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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87화 (582/1,794)

템빨 35권 - 19화

배틀 필드 종료 28분 전.

벌써 수차례의 맵 소멸을 겪은 배틀 필드에 남은 구역은 이제 <트리온>밖에 없었다.

트리온은 6층짜리 건물 5채와 1층짜리 민가 40여 채가 밀집된 작은 마을이다. 골목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박스와 드럼통, 중앙 광장의 대형 분수대와 대로변의 가로수 등이 엄폐물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변수를 창출할 듯하다. 6층짜리 건물들 사이에 엮여 있는 빨랫줄들이 유난히 두껍고 튼튼해 보이는 것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고.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트리온에 강제 이동한 그리드는 판단했다.

‘승산이 적겠어.’

왜?

그리드는 지슈카와 단둘이 팀을 맺은 반면, 그 외의 생존자들은 최소 3명 이상씩 팀을 맺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5명이 한 팀인 경우도 있었다.

‘여기 남은 자들 대부분이 하이 랭커일 거다.’

크라우젤, 크리스, 폰 등의 복병을 감안해 봤을 때, 그리드는 실력적으로 자신이 우위라는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수적 열세는 엄청 큰 부담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좁아진 맵이었다.

‘저격 포인트를 찾기가 어려워.’

그리드는 성직자다. 딜러 역할은 전사인 지슈카가 수행해야 했다. 그녀는 현재 총 136발의 화살을 확보한 상태. 이론적으로는 충분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활이라는 무기는 일정 거리를 확보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이곳에서 지슈카가 활약하려면... 결국 고층 건물 내부로 진입해야 하는데....’

건물에 진입하는 일이야 당연히 쉬울 것이다. 하지만 지슈카가 고층에 자리 잡고 저격을 개시하는 순간, 다른 경쟁자들의 어그로가 그녀에게 집중될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내가 계단을 지키고 서서 지슈카가 딜링할 시간을 벌어 준다고 쳐도.’

건물 사이사이의 빨랫줄들이 거슬린다. 옆 건물에서 빨랫줄을 타고 이동해서 잠입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다. 그들까지 동시에 견제한다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애초에 계단이나 무사히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다가 지슈카의 궁술을 십분 발휘할 수 없는 환경....

결국에는 소극적인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흐름을 잘 살피면서 사려야겠는데...’

그조차도 힘들 듯하다.

이미 다른 경쟁자들은 그리드와 지슈카를 주목하고 있었다. 단둘이라는 점 때문이다. 비교적 손쉬운 사냥감으로 낙인찍혀 버린 이상 사리고 싶다고 사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강상태가 끝나는 즉시 그리드와 지슈카는 이미 쫓기고 있을 운명이었다.

‘제기랄, 치사한 놈들. 왜 쪽수로 몰아붙이고 난리야?’

이제 그리드는 카메라에 익숙하다. 사회에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 충분한 자각을 갖췄다. 그래서 겉으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속으로만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귓가로 지슈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과연... 끝까지 살아남은 실력자들답게 다들 팀을 꾸렸구나. 쉽지 않겠네.”

“실력?”

실력자들답게 팀을 꾸렸다는 말은 즉, 팀을 꾸린 게 실력이라는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해석할 수 있... 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이내 깨달았다.

‘맞다, 실력이야.’

배틀 필드에서 개인전은 ‘규칙’이 아니었다. 단지 처음 시작이 혼자일 뿐, 팀을 맺으면 안 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리드 또한 지슈카와 팀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팀은 아무나 맺을 수 없어.’

경쟁자를 동료로 회유하는 일이 어디 쉬울까?

특출한 유능함을 증명하거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 인물이 아닌 이상, 이곳 배틀 필드에서 팀을 꾸린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실력이 없는 자는 팀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를 인지한 순간, 그리드는 개벽을 맞이했다.

‘나의 실력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수단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했던 거야. 단지 전투 능력을 과시하는 것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었어.’

증명.

그렇다.

그리드는 배틀 필드를 증명의 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남들과 똑같은 상황에서 진행해야 하는 게임.

그리드는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남음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템빨이나 직업빨이 부각되지 않고 순수한 실력만으로 랭커가 된 ‘진짜배기 실력자’들. 그리드는 그들과 자신이 사람들에게 동등한 존재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여기서 말하는 실력을 ‘전투 능력’ 하나로 국한시켜 왔다. 더 나은 컨트롤 솜씨를 보여 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아니었다. 랭커의 실력을 논할 때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투 능력 하나가 아니었다. 훨씬 더 다양했다.

‘보여 주자.’

그리드의 실력을.

내가 어째서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는지, 세상 사람 모두에게 보여 주자.

씨익!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해답을 찾은 그가 거침없이 소리쳤다.

“다들 들어라!! 항복해! 지금부터 항복하는 사람한테는 내가 아이템 만들어 준다!!”

“....?”

긴장감이 감돌던 트리온에 어색한 침묵이 깃들었다. 날카로운 기세로 서로를 탐색하던 생존자들이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지?’

‘미친놈인가?’

“나, 템빨왕이야.”

혼란 속에서 그리드가 정체를 밝혔다. 자신이 바로 전설의 대장장이임을 알렸다.

일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바로 이것이 그리드가 세상에 알리는 자신의 ‘순수한 실력’이었고 ‘유능’의 증명이었다.

“흔치 않은 기회다. 망설이지 말고 항복하는 편이 좋을 걸?”

그리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적을 거라고.

실제로 그랬다.

생존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드라고?’

‘저 치사한 자식, 이기고 싶어서 별의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하지만 생각해 봐. 불확실한 승리에 목매다가 결국에 실패하고 모든 것을 잃느니, 차라리 순순히 항복하고 아이템을 얻는 편이 훨씬 더 이득 아니야?’

‘하긴 그렇지. 그리드가 제작해 주는 아이템이 어디 보통 아이템이야? 레전드리 등급까지 뜨잖아?’

‘심지어 성장형 아이템도 만들 수 있어.’

꿀꺽!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 생존자들이 깨닫기 시작한다.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다.

『.....』

해설진이 침묵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생존자들의 분위기를 보아, 아무래도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항복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들이 항복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는 적었다.

『어찌 이런 허무한 결과가....』

한 명의 해설자가 침묵을 깼다.

치열하고 멋진 최후의 승부를 중계하고 싶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그리드의 수작이 곱게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비난할 수가 없었다.

그리드가 생존자들에게 갈등을 안겨준 저 방법은 결코 치사한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감탄밖에 안 나오는 책략이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아쉬운 전개입니다만....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리드는 참으로 현명한 인물입니다. 정녕 뛰어난 지략가로군요.』

『동의합니다. 설마 아이템 제작 능력을 이용해서 생존자들을 회유하는 책략을 구사할 줄이야. 저로써는 상상도 못한 필승의 전략이네요.』

현재 생존자들이 진행하고 있는 게임은 배틀 필드다. 여기에 Satisfy를 개입시키는 건 반칙 아닌가?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적었다.

생존자들은 결국 Satisfy 플레이어들이었고, 애초에 그들이 배틀 필드에 참가한 이유는 Satisfy 때문이었으니까.

그리드가 Satisfy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생존자들을 회유하는 방법,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다만.

-그리드 말고는 아무도 저런 방법 안 썼잖아....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거지. 그리드가 아니면 그 누가 어떤 방법으로 다른 생존자들을 회유하겠어?

-그것도 그렇네.

-진짜 대단하다. 싸우지도 않고 이길 각이네.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그리드의 재치는 정말 대단해. 그렇다고 무력이 딸려? 그것도 아니야. 그는 하오마저 꺾었어. 지력과 무력을 완벽하게 겸비한 거야. 하이 랭커 중에서도 특출해.

-거기에 플러스알파로 덕망까지 갖췄으니까 최초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여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리드와 실제의 그리드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거라고 봐.

-맞아. 우리는 그의 모습을 몇 개의 영상이나 대회를 통해서 단편적으로 엿보는 게 고작이니까. 만약 그를 곁에서 지켜본다면....

-...반하고 말 것 같아. 그리고 정신 차리고 보면 템빨단원이 되어 있겠지. 템빨단원들이 어째서 그토록 그리드에게 충성하는지 잘 알겠어.

-교황 데미안이 그리드를 좋아하는 이유도 말이지?

찬사가 이어졌다.

그리드는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가치를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방법을 말이다.

이제.

-그리드 무시하는 병신은 더 이상 없을 듯.

그리드는 완연한 존재로 거듭났다.

그리드가 그토록 선망해 왔던 크라우젤처럼.

***

“자, 다들 어쩔래?”

바깥 상황을 모른 채, 현재 자신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는 그리드였다.

그는 자신과 지슈카를 제외한 30명의 생존자 중에서 과연 몇 명의 인물이 항복을 선택할지 기대 중이었다.

‘어쩌면 전부 다 항복하지 않을까?’

그리드는 자신의 제작 아이템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각종 거래와 외교의 수단으로써 자신의 제작 아이템을 이용해 온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통할 거라고 믿었다. 생존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아이템을 탐내며 항복을 선택할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리드와 지슈카를 제외한 30명의 생존자 중에서 무려 14명이 템빨단원이라는 점이었다. 템빨단원들은 굳이 여기서 항복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그리드의 제작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그리드가 간과한 부분이다. 아직 지능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공은 공이오, 사는 사이니.

그리드가 승리를 열망하고 있듯이, 템빨단원들 또한 승리를 열망하는 바.

“저 그리드는 가짜입니다!”

라우엘이 소리쳤다.

“저자에게는 자신이 그리드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단이 없어요! 괜히 현혹당하지 맙시다!!”

그리드를 사랑한다. 평생의 동반자가 되고 싶다.

라우엘의 진실된 마음이다.

라우엘은 그리드가 정말로 좋았다. 그렇기에 벌써 수년 째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한다.

그리드를 좋아하니까 순순히 승리를 양보하겠다, 라는 안일한 생각 따위 라우엘은 추호도 않았다.

그 또한 승리하고 싶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국민에 대한 예의였으니까.

비단 라우엘 뿐만이 아니다.

다른 템빨단원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맞다! 저자는 그리드가 아니다!!”

“그리드가 저럴 리 없다고!!”

“뭐....!”

갑자기 시작되는 물 타기!

예상치 못한 전개에 그리드가 당황하였고, 그리드의 제안에 현혹되었던 생존자들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맞아. 그리드를 사칭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네. 자칫 실수할 뻔했어.”

“애초에, 그리드가 우리에게 아이템을 ‘공짜’로 만들어 주면서까지 승리를 원할 리 있겠어?”

“아니, 난 공짜로 만들어 준다는 말은 안 했는....”

“저자는 그리드가 아니다!!”

“아니다!!”

“아오!!”

그리드에게 발언의 기회는 없었다.

그리드가 뭐라고 말만 하려고 하면 템빨단원들이 계속해서 물 타기를 시전했기 때문이다.

지슈카가 쿡쿡 웃었다.

“역시, 우리 애들은 봐주는 게 없네.”

“맞지? 쟤들 템빨단이지?”

“응, 딱 봐도 그렇잖아.”

“에라 이 웬수 같은 놈들!”

짜증스럽게 외치는 그리드였으나,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신의 입장에서 저마다 최선을 다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래, 너희들이 그토록 바란다면 어디 한번 끝까지 싸워 보자.’

너희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정정당당하게 싸워 주겠다.

그리드가 각오를 다지는 그때였다.

“항복은 싫고... 너의 팀에 들어가고 싶다만. 그 대가로 아이템을 제작해 줄 수 있나?”

“....?”

마치 시장 한복판처럼 북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혼자였다.

다른 생존자들과 달리 팀이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사내에게 꽂힌다.

주목받는 일에 익숙한 듯, 사내는 그리드에게 한 걸음, 두 걸음 초연하게 다가서고 있었다.

“너희들은 마침 2명이니까 내가 합류하더라도 문제없겠지?”

이내 그리드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

그에게 그리드가 묻는다.

“괜찮겠어? 아무래도 방금 소란 때문에 어그로를 잔뜩 끈 것 같거든. 우리랑 팀 먹었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사내가 코웃음 쳤다.

“너와 내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있겠느냐?”

“....?”

뭐야, 이 자신감은?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때.

-미친... 미쳤다.... 완전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옴....

-진짜ㅋㅋㅋㅋ 상상도 못한 전개다ㅋㅋㅋㅋ

-저거 완전 드림 팀 아님?

시청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커뮤니티 사이트가 지구 멸망 소식이라도 접한 듯이 들끓었다.

해설진이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크, 크라우젤이....! 검성 크라우젤이 템빨왕 그리드에게 합류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렇다.

유일하게 그리드의 아이템 제작 꾐에 넘어간 인물, 다름 아닌 천외천이었다. 인간의 규격을 넘어선 최강의 지존 말이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리드의 어안이 벙벙해졌고, 세상 사람들은 직감했다.

배틀 필드.

이제 곧 끝임을.

최후의 3인은 이미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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