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591화 (586/1,794)

최소 10권의 경전.

단순 계산법으로 그리드의 생명력은 최소 100이라는 뜻이 되었다. 여기에 2개의 포션을 더 보유했을 경우, 그리드는 거의 6명 몫만큼의 목숨을 가진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성직자다.

철컥!

인벤토리를 연 이벨린이 <마법 지팡이>를 꺼내서 무장했다. 데미지 3짜리의 지존 무기였다.

“헐.”

“헉.”

“저걸 어디서 구했지?”

그리드는 물론이고 이벨린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는 다른 경쟁자들까지 화들짝 놀랐다. 배틀 필드 최강의 무기인 마법 지팡이를 그들은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지팡이에 맴도는 마력을 조명 삼은 이벨린이 밝게 웃었다.

“게임은 템빨 아니겠습니까?”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삐질, 그리드는 식은 땀을 흘렸다.

누가 봐도 기세가 한껏 죽은 티가 났다.

그를 적대하고 있는 동맹 세력은 물론이고 시청자들 모두가 그리드가 위축된 것으로 보았다.

이벨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리드의 실력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는 사실, 이벨린은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바로 곁에서 그리드의 성장을 지켜봐 왔으니까.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신비의 숲에서, 파그마의 도플갱어와 83회를 싸운 끝에 결국 승리를 쟁취하였던 그리드의 모습을.

‘형에게는 잠시라도 틈을 주면 안 돼!’

초장부터 멘탈을 부셔놔야 한다.

눈앞의 그리드라는 ‘괴물’은 장기전으로 갈수록 기세가 도리어 오르는 기형이다.

판단한 이벨린이 휘두른 마법 지팡이가.

쩌어어어엉-!

계단의 난간을 일격에 부숴 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가 기대어 서있던 난간이었다.

“....와우.”

간신히 공격을 회피한 그리드가 넋 나간 표정을 짓는다. 지팡의 위력에 새삼 감탄한 것이다.

그를 보는 사람들이 생각했다.

‘확실히 위축됐군.’

지팡이에 한 대라도 맞아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조금 전, 이벨린의 공격을 회피하던 그리드의 움직임과 표정에서는 눈곱만큼의 여유도 엿볼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문 그는 진짜 온 힘을 다해서 아슬아슬하게 지팡이를 피해냈다. 그의 두 눈은 오로지 지팡이만 쫓고 있었다. 온 신경이 지팡이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이 기회다!’

여유를 잃은 그리드가 이벨린의 지팡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

다른 랭커들은 절호의 기회를 엿보았다. 이벨린이 재차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이 자신들의 협공 타이밍임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그리고.

부우웅-!

그리드에게 따라붙은 이벨린의 손끝에서 마법 지팡이가 커다란 원을 그렸다.

‘지금이다!’

랭커들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선 3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좁은 계단을 뛰어올라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무기를 휘두른 지점은 그리드가 지팡이를 피하고자 움직인 방향이었다.

‘완벽해!’

랭커들의 머릿속에 이와 같은 확신이 스쳐 지나갔으나.

“안 돼....!”

이벨린은 역으로 위기를 엿봤다.

자신의 2번째 공격이 빗나간 순간부터 그는 눈치챈 것이다.

그리드가 호들갑 떠는 겉모습과 달리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완벽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여유까지 넘쳤다.

이벨린의 공격 궤도를 끝까지 눈으로 쫓고 반응하는 모습이 그 증거다.

하지만 그리드와 직접적으로 겨루고 있던 이벨린조차도 2합 째에서야 그 사실을 눈치챈 바, 다른 랭커들은 그리드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놀아나는 거다.

씨익!

자신의 회피 지점으로 날아오는 3자루의 검을 목도한 그리드가 미소 짓는다. 그가 이벨린의 공격을 회피할 때 사용한 동작에는 이미 회(回)의 묘리가 실려 있었다.

스르륵!

“?!”

그리드를 공격하던 3인방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진다. 그리드가 마치 등 뒤에도 눈에 달려 있다는 듯이 반응하여 회전, 자신들의 3회 공격 중 2회를 피해 버린 까닭이었다.

터엉-!!

5명이 서기에는 너무나도 비좁은 층계참.

회전하면서 3인방에게 얽혀 든 그리드가 어깨에 체중을 싣고 그들을 밀어버린다.

“어? 어어.”

뒤뚱뒤뚱.

밀집한 채 불안전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3인방이 떠밀려서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쳤다.

‘어라?’

3인방의 등골이 오싹해진다.

자신들의 발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느낀 까닭이다.

그렇다.

그들은 하필이면 앞서 이벨린이 부셨던 난간쪽으로 떠밀렸다.

결과는.

“끄아아아아아아!!”

콰작!

우당탕탕탕탕!!

낙하다.

하필이면 4층으로 향하는 층계참에서 1층까지 다이렉트로 추락해버린 그들 3인방은 각자 10의 데미지를 입고 말았다. 물약 하나로도 극복 안 되는 치명상이다.

그리드가 넋 나간 적들에게 말했다.

“방심은 금물. 기본 아닌가?”

마치 겁먹은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던 그리드의 눈빛, 조금 전과 판이하다. 사냥감을 마주하고 있는 맹금류의 눈처럼 번뜩인다.

이벨린을 비롯한 템빨단원들, 저 눈을 잘 알고 있다.

우리들 왕의 눈이다.

꿀꺽!

여기가 배틀 필드인지, Satisfy인지 모르겠다.

일시적인 착란에 휩싸여 잔뜩 겁먹은 이벨린이 뒷걸음쳤다. 손에 들린 마법 지팡이가 아까운 태도였다.

그에게 그리드가 망설임없이 검을 찌르는 순간이었다.

터어어엉-!!

대검이 날아왔다.

날의 하단 부분으로 그리드의 검을 차단하더니 끼기긱, 그리드의 검을 축으로 삼아서 살짝 기울어진다.

그러자.

서걱!

그리드는 대검 날의 상단 부분에 목덜미를 베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검의 주인은 자연스럽게 회전 이동, 그리드의 후위를 장악하고 섰다.

츠카카카칵!!

베기가 떨어진다.

등을 크게 베인 그리드가 황급히 물러섰다. 위쪽의 계단으로 피신했다.

4층으로 향하는 층계참이 침략자들에게 점거당하는 순간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고지를 점령당한 그리드가 쓰게 웃었다.

“이거야 원, 너무 거물이잖아?”

대검의 주인.

“그래봤자 너와 크라우젤 앞에서는 초라할 뿐이지.”

“아니.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통합랭킹 1위 크리스였다.

그리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오, 크라우젤 있는 쪽으로 갈 것이지.’

크리스의 공방일체 대검술은 독보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그 실력을 전 세계가 인정하였고 그리드 또한 볼 때마다 감탄해왔다. 그리드가 대검이라는 무기에 욕심을 버렸던 계기 중 하나가 바로 크리스였을 정도다.

왜?

크리스가 존재하는 한, 자신은 대검의 상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음....’

힐끗, 배틀 필드의 남은 시간을 확인한 그리드가 눈앞 적들의 숫자를 정확히 세어보았다.

크리스를 포함해 13명이다.

그리드의 목표가 대폭 수정됐다.

‘전멸은 못 시키겠네.’

이렇게 된 이상.

‘애들 올 때까지 버텨야지.’

그렇다.

본래 그리드의 목적은 이곳의 모든 적들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단신으로,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하이랭커들을 말이다.

오만?

아니, 확실한 근거에 의거한 현실적인 판단이다.

하오를 쓰러뜨린 시점부터 그리드는 평범한 하이랭커들과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는 지존이다.

‘뭐, 이름값들은 하겠지.’

무려 천외천과 신궁이다.

그들이라면 후방으로 침입해올 적들을 모조리 차단한 후 자신을 도우러 올 거라고, 그리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 한 권 째.”

쏴아아아아아아--

한 권의 경전을 펼치는 그리드의 몸이 녹빛에 휩싸인다. 조금 전 입었던 상처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면서 생명력이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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