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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85화 (580/1,794)

템빨 35권 - 17화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그리드는 중국에서 한국까지 찾아왔던 하오에게 짬뽕을 대접한 기억이 있다.

그것도 일반 짬뽕보다 무려 1,000원이나 더 비싼 뚝배기 짬뽕이었다.

“그때의 은혜를 갚은 거구나.”

잿빛으로 산화하는 하오를 보면서 그리드는 다짐했다.

앞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가겠노라고. 여느 위인들처럼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선행할 생각은 없지만, 적절한 한도 내에서는 많은 사람을 돕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그리드는 깨달았다.

‘내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하오처럼 은혜를 갚게 될 테니까!’

충만한 흑심!

그리드가 결심한 선행의 의도는 조금도 순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족의 발전이다. 본래 그리드는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 자체를 혐오했었던 인물이니까.

하지만 이렇듯 변해 간다.

친구를 사귀고, 동료들과 함께하고, 가족과 사랑을 나누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다시 한 번 더 고맙다, 하오.”

그리드는 하오가 건네주고 떠난 푸른 책자를 확인했다. 경전이었다. 하오 또한 게임 시작과 동시에 신전에 들렀던 것으로 추정됐다.

“다음에 또 한국에 온다면 그때는 삼선짬뽕을 대접하마....”

경전을 인벤토리 한쪽에 고이 보관한 그리드가 하오와 호주 대표가 사망한 장소로 다가갔다. 그들이 아이템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을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드롭된 아이템이라고는 화살 5개가 전부였다.

‘죽는다고 해서 소유한 아이템을 무조건 다 떨어뜨리는 게 아니고, Satisfy처럼 확률적으로 드롭하는 건가보군.’

성직자는 활을 못 쓴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그리드가 화살을 챙긴 뒤 오두막 뒤편으로 이동했다.

오두막은 벼랑 끝에 위치해 있었고, 벼랑 아래로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이곳이 숲의 끝인 것이다.

‘저곳에 들러서 검을 몇 개 더 확보하는 편이 좋겠어.’

배틀 필드의 아이템들 또한 Satisfy처럼 내구도가 존재했다. 사용할 때마다 무기 위의 붉은 게이지가 조금씩 줄었다. 그리드는 이 게이지가 전부 사라지는 순간 아이템이 파괴될 것으로 추측했다. 하오와 싸우면서 절반의 게이지가 줄었기 때문에 여벌의 무기가 필요했다.

결정한 그리드가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에 있을지 모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

미니 맵에 <케롤라인>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는 작은 마을이 있다.

고도가 높은 숲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배틀 필드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이곳에 있는 거라고는 작은 집 9채가 전부였다.

지금 그곳에.

“허억.... 허억....”

브라질 대표 지슈카가 고립되어 있었다.

혹시 아이템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하고 케롤라인에 들렀던 것이 잘못이었다.

‘팀 단위로 활동하는 놈들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마을에 입장하자마자 3인에게 기습을 당하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그녀였다. 이제 남은 생명력은 7밖에 없었고, 무기의 내구력은 부셔지기 일보 직전으로 떨어져 있었다.

‘활만 있었어도...’

지슈카는 신궁이라고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는 활이었다. 활이야말로 그녀의 진정한 실력을 입증할 수 있는 도구였다.

하지만 재수도 없지, 배틀 필드에 입장한 뒤로 활이라고는 구경도 못해 본 그녀이다.

“아가씨, 어차피 죽을 거 시간 끌지 말고 빨리 튀어나오지 그래. 응?”

“꼴사납게 뭐하는 짓이야? 그래 봬도 너 또한 한 나라를 대표하는 랭커일 텐데,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는 건 부끄럽지 않아?”

“아니면 허접한 나라의 대표라서 명예 따위 없는 건가? 낄낄.”

상처 입은 지슈카가 피신해 있는 집을 포위하고 선 3명의 남성이 번갈아 가면서 외친다.

보다 안전한 사냥을 위해서 사냥감을 도발, 유인하고 있는 이들의 정체는 프랑스 대표들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들은 배틀 필드에 접속하기 직전에 자신들끼리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신호를 지정해 놓았고, 이후 운 좋게 무사히 만나 3인 1조 팀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 케롤라인에서 그들이 사냥한 사람의 숫자가 벌써 40명에 육박했다.

“...끝까지 안 나오는군.”

“빌어먹을, 반드시 잡아야 돼. 저 여자 하이 랭커라고.”

프랑스 대표들이 저마다의 상처를 살피면서 치를 떨었다.

지금 집에 숨어 있는 여성을 사냥하려다가 역으로 큰 피해를 입은 그들이다. 그들은 초조했다. 저 흉포한 맹수를 빨리 처리해야지 다음 사냥을 개시할 수 있었으니까.

3인 중 리더격인 남성 드레인이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곧 보급품이 떨어질 시간이다. 우리는 물약을 확보해서 회복할 수 있는 반면 저 여자는 아니야. 침착하게 기다리자. 결국 초조한 건 저 여자 쪽이니까.”

시간은 우리 편이다.

이후 맵이 좁아져서 더 많은 경쟁자와 한 번에 싸우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셋이다.

“우리는 반드시 최후의 3인이 될 수 있어.”

“맞아.”

“그래, 기다려 보자고.”

드레인은 동료들에게 의지되는 존재였다.

늘 냉정하여 실수를 하는 법이 적었고, 통합 랭킹이 무려 1만 위권일 정도로 무력도 뛰어났다. 그와 함께라면 반드시 최후의 3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프랑스 대표들이 믿는 그때였다.

펄럭-!

하늘에서 낙하산 하나가 떨어졌다.

보급품 상자를 실은 낙하산이었다.

“왔다!”

“물약이야!”

프랑스 대표들의 시선이 동시에 하늘 위로 향했다. 운 좋게도 보급품이 근처로 떨어지고 있었다. 40미터 거리였다.

드레인이 말했다.

“너희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 물약은 내가 가져오겠다.”

“알았어.”

“저 여자가 수작 부리지 못하게끔 잘 지킬게.”

끄덕.

동료들의 믿음직한 대답을 확인한 드레인이 곧바로 이동했다.

보급품이 떨어진 장소는 케롤라인 마을 내부.

이미 자신들이 1시간 이상 점거한 장소인 바, 위험이 도사릴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 드레인의 판단이었다.

역시나.

‘있다!’

보급품 상자는 떨어진 자리에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그린 드레인이 4채의 집이 나란히 서있는 골목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리고.

덥썩!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손을 뻗은 드레인이 보급품 상자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연(聯).”

피핏-!

“큭....!”

날카로운 베기가 2회 연속으로 날아와 드레인의 손등을 베었다.

2의 데미지를 입은 드레인은 물리적인 충격으로 보급품 상자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웬 놈이...!”

모르는 틈에 또 다른 침입자가 마을에 잠입했다고?

빌어먹을, 여성 하이 랭커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집중한 것이 문제다. 경계에 신경 쓰지 못했다.

작금의 상황에 분노를 느낀 드레인이 황급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휘둘렀다.

쩌정-!

허공에서 맞물리는 두 자루의 검이 공명한다.

도끼눈 뜬 드레인이 침입자를 위협했다.

“나는 전사다...! 고작 1의 데미지밖에 입히지 못하는 네놈과 달라!”

터엉-!

온 힘을 다해서 검을 튕겨 낸 드레인이 돌 같이 단단한 어깨로 상대를 밀쳤다. 그리고 상대방의 균형이 무너진 틈을 타서 검을 내질렀다.

통합 랭킹 10,000위권의 랭커답게 뛰어난 전투 능력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 중에서 드레인의 실력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면의 주인공이 되었던 하오와 비교했을 때 드레인의 실력은 도리어 평범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가 상대하는 침입자는 그 하오마저도 꺾은 통합 랭킹 2위 템빨왕이다.

“회(回).”

까가가가강!

“뭣....!”

쓰러질 듯이 기운 몸을 자연스럽게 회전시켜서 나의 공격을 막아 내고 동시에 반격하다니?

회심의 일격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1의 데미지를 더 입은 드레인이 질색했다.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놈도 하이 랭커다....!’

그것도 자신과는 다른 수준이다.

5,000위권. 아니, 어쩌면 1,000위권 하이 랭커일 공산이 크다.

‘승산이 없어!’

동료들과 합류해야 한다.

판단한 드레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보급품 상자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덕분에 그리드는 손쉽게 보급품 상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생명력 회복 물약>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마나 회복 물약> 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물약을 3개나 주네?”

마나 회복 물약이 특히 반가운 그리드였다. 이로써 앞으로 경전을 몇 개나 더 확보하더라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개이득.”

피해도 없이 손쉽게 싸운 후 이런 득템을 하다니!

그리드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혹 다른 누군가에게 위치가 발각될까 우려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른 빈집들을 수색해 보려다가 제자리에 멈췄다.

꺄아아아아아악!!

여성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까닭이다.

조금 전,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뒤 도망친 남성이 향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였다.

‘가 보자.’

당연히, 저 정체도 모를 비명의 주인을 도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없을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고 거저먹으려는 의도였다.

***

“빌어먹을! 빨리 마무리해야 돼!”

정체불명의 하이 랭커에게 기습을 당하고 보급품 상자를 빼앗긴 드레인은 조급해졌다. 늘 냉정하게 동료들을 다독여 주던 리더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왜? 무슨 일인데?”

동료들이 불안해졌다. 보급품을 확보하러 갔다가 물약을 가져오기는커녕 도리어 상처를 입고 온 드레인이다. 어떤 문제가 생긴 건지 걱정이었다.

지슈카가 숨어 있는 집의 문을 노리고 검을 겨냥한 드레인이 설명했다.

“또 다른 하이 랭커가 나타났어. 분명히 우리를 노릴 거야. 놈이 오기 전에 이 집 안에 숨어 있는 여자부터 해치워야 돼.”

아예 마을을 버리고 도망쳐 버리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가는 예측 불허의 위험이 도사릴 가능성이 너무 컸다. 드레인은 기껏 터를 잡은 이곳을 아직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읽은 동료들이 호응했다. 한 명은 철퇴를, 또 다른 한 명은 도끼를 꺼내서 셋이 동시에 문짝을 날려 버렸다.

“당신들....!”

상처 입은 채 집 안에 숨어 있던 지슈카가 황급히 검을 뽑아 쥐었다.

대항하려는 의도였지만 쉽지 않았다.

쩡-! 쩌저정!!

푹!

“으읏!”

좁은 장소에서 무려 3명에게 협공을 당하기 시작했으니 힘든 싸움일 수밖에 없다. 특히 지슈카는 근거리 전투에 능숙하지 못했다. 프랑스 대표 3인방보다 컨트롤 솜씨가 뛰어날지언정 그들을 압도한다는 건 완전히 불가능했다.

결국.

“꺄아아아악!!”

연달아 치명타를 입은 지슈카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도끼에 허리를, 철퇴에 발등을 찍히면서 그녀가 심리적으로 받는 고통과 두려움은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 대표 3인방은 전원 전사였다. 지슈카는 미리 확보해 놓았던 물약을 전부 마셔 보았지만 어느새 생명력이 3밖에 남지 않았다.

“진짜 지독하게도 버티네.”

“이제 끝이다.”

지슈카 또한 전사였다. 그녀가 격렬히 저항한 탓에 프랑스 대표들 또한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드디어 끝이다.

사투 끝에 프랑스 대표들은 지슈카를 완전히 제압했다. 이제 드레인이 마지막 일격만 넣으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끝이었다.

드레인이 지슈카의 가슴에 검을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파(派).”

텅-!

터터터텅!!

갑자기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프랑스 대표 3인이 동시다발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광역기?’

프랑스 대표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틀 필드에는 공격 스킬이 없지 않던가? 한데 갑자기 난입한 이자는 어떻게 우리를 동시에 타격한 거지?

떨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들에게, 부채꼴을 그렸던 검을 회수한 그리드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치사하게 남자 셋이서 여자 한 명 상대하지 말고 이리 와.”

“.....”

프랑스 대표 3인방을 사이에 둔 그리드와 지슈카의 시선이 교차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고 있었다.

지슈카는 파그마의 검무를 단서로 삼았고, 그리드는 그녀의 가슴을 단서로 삼았다.

‘그리드....’

‘E컵....’

그리드는 여성의 정체를 지슈카로 확신했다. 단지 사이즈뿐만이 아니라 형태까지 일치했으니까. 비록 얼굴과 목소리는 확인할 수 없더라도 딱 알 수 있다. 저토록 이상적인 몸매를 지닌 여성은 그리드가 알기로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쩌엉-!

재차 검을 휘둘러서 드레인을 날려 버린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활과 화살을 꺼냈고, 그것을 지슈카에게 던져 주었다.

“날아올라라!”

“응....!”

신궁이 강림한다.

“좁은 곳에서 무슨 활을...! 컥!”

프랑스 대표들의 미간을 화살이 연달아 꿰뚫었고, 맥없이 쓰러지는 그들을 그리드가 손쉽게 마무리했다.

흩어졌던 인연이 한데 뭉친 이 순간.

-완전히 백마 탄 왕자님이네.

-내 여자는 내가 지킨다 이건가.

-지슈카 정말로 섹시하고 예쁨.... 그리드 너무 부럽다 진짜.

그리드의 안티 카페 회원 수가 팬 카페 회원 숫자만큼 창궐하기 시작한다.

남성들의 질투로 인해 해마다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배틀 필드는 후반으로 치닫는다.

현재 생존자 수, 166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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