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5권 - 20화
“너와 내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있겠느냐?”
“....?”
뭐지, 이 자신감은?
그리드는 자신의 팀에 합류하겠다는 남성에게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사내가 떠올랐지만.
‘아니, 그럴 리가.’
그리드는 부정했다. 자신이 떠올린 그 사내는 아이템 제작 유혹에 넘어올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팀 먹는 꼴을 잠자코 보고 있을 것 같아?”
다른 참가자들이 그리드 일행을 덮쳐오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드 일행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3인 1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저들 셋이 손잡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야한다고 판단했다.
핑-!
피핑!!
우선 화살이 쇄도했다.
곳곳에서 쏘아진 4발의 화살이 그리드와 지슈카, 그리고 그들의 앞에 선 사내를 표적으로 삼고 날아왔다.
“칫!”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괜히 나섰다가 어그로를 더 끈 기분이다.
혀를 찬 그리드가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 한 발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0.5초만 반응이 늦었어도 화살에 꿰뚫렸을 것이었다.
한편 지슈카의 팔뚝에는 화살이 꽂히고 있었다. 그녀는 그리드와 달리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또한.
채챙-!
“....!!”
정체불명의 사내는 자신에게 날아든 화살 2발을 모조리 검으로 쳐냈다.
그리드, 지슈카를 포함한 생존자 전원을 경탄시키는 컨트롤 솜씨였다.
“너....!”
그리드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팀에 들어오고 싶다한 사내의 정체를 말이다.
“크라우젤이냐...?”
“맞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래, 천외천이었다.
충만한 자신감과 자신감의 근원이 되는 실력을 겸비한 인물!
황당해하는 그리드에게 크라우젤이 반문한다.
“내가 왜 여기서 나오냐고? 그럼 내가 진즉에 탈락했을 줄 알았나?”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아이템 만들어 준다니까 좋다고 넙죽 달려오는 행동이 너하고는 안 어울린다 이거지.”
“고상이라도 떨었어야 하나? 체통을 지킨답시고 천금 같은 기회를 등질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다.”
“어이구, 그러세요? 역시 천외천 님답게 대단하십니다?”
그리드의 크라우젤에 대한 경쟁의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적들이 쇄도해오고 있는 상황에 눈 하나 깜짝 않고 초연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가 조금은 얄미웠다. 나는 이토록 똥줄 타고 있는데, 저 녀석은 뭐가 저리도 여유가 넘친단 말인가?
투덜거리며, 크라우젤에게 얄밉게 지껄이던 그리드가.
“큭!”
새롭게 날아온 화살에 옆구리를 찔리고 말았다.
2의 데미지를 입고 눈살을 찌푸린 그가 지슈카에게 소리쳤다.
“우선 가까운 건물 안으로 피신하자!”
“응!”
그리드와 지슈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바로 등지고 서있던 건물 안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갔다.
반면 크라우젤은 제자리에 멀뚱멀뚱 서있었다.
그의 등 뒤로 개떼처럼 몰려드는 20여 명의 적들이 보였다.
그에게 그리드가 다급히 외쳤다.
“어서 안 오고 뭐해!!”
“팀원으로 받아주는 건가?”
“뭐....!”
여태까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이 급박한 상황에서?
“복장 터지는 놈일세...! 야! 네가 내민 손을 내가 붙잡지 않을 리 없잖아? 어서 이리 오라고!”
그제야.
“....그렇군.”
저벅.
크라우젤이 걸음을 뗐다.
하지만 이미 늦어도 단단히 늦었다.
그의 바로 지척까지 4명의 적이 근접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합류하는 꼴을 볼 것 같아?”
최후의 승자는 단 3명뿐!
배틀 필드의 참가자들에게는 다른 경쟁자를 탈락시켜야할 의무가 있었고, 탈락시킬 대상으로 비교적 약한 사냥감을 고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단 2명뿐인 그리드 일행과, 아직 그들에게 합류하지 못한 정체불명의 사내 1인.
이들이 모두의 공통 된 첫 표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하지만.
스칵-!
츠카카카칵!!
“컥....!”
“뭐...라고?”
고독한 범 1마리가 100마리의 들개무리보다 강한 법.
숫자는 힘의 척도가 될 수 없다.
크라우젤은 자신에게 무기를 휘두른 4명의 공격을 피해버림과 동시에 반격했고, 각자 2의 데미지를 입은 4명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깨달은 것이다.
홀로 선 사내의 정체가 무엇인지.
“천외천....!”
“미친....!”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무서운 기세로 그리드 일행을 쫓아오던 참가자들 전원이 거짓말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최상위권 하이 랭커들이 단 1인에게 압도당하여 석상처럼 굳는 모습....
이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시청자들의 충격이 무척 컸다.
-차원이.... 다른 건가?
크라우젤은 홀로 서있었다.
그리드와 지슈카가 입장한 건물을 등지고 선 채 다른 수십 명의 경쟁자들을 마주봤다.
하지만 그건 등불 앞의 나방처럼 위태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다리 풀린 들개 무리를 굽어보는 범의 태세였다.
그 누구도 크라우젤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이미 승자는 크라우젤로 정해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크라우젤 님! 너무 반갑네요!”
들개 무리 속에서 한 사내가 달려 나왔다. 그 또한 범이었다. 그가 들개들 사이에서 숨기고 있던 발톱을 꺼낸다.
“당신과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실력을 겨뤄볼 수 있다니, 이토록 기쁘고 흥분되는 경험은 처음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외치는 사내.
그는 템빨단 최상위 실력자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랭커 레가스였다.
성격을 토대로 그의 정체를 눈치 챈 크라우젤이 피식 웃었다.
“동등한 입장 같진 않은데요.”
레가스와 함께하고 있는 무리들을 말함이다.
저벅.
크라우젤이 한 걸음.
저벅.
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그는 그리드와 지슈카가 먼저 입장했던 건물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저와 싸우고 싶은 게 진심이라면, 어디 쫓아와 보시죠.”
레가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크라우젤이다.
도발적으로 말한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레가스가 뒤를 쫓지 않을 리 만무했다.
“당연히 진심이죠!!”
“잠깐! 기다리십시오!!”
라우엘이 소리쳐서 말려봤지만 소용없었다. 레가스의 눈에는 이미 크라우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벌써 건물 안으로 입장해버렸다.
“제길...! 저 싸움 바보 같으니라고!! 어서 쫓아가죠!!”
학을 뗀 라우엘이 폰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하는 순간이었다.
푹-!
푸푹!!
상공에서부터 쏘아진 화살이 라우엘과 폰의 어깨에 꽂혔다.
시야의 사각을 노리고 쏘아진 화살이었다.
라우엘과 폰이 동시에 한 인물을 떠올렸다.
“지슈카?”
번뜩 고개를 드는 두 사내.
그들의 시야에.
“안녕~ 반가워, 애들아.”
창가에 걸터앉은 채 활 시위를 당기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들어온다.
아까 전, 그리드의 곁에 서있던 여성이었다.
‘망했다!’
라우엘과 폰은 직감했고.
“대가리 깨지고 싶은 사람부터 손 들어봐.”
황당한 멘트를 날린 지슈카는 속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부분 템빨단원인 그들 또한 지슈카를 한 눈에 알아보고 있었다.
떨어지는 화살비를 피해 건물 외벽에 바짝 붙은 그들이 의견을 교환했다.
“제길, 하필이면 지슈카가 명당을 확보하다니.”
“우리가 너무 안일했어. 저 마녀의 시야에서 어서 벗어나야 돼.”
“아니, 차라리 아까 그 싸움 바보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협력할 수밖에 없잖아?”
무려 그리드, 지슈카, 크라우젤 3인 파티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냥 최고의 파티라고 보면 됐다.
협력하지 않는 이상 그들을 막을 방도가 도통 없어보였다.
“우선 힘을 합쳐서 저 셋을 해치우고, 우리끼리는 그 다음에 경쟁하도록 하자고. 어때?”
“대놓고 동맹 맺는 거는 너무 치사한 거 아닐까? 시청자들이 비난하면 어떡해?”
누군가는 우려를 표명했다.
아무래도 각국을 대표하는 랭커들답게 본인 이미지에 굉장히 신경들을 쓰고 있었다.
망설이는 그들에게 누군가가 일침을 날렸다.
“치사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 아니냐? 저 셋이 함께인 것부터가 반칙이라고?”
“....듣고 보니 그렇네.”
“아무도 우리 욕 안 할 듯.”
“좋아! 그럼 어서 우리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옆 건물로도 이동해! 빨랫줄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
크라우젤과 그리드가 계단을 지키고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
협공을 취하기 힘든 구도가 되어서 분명히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저쪽은 숫자가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적다.
‘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력이 한계를 맞이할 테고 결국 무릎 꿇게 될 거다.’
자신만만!
기세등등!
회심의 미소를 그린 참가자들이 팀 단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투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드 일행이 있는 건물 안으로 직행했고, 활과 화살이 있는 사람들은 옆 건물로 이동해서 저격 포인트를 확보했다. 창문을 이용해서 그리드 일행을 저격, 아군에게 힘을 보탤 요량이었다.
또 몇 명은 빨랫줄을 이용해서 잠입할 계획을 짰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손에 땀 쥔 채 지켜보던 시청자들이 문득 깨달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대회의 취지가 많이 변질 됐네....
-.....
배틀 필드는 더 이상 배틀 필드가 아니었다.
그리드 일당을 잡아라! 라는 내용의 게임이 되어버렸다.
해설진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약자를 규합시키는 건 강자의 숙명이죠.』
『그리드와 크라우젤, 그리고 지슈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가 관건이네요.』
『저 셋이 아무리 대단해도 다른 이들 또한 하나 같이 쟁쟁한 실력자들입니다. 저들 모두 잠시 크라우젤에게 위축되었었다고는 하나, 지금 레가스를 보십시오. 정작 싸우면 잘 싸우지 않습니까? 혼자서 크라우젤과 호각을 이루고 있네요.』
『너무 강한 멤버가 모인 게 오히려 역효과였으려나요? 그리드 일행이 의외로 가장 먼저 탈락할... 헉?』
전개를 예상하던 해설진이 황급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몇 마디 떠드는 사이에 레가스가 치명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 내내 그토록 강해보였던 레가스가 크라우젤에게는 확실히 한 수 아래였다.
처음에는 접전을 펼치는가 싶더니 이내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렇게 강한 겁니까?”
상처투성이의 레가스.
좁은 층계참에서 크라우젤과 얽힌 채 싸우던 그가 패배를 직감한다.
크라우젤은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정녕 내게 이기고 싶었던 게 맞나?’
크라우젤이 이와 같은 의문을 느끼는 이유.
레가스가 맨손으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레가스는 무기도 없이 크라우젤을 상대하고 있었다.
뼛속까지 무도가였기 때문이다.
전사 직업을 선택해서 맨손 데미지 1을 확보한 그는 무기가 없을 때야말로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배틀 필드 내내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웠다. 물론 크라우젤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
템빨단원들, 정말이지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크라우젤이 레가스에게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큭...! 과연 천외천!”
감탄하며 잿빛으로 산화하는 레가스!
배틀 필드가 진행되는 내내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워온 그에게 시청자들이 경외와 애도를 보낸다.
그리고 크라우젤은 다음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10여 명의 적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의외로 생명력을 많이 잃었어.’
레가스의 주먹과 발차기에 총 5회의 타격을 허용한 크라우젤이었다.
최상위권 실력자들의 솜씨를 무시해선 안 된다고 판단한 그가 경각심을 품고 검을 고쳐 쥐는 그때였다.
“여긴 내게 맡기고 너는 가서 지슈카를 지켜줘.”
“그리드, 너....”
크라우젤이 할 말을 잃었다.
뒤늦게 나타난 그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