집니다.]

전사 전용 아이템, 방패.

크라우젤이 ‘지하 사냥’에서 얻은 물건 중 하나다. 적의 공격을 막을 수만 있다면 성능은 확실했지만, 방어할 때마다 내구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심지어 총 내구도가 10밖에 안 됐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방패의 내구도가 손실된 것에 조금도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상대가 상대였기 때문이다. 폰과 라우엘 듀오의 실력은 훌륭했고, 크라우젤은 그들에게 방패를 사용하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덥석!

방패에 막혀 멈춘 폰의 창을 크라우젤이 힘껏 쥐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면서 발생하는 탄력을 이용해 폰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푹!

푹푹푹!

단도의 장점을 극대화한 공격!

라우엘을 찔렀던 장검을 회수하지 않는다 싶더니 크라우젤의 손에는 이미 작은 단도가 들려 있었다. 그에 연신 복부를 찔리는 폰에게 2씩의 데미지가 빠르게 누적됐다.

“제길...!”

아주 잠시, 그래,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였다. 라우엘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은. 한데 그 찰나에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라우엘은 소름이 돋았다.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폰을 돕고자 달려갔지만, 크라우젤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채 연신 복부를 찔린 폰은 이미 창틀까지 밀려나 있었다.

퍽!

창문 바깥으로 상반신이 기울어진 폰의 발목을 크라우젤이 걷어차자 균형을 잃은 폰이 창밖으로 떨어진다.

“폰 님! 큭!”

이 소름 돋게 현실적인 전투 방법은 뭐지?

홀로 남은 라우엘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내구력이 다한 단도를 버린 크라우젤은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장검을 꺼내고 있었다. 지하 사냥에서 많은 무기를 확보해 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이곳이 조금만 더 넓었어도 폰에게 더 유리했겠지. 하지만 보다시피 건물 내부다. 처음부터 그쪽에 승산은 적었어.”

“이...!”

진짜 괴물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뻔했다.

간신히 입을 틀어막은 라우엘이 창밖을 보았다. 빨랫줄을 타고 넘어오는 아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또한,

피잉!

크라우젤을 노리고 쏘아지는 화살도 보았다. 이쪽의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하자 궁수들이 원호를 개시한 것이다.

라우엘의 판단은 빨랐다. 놀랍게도 그는 크라우젤이 아닌 지슈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지슈카가 아군 궁사들을 견제하지 못하게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탓에 크라우젤은 화살 비에 휩싸였고, 적들은 빨랫줄을 무사히 건너 창틀 가까이 도달해 버렸다.

서걱!

화살을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크라우젤.

방패로 화살을 막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내구력이 다한 방패를 버리고 그냥 화살을 맞아 줬다.

물약을 복용하면서 창틀에 매달리는 적들을 베었다. 하지만 물약은 방패보다도 한정적인 아이템인 바, 크라우젤은 언제까지고 화살에 맞아 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4명의 적밖에 추락시키지 못했고 나머지 6명의 적들은 건물 내부에 진입을 성공했다.

“라우엘! 이 나쁜 자식아!”

역습의 때만 기다리다가 라우엘에게 봉변을 당한 지슈카가 소리친다.

그녀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철선으로 반격하는 라우엘은 당당했다.

“배틀 필드는 훌륭한 훈련의 장입니다. 오늘의 전투로 인해서 우리 템빨단은 크게 성장할 테죠. 당신이 오늘 겪는 시련, 성장통쯤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훈련의 장은 개뿔! 다구리의 장이겠지! 이 치사한 새끼야!”

“...그리드 전하의 영향인가요? 한국식 비속어를 엄청 잘 사용하시네요. 하긴 뭐, 후로이 님의 욕설을 배워서 따라하는 것보다야 백 배 낫겠지만.”

라우엘은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의욕을 상실한 지슈카의 저항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좁은 장소에서 포위당한 크라우젤 또한 함부로 날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승기를 잡았어.’

미소 짓는 라우엘의 시야에 크라우젤과 호각으로 검술을 겨루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온다. 영혼 약탈자 수에론이었다.

“너 이 새끼! 아까는 잘도 나를 추락시켰겠다!”

채챙! 챙챙챙!

수에론의 검을 막아 내는 크라우젤의 기세가 빠르게 약해진다. 이미 그는 크게 지친 상태였으니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단둘이서 20여 명의 적을 막아 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심지어 적들이 어디 보통내기들인가? 대부분 통합 랭킹 100위권 이내의 최상위권 랭커들이다. 어딜 가나 최고라는 소리를 들어도 손색없을 거물들이었다.

‘미안해, 그리드.’

크라우젤이 상처 입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지슈카는 패배를 직감했다.

매번 그리드에게 도움만 받고, 정작 도움은 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누구보다 실망한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뼈아픈 좌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러다 문득,

“크아아악!”

“이 징한 놈...!”

적들의 비명 소리를 듣게 된 지슈카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크라우젤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적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이제 남은 생명력이 한 자릿수에 불과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그는 집중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건너편 건물에서 계속 날아오는 화살을 흘리며 자신을 둘러싼 6명의 최강자들에게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섰다. 자신의 몸에 상처가 하나 생길 때마다 적의 몸에는 상처를 두 개, 세 개씩 새겨 놓았다.

‘나도....!’

지슈카의 마음이 다잡아진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크라우젤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녀가 한 단계 발전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콰작!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그래, 침입자들이 그토록 열고 싶어 했던 문. 또한 그리드가 지키고 있던 문이다.

“그리드...!”

지슈카와 크라우젤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한다. 그들 모두 그리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다. 그리드는 홀로 10명이 넘는 적과 맞서 싸우지 않았던가?

그가 적들을 모조리 격퇴하고 돌아오는 일. 실현되지 않을 판타지와 같았다.

역시나,

“....개판이군.”

문을 열고 들어온 주인공은 그리드가 아니었다. 대검으로 무장한 거구의 사내였다.

“크리스 님!”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라우엘이 반갑게 소리치자,

‘그리드가 당한 거야?’

‘감당하기 힘들었나 보군.’

지슈카와 크라우젤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탈락했다고 생각했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경전으로 생명력을 회복하면 뭐하는가? 그가 적에게 입힐 수 있는 데미지는 고작 1.... 그런 위협적이지 못한 공격으로 10명 이상의 최강자들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지슈카의 얼굴에 암운이 깃들고, 크라우젤이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그때,

“그럼.... 무운을 빌지.... 쿨럭!”

문을 열고 등장했던 크리스가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잿빛으로 산화했다.

그리고,

“아오, 너희들 뭔데? 왜 이렇게 늦어?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기에 나 혼자서 다 해치워 버렸잖아. 어휴, 빡세.”

흩어지는 잿빛 너머로 그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派).”

초승달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섬광이 적 다수를 동시에 베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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