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5권 - 18화
“나라는 걸 어떻게 안 거야?”
가면 너머 지슈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그녀는 그리드가 자신을 한눈에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넘어서는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타고난 미모로도, 능력으로 쌓아올린 재력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던 행복이다.
“그야 가....”
“가?”
“....가까이서 보니까 알겠더라고. 우리가 몇 년을 함께 지냈는데 몰라보겠냐?”
순전히 가슴 때문에 알아봤다, 라고 솔직히 대답했다가는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고 염려한 그리드였다.
에둘러 말하는 그의 낌새는 누가 봐도 수상했지만, 지슈카는 그저 좋아서 헤헤 웃었다.
“얼굴을 가렸어도, 목소리가 바뀌었어도 알아볼 수 있다 이거지...? 후훗.”
“응...? 나 스토커 아니다? 괜히 오해해서 고소하지 마?”
“재미있기는.”
“.....”
지슈카의 기분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걱정만하는 그리드였다.
벌써 3년 연속으로 ‘남성이라면 매료될 수밖에 없는 여성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가정을 붙일 수 없기에 발생하는 참사다.
[<도끼>를 획득하였습니다.]
[<장검>을 획득하였습니다.]
[<단도>를 획득하였습니다.]
[<단궁>을 획득하였습니다.]
[<화살> 4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배낭★>을 획득하였습니다.]
<★배낭★>
히든 아이템입니다.
생명력 회복 물약과 마나 회복 물약의 최대 보유 수량을 1개 확장시켜줍니다.
“오...?”
케롤라인 마을을 점거한 채 수많은 경쟁자들을 사냥하였던 프랑스 3인방은 좋은 물건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을 쓰러뜨린 그리드가 큰 이득을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룰루랄라.
기쁨에 콧노래를 흥얼거린 그리드가 단궁과 화살을 지슈카에게 넘겨주었다.
“근거리에서는 대궁보다 단궁이지? 적절히 교체해가면서 써.”
“이걸 내게 다 주면 그리드 너는?”
지슈카는 앞서 그리드에게 받았던 대궁도 돌려줄 생각이었다. 본래 그리드의 물건이니 당연했다.
또 괜한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단 생각에 불편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어차피 나 성직자라서 활 못 써.”
“성직자?”
“응.”
“.....”
그리드가 당연히 제작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지슈카다. 근데 성직자라니?
“...전사도, 마법사도 아니고? 성직자?”
“그렇다니까?”
“.....”
그리드와 성직자라.
이렇게도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난감해하는 지슈카에게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설령 내가 활을 쓸 수 있었더라도 활은 네게 맡겼을 거야. 너의 궁술이 최고라는 걸 아니까. 자, 이 물약 마셔.”
그렇다.
그리드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다.
“지슈카, 우리도 팀을 맺자. 함께 살아남자.”
“응....!”
활짝 웃은 지슈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 3인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생존 게임.
이곳에서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는 든든하고 기뻤다.
***
배틀 필드가 시작되고 1시간 반.
『이제는 개인전이라고 보기 어렵게 됐군요.』
166명의 생존자 대부분이 저마다 팀을 맺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생존자가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배틀 필드 참가자들은 서로의 정체를 비교적 쉽게 유추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들은 평소의 인맥과 사상을 이용해서 아군을 구했고, 서로 같은 목적 하에 손을 잡았다.
『배틀 필드는 랭커 개개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취지로 마련 된 이벤트라고 할 수 있죠... 작금의 흐름이 과연 S.A그룹이 바라던 전개일지는 의문입니다.』
개인전이 팀 단위 게임으로 변질 된 것은 분명한 문제다.
이렇듯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커뮤니케이션 능력 또한 그 개인의 역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보다 유능하고 믿을 수 있는 팀원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셈이나 다름없죠. 저는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팀을 이루는 것 또한 능력이다.
이렇듯 생각하며 작금의 상황을 반기는 사람도 많았다.
대체적으로 후자였다.
-결국 3인 생존 게임이니까 3명 단위로 팀 맺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좋은 팀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다 개인의 역량인 거고.
왁자지껄!
인터넷은 후끈 달아오른 상태다.
166명의 생존자 모두가 하나 같이 쟁쟁한 인물이었던 까닭에 시청자들의 몰입도가 높아졌다.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저 실력자들 중에서 과연 최후의 3인이 될 사람은 누굴까?
일단 1명은 확실하다.
***
배틀 필드 시작과 동시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하도로 피신했었다.
상대적 약자들은 비교적 개방되어 있는 지상보다 어둡고 복잡한 형태의 지하야말로 자신의 몸을 지키기에 용이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하로 피신한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지형을 고른 뒤, 자리를 잡고 숨어서 이상적인 방어태세를 취했다. 맵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제한 시간 동안 자신은 안전할 거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재앙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재앙의 정체는 검성 크라우젤이었다.
어두운 시야와 좁고 복잡한 지형.
일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지하도는 공격자에게 불리한 공간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수비 쪽에게 너무 유리했다.
하여, 다른 사람들은 섣불리 지하에 입장하지 못했지만 크라우젤의 해석은 달랐다. 크라우젤은 밀폐 된 지하야말로 완전한 사냥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숨어있는 대상들, 안전을 대가로 도주로를 잃었으니까.
그는 잠재적인 위협이 될 경쟁자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친히 지하에 강림했다. 그리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족족 베었다.
인외(人外).
신이 내린 재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했고, 그렇기에 하늘 그 자체로 칭송 받았으며, 급기야는 천외천의 칭호를 거머쥔 인물.
오로지 컨트롤 솜씨로만 승부를 보는 배틀 필드에서 크라우젤은 무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는 반면 그는 사방에서 쇄도해오는 공격조차도 무력화시켰다.
인간의 범주에 넣기는 확실히 무리였다. 마치 영화 속 절대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이걸로 다 정리 됐나?’
지하도에 숨어있던 백 단위 경쟁자들을 모조리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제 지하에 남은 건 그 하나였다.
저벅저벅.
1,500명의 배틀 필드 참가자 중에서 100단위 킬을 올린 인물은 크라우젤이 유일했다. 정확히는 127킬. 고작 1시간 반 만에 올린 기록이다.
“음.”
전리품 중에서 쓸만한 아이템은 모조리 인벤토리에 챙긴 뒤, 지상에 오르려던 크라우젤이 제자리에 섰다.
생존자수가 벌써 2분 째 166명에서 멈춰있었던 까닭이다.
‘슬슬 팀을 맺기 시작한 건가?’
배틀 필드의 규격을 감안해 봤을 때, 166명의 인원이 남은 지금 소강상태가 찾아오는 것은 너무 일렀다.
크라우젤은 배틀 필드가 더 이상 개인전이 아니게 됐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간파했다.
그렇기에.
‘일단 대기해야겠군.’
경계한다.
절대무적인 그가 무엇이 두려워서?
그야 당연히 그리드다.
‘그리드의 인망이라면 템빨단원들을 규합했을 공산이 크다.’
아직 그리드가 세상에 실력을 인정 받지 못했을 무렵부터 그리드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 바로 크라우젤이었다.
그는 그리드의 모든 면을 경계했다.
컨트롤 솜씨와 순발력은 기본이고 커뮤니케이션 능력까지 고려했다.
그리고 계산한 결과, 현재 시점에서 자신에게는 승산이 적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드가 템빨단의 상위 실력자들과 협동할 경우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기다린다.’
크라우젤이 지하의 어둠 속에 모습을 감췄다.
그는 생존자수가 더욱 더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할 각오였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지하도에 찾아온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쓰러뜨릴 것이었고.
***
배틀 필드 개시 후 2시간 반이 지났다.
제한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은 현재, 배틀 필드의 규격은 처음과 비교해서 3분의 1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살아남은 32명의 생존자들은 은신이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지하로에 잠들어있던 핵폭탄 크라우젤 또한 슬슬 움직일 채비를 갖췄다.
“주군....!”
몽골 대표들이 탑승한 비행기.
배틀 필드에 입장하자마자 광역 패드립을 시전하였다가 ‘첫 번째 탈락자’가 되는 영광... 아니, 고배를 마셨던 후로이가 근심한다.
그는 모니터 속 그리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슈카와 팀을 맺은 이후, 화살과 경전의 확보를 중점적으로 활동한 그리드에게 아군은 여전히 지슈카 한 명밖에 없었다.
반면 다른 생존자들은 최소 3명에서 많으면 5명까지 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크라우젤은 혼자였지만 그는 논외로 치고 말이다.
“주군께서 너무 불리하시다...!”
내가 유능했더라면!
처음 배틀 필드에 접속했을 때, 호기를 보인답시고 광역 도발을 시전하지 않고 단 한 명에게만 욕설을 날렸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내가 주군의 곁을 지키고 있었을 터인데!! 한 순간의 객기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었구나!!”
“.....휴우.”
한탄하는 후로이를 바라보는 몽골 대표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만약, 후로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욕설을 지껄이고 다녔다면 몽골이 큰 망신을 당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후로이가 조기 탈락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앞으로 2분 후, 미니 맵에 표기 된 공간이 소멸합니다.]
삐이삐이!
경고창이 떠오르는 간격이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생존자들은 더 이상 은신할 공간을 찾기 어려워졌다. 몇 채의 건물 사이로 서로를 마주볼 수 있을 정도로 서로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제부터 진정한 실력 싸움이지.”
“우리 파티를 넘어설 파티는 없어.”
32명의 생존자들은 각자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특히 레가스와 폰, 그리고 라우엘 파티의 기세가 굉장했다.
최강의 컨트롤 실력과 최고의 두뇌가 결합 된 파티.
그들은 상대가 그 누구라도 싸워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여태까지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들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
“후후훗.... 설령 전하께서 오시더라도 우리를 막을 순 없을 겁니다.”
라우엘이 음침하게 웃는다.
실제로 시청자들은 이들 셋을 우승후보로 인식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조차도 이들에겐 안 될거라고 보았다.
여태까지 폰과 레가스가 보여준 실력, 그리고 라우엘의 임기응변은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에겐 쥐약이 있었다.
바로 그리드였다.
“다들 들어라!!”
“....?”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생존자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린다.
남녀 한쌍의 듀오가 보였다.
남성 쪽이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부터 항복하는 사람한테는 내가 아이템 만들어준다!!”
“....?”
저자는 누구기에 갑자기 헛소리지?
모두가 의아해하는 반면 라우엘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저건 반칙....!”
“나, 템빨왕이야!”
“....!”
생존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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